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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니버서리 Apr 09. 2024

악인은 바로 당신 곁에 있다

나는 너의 인형이 아니야






나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게 타고난다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옆에서 배를 곯는데 태연하게 빵을 먹을 수는 없다고, 그럴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나는 대학에서도 인문학을 전공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른바 '문. 사. 철'을 만들어낸 인간의 위대함에 경외감을 느꼈고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랑스러웠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와 철학을 갖고 살아가며 서로 관계를 맺고 삶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인문학을 통해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자연히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도 귀 기울이게 됐다. 나와 다른 사회문화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꿈을 꿀까 항상 궁금했다. 그렇게 타인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살던 나의 오지랖은 마침내 바다 건너에까지 닿았다. 빈곤국 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후원과 해외봉사, 비영리단체 활동 참여로 이어졌다.


그렇게 인류애가 평균 이상으로 넘치는 사람이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신의 필요나 욕구에 따라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으면 감정까지도 연기할 수 있다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몸소 겪어버렸다.


전남편은 참 순박하고 잘 웃는 좋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 미소에 나도 우리 가족도 금세 경계를 풀고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누가 봐도 사람 좋은 것이 분명해 보였던 그 얼굴 뒤에 단 둘이 있을 때만 보이는 다른 얼굴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부모 앞에서도 연기를 했는데, 처음에는 나도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래' 하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부모를 염려하는 속 깊은 장남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걸 모르는(-혹은 모른 척하는-) 시어머니도 이상했고, 내게 동조를 강요하는 전남편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혼 후 4년 동안 그는 무려 10군데의 회사를 옮겨 다녔다. 가장 오래 다닌 곳이 8개월이었다. 처음에는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분야는 원래 이직이 많아' 하는 그의 말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횟수가 잦아질수록 안했다.



"회사 그만뒀어"

"갑자기? 무슨 일 있었어?"

"장이랑 싸웠어"

"왜...? 그렇다고 바로 그만둬?"

"사장이 잡았는데 원래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회사 밥도 맛없고 멀고. 이참에 딴 데 가지 뭐"

"그래도 옮길 곳을 정하고 퇴사해야지.. 나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러면 어떡해"

"아, 내가 퇴사할 만하니까 하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져!"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가버림)



나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그는 어떤 회사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직 후 첫 두 달 정도까지는 회사의 좋은 점과 동료들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출퇴근 시간에 항상 웃는 얼굴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즐겁게 다녔다. 그리고 꼭 석 달쯤 되면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어깨가 축 처져서 도살장 끌려가는 소 모양을 했다. 나는 그가 안쓰러워 더 잘 챙겨 먹이고 힘내라고 응원도 해보았지만 일단 그런 모드가 되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오직 퇴사만이 답인 듯 틈만 나면 그만둘 궁리를 했고, 어느 날 건수를 잡으면 바로 저질렀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두 달 뒤에야 내게 말했다. 어떻게 그걸 이제 알려주냐고 물으면 '네가 화낼까 봐 싸우기 싫어서 그랬어' 라거나 '그때 네가 중요한 일 앞두고 있어서 타이밍을 놓쳤어'라는 식으로 나를 생각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걱정하시니까 친정과 시댁 어른들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말해야 할 경우에는 '퇴사 후 이직'이 아니라 '스카우트'라고 포장했다.


사실을 알면서도 남편 기를 죽이는 일이 될까 싶어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더 좋은 회사로 스카우트되었다는 전남편의 설명에 부모님이 '우리 사위 최고!' 하며 칭찬실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화장실 가는 척 자리를 피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그 거짓말에 동조해 내 부모를 속인 공범이 되고 말았다.


그는 거짓말에 능했다. 어제 한 말도 불리하다고 느끼는 순간 바로 무슨 소리냐며 말을 바꿨다.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네가 요즘 이상해진 것 같다. 어디 안 좋은 것 아니냐. 병원에 가봐라......' 듣다 보면 내가 정말 잘못 기억하고 있나 헷갈리기 시작했고, 나 스스로 자신 없어하는 낌새를 보이면 그는 더 강하고 확신에 찬 눈빛과 목소리로 본인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내가 예민하거나 헷갈려서 오해한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그런 식으로 혼란을 주어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나는 이혼소송 기간 중 혼자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너는 결정장애가 있으니 내가 골라줄게" 

"너는 이런 거 잘 못하잖아"

"맘카페 들어가지 마. 그 사람들 다 미친 것 같아"

"그 친구 만나지 마. 좀 이상해"


이혼 소송 과정에서는 심지어 우리 엄마까지 그렇게 몰아갔다. 


"네가 얼마나 착한지 내가 아는데...... 

지금 장모님이 이혼하라 그러는 거지? 내가 시골 촌놈이라서? 

정신 차려, 제발...... 너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때 '조종'이라는 단어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전남편은 자신이 손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던 내가 이혼을 요구하며 더 이상 자기 말을 안 듣자 다른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그동안 나를 조종해 왔다고 시인한 꼴이었다. 그의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다. 오직 나를 가지려는 소유욕과 지배욕으로 사탕 발린 말들을 쏟아냈다는 잔인한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에게 나는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예쁜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을 떠나세요. 최대한 빨리. 


소중한 친구나 연인, 배우자를 잃는 게 두렵다고요?

이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중요한 관계는 없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용기 내길 바라요. 


모든 사람은 존재 자체로 귀해요. 

부디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 상대에게 사랑과 배려를 기대하지 마세요. 

본디 그럴 수 없는 사람일 확률이 높아요. 


그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살 수 있습니다. 

소중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당신 자신'뿐이랍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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