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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하 Dec 22. 2021

마냐나, 마냐나

창문 너머로 만년설이 보였다. 밑에서부터 계절이 바뀌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버스로 이렇게 높은 곳을 하염없이 올라갈 줄은 몰랐다. 머리가 띵하고 귀가 먹먹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버스가 갑자기 멈추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검문소였다. 드디어 내가 바라던 이 도장 한 개를 찍는다. 칠레에 3개월짜리 관광 비자를 위해 선택된 아르헨티나 맨도사 여행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3일이면 산티아고로 돌아갈 줄 알았던 평범한 시작이었다. 

 페루로 여행을 가려던 나를 여러 사람들이 말렸다. 그 당시 남미에 배낭으로 여행 다니려는 동양 여자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 남미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으니 스페인어가 잘 되어야지 다닐 수 있었다. 치안이 좋지 않고 사기꾼 많은 곳에 나를 보낼 수는 없으니 우선 경험상 치안 좋고 볼거리 많고 문명적으로 선진국에 가까운 아르헨티나를 시험적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버스로 7시간 거리에 아르헨티나 맨도사는 관광도시이고 칠레 사람들도 신혼여행으로 많이 갈 정도로 좋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게다가 환율이 좋은 시절이었기에 칠레에서 하루에 쓸 돈이면 아르헨티나에서 일주일을 공주처럼 살 수 있다는 말에 더욱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3일 후 티켓부터 구매하고 제일 좋다는 5성급 호텔에 숙소 하나를 구했다. 제일 유명하다던 식당에 정찬도 예약했다. 가벼운 여행이었기에 산마르틴 광장을 걸어 다니면서 거리 음악을 들었다. 거리 곳곳에 있는 전시품들과 노점상들의 아기자기한 장식품들 구경만으로도 하루는 금방 지나가버렸다. 

 이렇게 빈둥빈둥 지내버린 시간이 지나가고 숙소 카지노에서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숙소 앞 맛난 핫도그 하나 사서 먹으며 갔던 버스터미널에서 결차라는 소식을 들었다. 

안데스 산맥이 큰 눈으로 막혔으니 내일 다시 오라는 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5성급 호텔에서 그 옆 3성급 호텔로 옮겨 하루를 늘어지게 보냈다. 옷도 한 벌 밖에 없었기에 호텔리어에게 부탁해서 세탁해 입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터미널부터 부지런히 가보았다. 결차. 이번에는 내일 버스를 탈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애매한 말로 버벅거리던 버스회사 직원은 원래 안데스 산맥이 막히면 버스가 다니는데 오랜 시간 걸리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빨리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면 비행기가 다니니 괜찮다고 했다. 그럼 3일만 더 있으면 비행기가 아니라 버스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머릿속이 한데 엉겨 복잡했다. 남은 돈은 정말 버스비와 2일 치 숙소비와 식비 정도뿐이었다. 우선 급한 데로 ATM부터 찾았다. 혹시 비행기표를 살 수 있을까 싶어서 돈부터 뽑아야 했다. 아니 여기는 눈이 많이 왔는데 왜 통신장애가 이리 심한지 국제 ATM은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비행기는 탈 수 없고 그럼 버스로 가야 한다는 것이면 혹시 모를 결 차에 대비해 최대한 비용을 아껴야 했다. 급한 마음에 관광센터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친절하게도 침대 한 칸 빌려주는 도미토리를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맛나지만 싼 음식들을 소개해주었다. 앗? 내가 먹었던 그 핫도그를 소개해주셨네. 이거 맛나니깐 다행이었다. 

 도미토리에는 내 나이 또래 아르헨티나 청년들과 유대인과 독일 배낭 여행자들이 가득했다. 이 사람들도 나처럼 칠레로 가려는 것일까? 그들은 단순히 남미 전역을 쓸고 다니고 있는 배낭여행자들이었다. 모두들 동양 여자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짐도 없이 여행을 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서투른 나를 무엇을 할지 몰랐었다. 잠시 웃고는 침대로 돌아가 한참을 누워있었다. 막막했다. 이렇게 있다가 어디도 가지 못하고 거리에 나앉아버리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기 시작했었다. 

