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시시한 곳에서 살았다. 오래전 폐쇄된 방직공장이 흉물처럼 서있고, 그 주변을 낮고 허름한 집이 둘러싸고 있는 그런 동네였다. 방직공장이 한창인 시절에는 사람도 물건도 많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활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곳의 어른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눠졌다. 기회를 찾아 신도시로 향하는 사람들, 생업을 유지하며 재개발이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변화에 둔감했던 우리 집은 후자였고, 나는 친구들이 떠난 골목을 혼자 지키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동네에도 한 가지 자랑거리는 있었다. 바로 프로 야구장이다. 지역 야구팀(타이거즈)이 연속해서 우승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예의 바르게 응원하다 어느 순간 만취해 상대 팀을 야유하고 안전그물 위로 이물질을 던져댔는데, 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불량한 기운이 채워지며 악당이 된듯한 기분이랄까? 그리고 야간 경기가 열리면 전조등이 켜졌는데, 그 빛이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곤 했다. 나는 경기장 밖에서 조명을 바라보며 선수들의 플레이를 상상했다. 힘차게 배트를 휘두른 후 쏜살같이 달리는 타자를, 만루 위기를 삼진으로 끝내는 마무리 투수를 떠올리며 혼자 설레었다. 가끔 야구장에 가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를 보며, 나도 언젠가 꼭 야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자 상상보다 숫자가 중요해졌다. 교실 벽에 붙어있는 등수를 올리는 것, 그것 만이 목표가 되었다. 나는 경기장을 지나면서도 전조등을 보지 못했고, 관중의 함성과 흥분한 캐스터 목소리는 소음이 되었다. 우리 집 상황도 변해서 결국 재개발을 포기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야구장은 점점 작아졌다. 처음 이사했을 땐, 야구장 불빛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고층건물이 들어서며 빛은 사라졌고, 그때부터 야구장은 나와 동떨어진 세계가 되었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나는 혼자 야구장을 찾았다. 어린 시절처럼 3층 좌석에 앉아 그라운드를 바라봤지만 모든 게 시시했다. 경기도, 선수도, 더 밝아진 조명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나는 세 시간 넘게 경기는 보지 않고 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직장, 여자 친구, 유학 등 과거의 일과 앞으로 다가올 일들 그리고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을 떠올렸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야구장에서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건 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 이후 고민이 있을 때마다 야구장에 갔다. 경기는 중요치 않았기에 선수들도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습기가 가득한 8월의 밤, 구원 등판한 투수였다. 그날 타이거즈는 1회에 대량 실점하며 깔끔하게 게임을 포기했다. 그 투수는 2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7회까지 던졌는데 말 그대로 패전처리였다. 경기장 중심에 서서 공을 뿌렸지만 누구도 그를 보지 않았다. 거기다 난타까지 당해 게임 시간은 끝없이 길어지고, 그의 팔이 흔들리는 것이 3층에서도 보일만큼 지쳐있었다.
“왜, 바꾸지 않는 거야? 이건 너무 지루하잖아.”
“프로야구는 콜드 게임이 없는 게 문제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맥주를 마셨는데 갑자기 그가 나처럼 느껴졌다. “내가 저 투수라면 어떤 마음일까? 나도 무의미한 공을 세상에 던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그 선수를 끝까지 바라보다, 그가 마운드에서 내려오자 경기장을 떠났다.
나는 집에 도착해 샤워를 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자, 그 속에서 패전투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릴 때 기대했던 관심받는 삶을 살지 못하고 조연이 돼버린 내가 보였다. 뭐가 문제였을까?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었는데.. 이제 나는 지쳐서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공을 던져야 하나? 9회 말 역전을 기대하며 버텨야 하나? 나는 봤다. 수 없이 많은 패전 투수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걸. 나도 그들을 뒤따를까 두렵고, 불행이 예정된 세상에 헛된 노력을 하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공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적을 원하는 게 아니라, 나는 던져야만 하는 투수니까, 내게 주어진 게임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다시 마운드 위에 올랐다. 로진백을 손에 묻히고 공을 글러브에 숨긴 뒤, 마지막 공을 포수를 향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