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서 9
타당하다는 게 뭘까?
상담 공부를 하다 보면 내담자의 감정을 '타당화' 해주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평상시에 잘 쓰지 않는 표현이기도 하고, 미국에서 건너온 학술 용어를 번역하다 보니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타당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일의 이치로 보아 옳다.
더 난해하고 어려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타당하다는 말의 정의는 감정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학술적인 토론을 하거나 일할 때 합리적인 선택(적은 투자로 가장 큰 이윤을 얻는 선택)을 따질 때나 말의 논리성이 설득력 있을 때와 더 어울린다.
법정에서 누구의 주장이 타당한지 재판을 해가며 오랜 시간 싸우지만, 감정의 타당화는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당신이 지금 느낀 그 감정, 어떤 일이었든, 어떤 연유였든, 그 감정이 드는 게 당연하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고, 그것은 내 입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구나. 알아차리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심리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도 감정의 타당화이다. 어떤 사람이 와도, 그가 어떤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상담사는 내담자의 감정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이 잘못해서 혼났는데 왜 서운함을 느껴요?'라거나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너무 신나 있는 것 같아요.'라는 식으로 말할 순 없는 것이다.
"근데 다른 사람한테 이 감정을 표현하면 오히려 화내고 인정해주지 않을 수 있잖아요?"
나는 그런 생각 때문에 내 감정을 부정한 시간이 길었다. 나는 서운하고 속상하면 타인이 그것을 공감해 주길 바랐지만 공감해주지 않았으니 나도 내 감정을 무시하고 공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지옥이라서 누군가의 속상함을 보고 화를 내고, 누군가는 누구누구 속상함이 더 대단한가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때로는 냉랭함으로 어쩌겠느냐며 더 참고 견디라는 방식으로 감정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 잘못일까? 그 사람들의 감정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내 감정이 타당하니까. 누군가는 타인의 감정을 부정하며 자신의 감정을 요구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달라 요구하고 부정당하는 관계 속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타당화해주지 않는다. 내 감정이 생겨난 맥락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첫째로서 늘 첫 번째로 누렸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살아온 사람과 막내로서 늘 기댈 곳이 있지만 우선이 되지 못해 서운한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더 서로를 이해해 줄 순 없는 것처럼.
첫째인 사람은 첫째로서 드는 다양한 감정들을 인정하고, 막내인 사람은 막내로서 드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인정한다. 우리가 서로 느꼈던 감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누구의 감정이 더 타당하며 누구의 감정만 공감하기로 대결할 것인가 펼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라고 알려주고, '나는 몰랐는데 너는 이런 감정을 느꼈구나.'라는 것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각자가 어떤 점을 배려하며 살아갈 지에 대해, 사람 vs 사람이 아닌 사람 vs 문제의 입장에서 해결책을 상상하는 것이다.
"내 감정을 다 느껴주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무 감정적으로 구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죠?"
엄청난 충동이 속에서 끓고 있는데 눌러뒀던 뚜껑을 열면 펑하고 터져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은 감각과 같아서 참을수록 신경 쓰이면 쓰였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 알아차리고 인정하면 빠르게 사라진다. 어떤 부분에서 무감각하게 만들어놨던 부분이 말랑말랑해져서 더 잘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럴 땐 자리를 피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호흡을 하거나 스스로에게 따뜻한 말을 하는 것도 좋다.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 맑은 날 부는 기분 좋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들이 된다.
내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울 때는 감정카드를 구매하는 것도 좋다. 다양한 감정의 정의를 들여다보며 당시 내 마음이 어떤 감정에 가까웠는지 알아볼 수 있다. 내가 그때 이런 감정을 느꼈구나. 하며 타당화해주고,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보인 감정은 이런 것이었을까. 하며 상대의 감정을 타당화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