 무언가를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 모든 것이 낯선 곳, 이런 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말도 안 통하는 친구들에게 어떤 정보라도 얻어야 했다. 떠듬떠듬 말하는 나의 말을 친근히 들어주었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칠레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다며 걱정했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차 마테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차 마시는 문화는 독특했는데 한 잔의 차를 한 개의 빨대를 꽂아 돌려가며 친구들과 마셨다. 이 자리에 나를 끼워주더니 장난이 시작되었다. 내 앞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도 이 차를 마셔보라면서 침을 잔뜩 묻혀서 차의 빨대를 건네주었다. 사색이 된 나의 얼굴을 보면서 마구마구 웃던 그들은 그 나라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마냐나 마냐나’라며 (내일 내일) 나를 위로했다. 

 그 위로에도 버스는 계속 움직이지 않았고 급기야 비행기 운행도 멈추었다. 나의 하루는 어쩔 수 없이 도미토리에서 터미널로 그리고 핫도그 집으로 이어지는 장거리 산책으로 바뀌었다. 너무나 예쁘고 멋져 보이던 산마르틴 광장도 이제는 새롭게 보였다. 

왜 산마르틴 장군은 안데스 산맥을 말을 타고 넘을 생각을 해서 군인들을 괴롭힌 것일까? 정말 말을 타고 넘어서 칠레 정복을 했으니 위대한 장군이긴 하지만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내가 점점 거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하루 핫도그 한 개를 다 먹지 못했고 세탁하지 못한 옷을 입었으며 국제 전화 카드 한 장과 버스 티켓 한 장, 5일 치 도미토리에 낼 돈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을 때 도미토리에서 우연히 뉴스를 보게 되었다. 칠레 북쪽에 큰 지진이 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버스 전복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그 도로가 모두 페루로 통하는 길이었다는 것은 독일 배낭여행자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 날짜가 절묘하게도 내가 여행 가려고 했던 날짜와 비슷하였고 내가 페루로 갔다면 나는 지진 속에 갇혔을 운명이었다. 

 내가 겪고 있던 그 어려움은 가장 최소한의 어려움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손이 나를 보호한 것이었다. 그저 눈으로 끊어진 길을 원망하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칠레가 아무리 지진이 많다고는 하지만 너무 큰 지진이었고 많은 사상자가 있었다. 나중에 안 소식이지만 어지간한 지진에 끄떡도 안 하는 칠레인들이 너무 치를 떨었던 지진이고 버스에서 난 사상자도 많았다고 했었다. 

 갑자기 모든 일들이 너무나 작게 보였다. 분명 이 어려움도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무언의 격려를 받게 되었다. 조금씩 생각이라는 게 되었다. 그저 하루를 버티기보다는 무언가 해야 했다. 

 사실 칠레로 가게 된 것 자체가 이상했다. 잘하고 있던 일도 그만두고 무언가 나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루어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모험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에게 닥친 것은 이 여행의 목적에 너무 어울리는 일이었다.

 20대 중반 내 나이 정도의 친구들이 어학연수를 가거나 견문을 쌓으려고 다니던 것과는 다른 시작이었다. ‘무엇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창조주는 누구인가?’란 의문을 풀고 싶어 떠났던 여러 여행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여행이었다. 설계한 대로 신이 아니고서는 나를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나를 밀어붙였고 마침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지 모르는 신의 도우심에 대한 기도와 간절하게 듣고 싶던 엄마의 목소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시골교회 장로님의 간절한 부탁을 기억나게 해 주셨다. 긴 칠레 여행을 위해 인사드렸던 자리에서 친구분이 아르헨티나에 거주하고 계시는데 한국 사람을 너무 만나고 싶어 하고 그리워한다며 꼭 가서 만나보라고 하셨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거리상 나는 절대 찾아뵐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뤄두었는데 엄마는 그 상황에 그걸 기억하시고 말씀하셨다. 

 얼결에 전혀 안면도 없는 시골교회 장로님의 친구분과 연락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제2의 도시 로사리오 외곽에 살고 계신 아저씨는 나를 그분의 집으로 초대하셨다. 국제거지가 된 상태로 옷도 없이 돈도 없이 버스표 하나 간신히 끊어서 그저 말만 듣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로사리오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가장 편안히 어떤 걱정도 없이 깊은 잠을 잤다.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마냐나, 마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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