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냉장고 정리하기 / 20대,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서 8
"나이가 좀 많네요."
심리상담을 신청하기 위해 상담심리사 선생님과 처음 통화했던 날, 그 말을 잊지 못한다.
대학교를 막 졸업한 시점의 나이가 스물여섯. 재수를 하고 일 년을 휴학했으니 졸업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어졌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 테지만, 나는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서른을 앞둔 지금 보면 왜 그렇게까지 속상해했나 싶다. 스물여섯은 객관적으로도 참 젊다. 그런데도 나는 한참 전부터 '나이'에 쫓겨 살았다. 열아홉에도, 스무 살에도, 스물여섯 일 때도 그랬다. 같은 또래의 성과와 비교하면 나는 늘 부족하고, 늦고, 서툴다고 느꼈다. 나이는 내게 영원히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 같은 것이었다.
"나이만 먹고 해낸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위 나잇값을 못한다고.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쫓기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나잇값 좀 하라.'는 말을 수시로 듣는 줄 알았다.
코로나 때문에 대학교 졸업식이 취소가 된 적이 있었다. 해낸 게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래도 4년 다닌 졸업식에서 축하라도 받으면서 위안을 삼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학사모도 쓰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해서 엉엉 울었다. 당시엔 자존감이 낮고 우울했던 터라 그 사건이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속상해서 울고 있으니 엄마가 고레고레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나잇값 좀 해라. 그 나이 먹고 졸업식 취소 됐다고 울어야 되겠냐?"
"우리 집에선 그런 이야기 한 번도 안 해봤어."라고 친구들이 말해줬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나이로 부모님이 눈치 준 적도 없다고 했다. 그 표현 자체가 너무 낯설어서 어떤 함의가 담겨있는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넌 이미 어른스럽고 늘 나이에 비해 성숙했는데 무슨 나잇값을 못 한다는 거야..."
다음 회기 상담에 가서 이 일화를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내게 '나이'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나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엄마는 나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걸까. 중요한 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그 입버릇을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사고라는 건 참 희한하다. 내 생각이지만, 사실 내 생각이 아니다. 마치 원산지가 따로 있는 채소들처럼. 우리 집 냉장고에 있지만 내가 키워낸 건 아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것들이다. 내가 하는 건 그 재료들을 내 맘대로 지지고 볶아서 요리로 탄생시키는 것. 그 재료들이 모여서 '나의' 요리가 된다.
'사람은 나잇값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은 내게 어른스러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수치심을 주었다. 엄마가 비언어적으로 전달한 "나잇값"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고, 때로 다른 사람을 깔보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엄마 또한 그랬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엄마에게 전달해 줬을 것이고, 엄마는 그것을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손쉽게 -불편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 적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처럼 어른스럽지만 때론 부끄러움을 느끼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표현한 '나이'에 대한 생각에 동의하고 싶나요?"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잘 모르겠을 땐, 그 말을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을 보면 된다고 했다. 내가 울고불고 속상해했다는 사실은, 어떤 기준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는 건, 본디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억지로 그냥 받아 든 물건이자 내 식습관과 체질에 맞지 않는 재료였다.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잇값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나는 서러울 땐 그냥 울고 싶고, 그 서러움을 공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그 생각은 나의 것이 아니니 버리면 된단다. 이건 내 인생에 가져가지 않기로. 그냥 바닥에 내려놓으면 된다고. 그 관념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나의 '심장'이나 '뇌' 같은 게 아니었구나. 담담히 깨달았다.
그날부터 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고, 내 마음의 천진난만함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한때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철없다 생각했던 어른들이 불편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나이 먹고 그래서 되겠느냐며 혀를 차는 어른들이 때로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엄격하게 조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안쓰럽기도 했다. 누군가는 나를 한심하게 보겠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주눅 들기도 하지만, 그 시선은 그 사람의 것이고, 나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싶지 않다고 알아차리니 마음이 든든했다.
얼마나 많은 기준들이 세대를 거쳐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저장되어 있을까. 그 기준들로 타인을 쉽게 비난하고 또 자신을 비난하고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찾고 싶다면, 때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짙은 향수가 마음에 떠오른다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분간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생각이 아니며, 어떤 생각은 나에게서 흘러온 것이 아니다.
그 이후 비로소 '나다움'을 깨닫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