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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줌 Apr 01. 2024

변호사 선임과 이혼소장 송달

이혼소송 톺아보기(1)






변호사 선임


USB에 따로 저장해 두었던 '이혼' 폴더를 몇 년 만에 다시 열어보았다. 그 안에 담긴 '진술서'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한 여자의 4년에 걸친 애씀과 울부짖음, 그리고 결단이 담겨 있었다. 일곱 장에 걸쳐 빼곡히 쓰여 있던 진술서의 마지막 문단은 이러하다.




제가 이를 악물고 지금까지 기다린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 힘으로 만들 때까지 견디자는 마음. 수술 후 잘 회복해 건강을 되찾고, 직장 근처에 안전거처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어린이집에 아이가 잘 적응하도록 기다려주는 것.


이제 이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저는 아이와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남편이 더 이상 우리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이혼 절차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의미 없는 혼인관계를 종결하고 저 자신이자 아이의 엄마로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진술서라기보다 마치 어떤 선언문 같다. 현실을 자각한 나는 각성했고 이미 달라져 있었다. 6월 첫째 주 종양 제거수술을 받고 꿰맨 자국이  아물기도 전에 변호사를 선임하고 남편에게 소장을 날렸다. 평소 화만 나면 '이혼하자'는 말을 협박용 무기로 무분별하게 사용해 온 그였다. 수술 전 마지막 대화였던 고속도로 차 안에서도 그는 분명 '우리는 이대로 가면 어차피 끝이 아주 안 좋을 것 같다. 좋은 말로 할 때 살인나기 전에 합의해라'라고 했다. 나만 오케이 하면 일사천리로 합의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그럼 둘째 주에 보자'라고 답하자, 그는 시간도 안 되어 돌연 입장을 바꾸었다. ‘지금도 를 사랑하는데 내가 정신병이 생긴 것 같아. 나는 엄마도 지키고 내 가족도 지키고 싶어. 근데 방법이 없어서 미쳐가는 것 같아. 어떻게 좀 해......' 스스로 문제를 크게 만들어놓고 나보고 해결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혼을 하자고 했다가 할 수 없다고 하고,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다가 절대 줄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재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가벼움에 헛웃음이 났다. 헤어지기로 결심한 마당에 언제까지 그 장단에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나는 합의를 포기하고 바로 소송으로 갔다. 하지만 제대로 된 증거 하나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폭력은 보이지 않았고 매번 경계선 앞에서 멈추었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자각하기 전까지 한 번도 녹음을 하거나 증거를 수집할 생각을 못했다. 그해 1월부터 있었던 일을 기록해 둔 일기와 진료기록, 몇 장의 메모뿐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 이 사람과 이혼하게 해 달라. 

둘.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지켜달라.


위자료니 양육비니 이런 건 둘째 문제였다. 이혼을 하자고 협박하다가 이제는 절대로 이혼을 못 해주겠다는 이 남자를 내 삶에서 떼어내야 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나를 괴롭혔다 예뻐했다 하며 장난감 취급했다. 그렇게 잡은 고기 같던 내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심한 말로 겁을 줬다가 신혼여행 사진을 보내며 눈물로 회유하기도 했다. 내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급기야 자기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했다. 그 무책임함에 기가 막혔다. 쇼인 줄 알면서도 불안하고 괴로웠다.


이미 바닥을 충분히 보여주었는데도 아직 더 내려갈 곳이 있는지 그는 이등병 시절로 돌아가 열심히 삽질을 했다. 바닥을 뚫고 지하를 파고 들어가도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점점 더 확신을 얻었다. '잘 결정했다. 정말 잘 결정했다. 더 늦기 전에 해서 다행이다. 더 일찍 할 것을!'


제출한 진술서와 자료들을 검토한 변호사가 말했다. "폭력이나 폭언의 증거가 없는 게 아쉽네요. 장기간의 괴롭힘으로 당사자는 괴로운데 증명하기가 어려운 케이스입니다. 그래도 이혼은 될 겁니다. 배우자와 직계존속의 심히 부당한 대우 및 기타  혼인을 지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로 소장 작성하겠습니다."


