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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Nov 16. 2022

조연의 꿈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들

특별한 삶을 원한 건 아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연이 되고 싶었다. 극적인 반전도 배신도 없는 일상을 살며 세상 한구석에 자리 잡고 싶었다. 그러다 누군가 나를 발견하면 사랑에 빠져 평범한 가족을 이루는 거지. 아이는 딱 명. 한강을 15분 내로 걸을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사서 매달 100만 원의 이자를 내고, 보행기에 아이를 태워 유유히 한강을 거니는 모습. 나의 이상향이다.

시작은 괜찮았다. 나는 한 번의 실패 없이 대기업에 합격했다.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고 거의 나간 적 없는 학교에서도 본받을 선배라고 치켜세웠다. 예쁜 여자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공무원 학원으로 향할 때, 걱정 없이 그녀와 놀았다. 우리에겐 데이트 루틴이 있었다. 식사하고 학교 호수를 한 바퀴 돈 뒤 배스킨라빈스에서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다. 그리고 DVD 방에서 조심스레 섹스를 한다. 영화 볼륨을 올리고 옷을 입은 채 여러 번 한다. 방에서 빠져나오면 몸 곳곳에 민트향이 퍼졌고 우린 간격을 두고 걸었다. 평화로운 날, 이 시간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사회는 전혀 달랐다. 회사에는 똑똑한 동기들이 많았는데, 상사들은 회의록 작성, 프레젠테이션, 술 마시기 등 행동 하나하나를 비교하고 질책했다. 그때마다 나는 위축돼서 알몸으로 흔들 다리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장감에 신입사원 결과 발표를 망쳐버렸을 때, 성격까지 좋은 동기 녀석이 다가와 날 위로해줬다. 순간, 욕먹는 것보다 더한 열패감이 들며 눈물이 쏟아졌다. 비참했다. 다 큰 남자가 눈물이라니. 나는 회의실에 혼자 남아 발표 자료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곳을 떠나야겠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GMAT(Graduate Management Admission Test) 공부를 시작했다. 토플 단어를 외우고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수학 문제를 풀었다. 당시 유행했던 MBA 열풍에 동참했다. 중국이 세계 최강이 된다는 다큐를 보고 북경대와 푸단대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에는 기초 중국어를 배우고 짬을 내 상해에도 다녀왔다. 한류로 인해 중국 람은 친절했고 내게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이런 환영은 처음이라, 중국이 새로운 기회의 땅, 신천지(新天地)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가슴 설레며 더욱 준비에 매진했다. 5개월 후 무교동에 있는 피어슨 센터를 예약하고 연차를 썼다.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고 시험 중간에 먹을 초코바를 구매했다. 드디어 시험 준비가 끝났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고 나는 수험생에서 보호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성인용 기저귀 채우는 법을 익혔다. 그의 비틀어진 허리 때문에 갈아 끼는 게 갑절로 힘들었다. 그가 두 번의 수술을 끝내고 휠체어에 앉혀 집에 왔을 때 추억을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리조트를 예약하고 대형 봉고차를 빌렸다. 맨 뒷 좌석에 이불을 깔고 그를 눕혔다. 숙소로 향하는 길, 그는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켜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혼자 말했다. "여기는 계란 장사할 때 왔던 곳인데", "저 산에 매실나무를 심어 팔았는데" 등을 중얼거리며 버틸 수 있을 만큼 앉아 있었다. 그에게는 생소한 리조트보다 젊은 시절 기억이 더 소중해 보였다.

그는 결국 사라졌다. 이제 곧 남은 흔적도 지워질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한때 소중하게 생각했던 연인, 나의 노력, 그리고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안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 날 가득 채우고, 거품처럼 흩어져버린 모든 것들. 그 경험을 통해 내 삶은 이상향에 가까워졌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난 시간이 무의미한 건 아니라고 믿는 나의 마음이 있다는 것뿐. 누군가 행복은 삼 년 늦게 찾아온다고 말했는데, 나도 시간이 더 흘러야 거품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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