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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니버서리 Mar 25. 2024

내 남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






조직검사 결과 발표 전날,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주말 간 시댁에 있다 일요일 오전 서울로 이동 후, 다음 날 병원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토요일 저녁 고향친구를 만나러 나가 밤늦게 들어온 남편은 일요일 오전 11시가 넘도록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나는 누워 있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인사불성이었다.


시어머니는 서른을 훌쩍 넘긴 남편을 아기 대하듯 했다. "우리 우영이(가명)~ 피곤했나 보네. 쯧쯧 딱해라. 어여 더 자, 더 자. 누워 푹 쉬어......" 출발은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친정 부모님과 다음 날 일찍 병원에 가야 하는 나의 스케줄은 누구의 안중에도 없었다. 아내가 암인지 뭔지 그 떨리는 결과를 받으러 가는 날인데, 나의 건강은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결국 정오를 넘겼다. 머리에 까치집을 달고 팬티 바람으로 한 손으로 배를 긁으며 나오는 남편의 첫마디는 "배고파, 엄마"였다. 시어머니는 즉시 밥을 대령했다. 점심까지 다 먹고 T맵을 찍어보더니 주말이라 벌써 막히기 시작했다고 아예 더 있다 가잔다. '여기서 더 늦게?'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차 주인 마음이었다. 결국 우리는 그날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주말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시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힘들어. 너 때문에! 우리 엄마가!" 머릿속에서 5초 간 커다란 징이 묵직하게 울렸다. 그에게 '우리 가족'은 '아내와 아이'가 아니었다. 아직도 미혼 시절 그대로 '자신과 엄마(아빠)'로 구성된 시댁 식구만을 가족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런 인간을 남편이라고 가장으로 떠받들며 살아온 내 4년 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구나.

아니,

한 번도 가족이었던 적이 없구나!'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빠라는 개념조차 없는 한 어린아이가 내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뭐라 뭐라 계속 소리를 치는데 음소거 버튼이 눌린 듯 입모양만 붕어처럼 뻐끔거리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편안했다. 나의 남편이 아닌 그녀의 아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엄마품으로 그를 돌려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남편의 입에서 나온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힘들다'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거인이 제 몸집보다 더 큰 바위를 들어올려 있는 힘껏 내 머리를 향해 내리치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안전하고 굳센 울타리 안에서 무서운 벌판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우리 원가족이 유별나게 서로 살갑고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다. 여느 가족들처럼 붙어 있으면 투닥거리고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는 보통의 가족이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체득한 '가족의 의미'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함께 이겨낼 때 비로소 진짜 큰 힘을 발휘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부모님을 보며 어깨너머로 배운 가족의 의미였고, 나 역시 그런 가족을 만들거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설사 이혼소송 중이었다고 해도 한쪽이 갑자기 몹쓸 병에 걸리면 잠시 휴전하는 게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에 대한 예의 아닌가. 시 우리는 아직 이혼을 결정한 때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아프자 남편은 더 노골적으로 막말을 했다. 그에게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자꾸만 내 눈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라고, 그래야 네가 산다고.



 





꽉 막힌 일요일 저녁의 고속도로 정체 속에서 그의 폭언은 세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날 차 안에서 들어야 했던 말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분명한 건 그날이 드디어 내가 똑똑히 현실을 자각하게 된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단지 화가 났다는 이유로 다음 날 조직검사 결과를 받으러 가는 아내의 불안한 마음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폭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밤중에 나를 길에다 버리고 가버렸다. 1호선 지하철 역 앞에 차를 세우더니 내리라고 했다. 밤 10시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려 승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지하철 한쪽 구석 유리문에 붙어 멀어져 가는 밤풍경을 바라보며 아빠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지하철 타고 가고 있어요. 영등포역으로 데리러 와주세요."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 조용한 지하철 안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계속 울리는 전화를 손에 꼭 쥐고 끝내 받지 못했다.


1시간쯤 지나 도착한 역사에서 놀란 얼굴의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왜 이리 늦었어. 내일 병원 가야 하잖아......" 집으로 가는 아빠 차 안에서 더는 못하겠다고 울분을 토하며 주말 사이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아픈 애를 길에다 내팽개치고 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빠가 남편에게 전화를 시도했지만 그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진단서에 적힌 병명은 '좌측 악하선 다형선종 '이라는 긴 이름이었다. 의사 말로는 '침샘 종양'이라고 했다. 조직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 성당에 안 간지 10년도 넘은 냉담자였지만 나도 모르게 하늘에 감사 기도를 올렸다. 다만, 열어 봤을 때 종양만 따로 떼어내기 어려울 경우 붙어 있는 침샘을 같이 적출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종양과 침샘 1+1 제거수술 날짜를 잡고 얼마 뒤 입원했다.


코로나 시국 관계로 보호자 1인만 동행이 가능했다. 1초도 고민 없이 엄마와 가기로 했다. 남편 출근이니 거리니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남편을 내 보호자로 믿고 편안히 수술받을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 사이의 신뢰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깨어져 있었다.


엄마와 병원 앞 선별진료소에서 코 쑤심을 당하고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입원 준비를 마쳤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니 영락없는 환자였다. 열일곱 살 때 교통사고로 3개월 간 입원한 후 정확히 20년 만이었다. "그때는 한밤중에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가 휠체어 타고 나갔는데, 그래도 이번엔 두 발로 걸어 들어가네"라며 엄마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나는 외계 생명체 같이 생긴 종양과 그것이 찰거머리처럼 끝내 놓아주지 않던 침샘 하나를 떼어냈다. 놀랍게도 우리 몸에는 침샘이 세 개나 있어서 하나를 떼어내도 침 공급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내 목에는 커터칼 테러 내지 최소 자해 시도가 합리적으로 의심되는 흉터가 영광의 상처로 남았다. 의사는 세월이 지나면 목주름과 비슷해지도록 최대한 자연스러운 라인으로 절개했다고 말했지만 별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남편은 내가 퇴원하는 날까지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


수술 직후 의사가 스테인리스 트레이에 담긴 종양 덩어리와 침샘 일부를 내게 보여주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역겨웠다. 종양은 내 소중한 침샘에 몰래 잠입해 혈액과 양분을 기생충처럼 빨아먹으며 몸집을 키워 마침내 침샘보다 커다랗게 자라나 있었다. 결국 오래된 칡뿌리처럼 따로 떼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얽히고설켜 내 몸의 일부를 함께 죽여야 했다.


그 모습이 나와 남편의 관계 같기도 해서 조금 서글펐다. 그를 내 삶에서 도려내려면 나의 일부도 함께 죽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내 앞에서 '네 남편'이 아니라 '우리 엄마 아들'로 살겠노라고 선포한 지질한 놈이었지만, 4년 동안 얽히고설킨 부부의 연은 그렇게 질겼다. 커터 칼로 쓱 벤다고 깔끔하게 둘로 쪼개질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에 들어온 암 덩어리 같은 존재들을 떼어내기로 결심했다. 내 몸 수술은 성공했으니, 이제 내 인생을 수술할 차례였다. 그동안 참느라 속으로 병들어가는 것조차 몰랐던 과거의 미련한 나도 이번에 1+1으로 함께 적출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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