외도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 있어도 위자료가 2~3천밖에 안 되는 것이 대한민국 현행 판례라고 했다. 위자료는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변호사와 상의해 위자료 천만 원에 양육비 100만 원을 주장기로 했다. 몇 주 뒤 소장을 받은 남편이 내게 카톡 폭탄을 쏟아내며 발악했지만 법의 힘과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그가 전화해서 소리를 지를 때 나는 사무장이 알려준 대로 녹취를 했다. 소장 받기 전의 폭언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얼마나 감정조절이 안 되고 부당하게 배우자를 협박해 왔는지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했다. '전남편'이 되기 전 '남편'으로서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혼소장 송달


소장의 송달을 기점으로 이제 우리의 문제는 법원이라는 새로운 판에서 다뤄지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일을 하고 아이를 기르는 전업 싱글맘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모르는 것도 많고 낯선 곳에 아이와 단 둘이 덩그러니 남겨져 두려움도 수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남편과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만큼 끔찍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세 살배기 아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소장에 대한 답변서에 '피고는 아직 원고와 사건본인(자녀)을 사랑하므로 이혼할 의사가 전혀 없다'라고 작성해 법원에 보냈다. 그의 놀라운 현실인식과 과감한 사랑고백에 아마 판사도 웃었을 거다.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그의 문제해결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가 바로 드러났다. 그가 살아온 방식대로 그냥 우기고 뭉개면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등신이 뭐가 두려워서 나는 내 몸에 종양 덩어리가 생기도록 시원하게 욕 한 번 못해 보고 살았나. 담벼락에 비친 사나운 승냥이의 그림자 무서워 숨기만 했다. 그런데 용기 내어 다가가보니 허무하게도 그곳에는 아주 작고 못생긴 똥개 새끼 한 마리가 겁에 질린 눈빛으로 떨고 있었다.


상대는 법적으로 무지했고 대책 없이 자신만만해서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법무사를 통해 행정처리만 맡기고 있었다. 내 입장에선 참 다행이었지만 그의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성향 때문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칼 들고 찾아오면 어쩌지,

어린이집에 와서 몰래 애를 데려가면 어쩌지,

홧김에 진짜 자살해 버리면 어쩌지......'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수천수만 번 시뮬레이션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했다. 나는 안전장치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우선 그의 습격에 대비해 호신용 전자휘슬을 샀다. 가스총이나 스프레이 같은 것도 생각했지만 무기류는 뺏기는 순간 나를 향할 것이었다. 그래서 유사시 주변 사람들이라도 빨리 달려올 수 있도록 큰 소리가 규칙적으로 계속 울리는 구조용 휘슬을 구매해 가방에 항상 챙겨 다녔다.


휴대폰 긴급 SOS와 긴급상황공유 기능을 켜두고 경찰과 가족들에게 바로 문자가 가도록 설정해 뒀다. 이 기능을 켜두는 바람에 휴대폰 측면버튼이 옷 속에서 여러 번 눌리면서 바쁜 경찰관들을 수시로 출동시켰다. 민망한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불안감 때문에 꺼둘 수가 없었다. (정말 감사하고 죄송했다.)


어린이집에도 만약 아이 아빠가 찾아오면 아이부터 내주지 말고 내게 연락해 달라고 거듭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남편이 아이사랑 에서 어린이집 정보를 조회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업체 측에 메일을 보냈다. 원래 직접적인 가정폭력이 입증된 '보호아동'만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혼소송 중인 상황을 이야기하자 담당자는 임시방편으로 조회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해주었다. (정말 감사했다.)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은 내게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된다며 "남편분이 아이에게 그 정도 열정이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지켜본 사람의 통찰이었다. 보통 이런 남편들은 아이에게 별 애정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불안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사무장의 말이 맞았다. 소송이 끝날 때까지 전남편은 아이 어린이집을 수소문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내게 전화해서 소지르고 카톡으로 괴롭히는 것이 그가 한 유일한 발악이었다.


카톡을 차단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계속해서 진실을 왜곡하는 카톡을 보내왔기 때문에 사무장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답을 남기라고 했다. 안 그러면 그가 내용을 캡처해서 가짜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많게는 600여 통이 왔다. 끔찍했다.


아이를 재우고 녹초가 된 상태로 매일 밤 그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일일이 읽고 반박해야 했다. 며칠 만에 정신이 피폐해졌다.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사무장은 상대도 변호사 상담을 받으면 더 이상 저렇게 못할 거라고 그때까지만 버티라고 했다. 보통 소장을 받으면 바로 조용해지는데 이상하다고도 했다. 역시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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