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거리두기의 그 사이를 찾아서
나는 한동안 예술가의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중에게 읽히지 않아도, 사유의 깊이만 지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믿음이 진짜 사유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였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많이 읽히는 글은 얕고, 실험적인 글은 외면받는다는 생각은 편리했지만, 편리함이 사유의 적임을 이제는 안다.
즉시성 속에서도 깊이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대중의 언어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대중적 언어는 단순하지 않다. 일상에서 쌓인 경험, 감정의 문법, 공통의 기억이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을 피상적이라 판단했지만, 사실은 그 단순함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깊이는 무엇일까. 나는 깊이를 시간의 문제로 이해했다. 천천히 읽히고, 오래 남는 것. 하지만 깊이는 시간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구조가 중요하다. 하나의 문장이 여러 의미를 동시에 작동시키고, 하나의 개념이 스스로를 의심할 때 깊이가 생긴다. 난해함은 독자를 배제하지만, 깊이는 독자를 사유 속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그 차이를 혼동하고, 난해함을 깊이로 오해한 적이 있었다.
예술의 고립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낭만주의 이후 예술은 고립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산업화와 시장의 압력 속에서 생겨난 구조적 결과다. 난해함은 저항이자 전략이었고, 나는 이를 고결함으로 미화했다. 예술가의 고독은 순수함의 증거가 아니라, 구조가 만든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구조 속에서 선택은 여전히 가능하다. 고립을 미화하지 않되, 회피하지 않는 것. 고립은 사유의 조건일 수 있지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고독 속에서 글을 쓰되, 고독을 위해 쓰지 않는다.
독자와의 관계도 반성할 점이 많다. 나는 공감보다 사유를 중시한다고 했지만, 공감이 사유의 출발점임을 간과했다.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그 감정이 형성된 구조를 묻고,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야 사유가 된다. 나는 독자의 감정을 묻지 않고, 사고만 가정했다. 공감 없는 사유는 결국 자기만의 공간에 머문다.
예술가의 숙명은 모순 속에서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숙명과 선택은 다르다. 숙명은 조건이고, 선택은 의지다. 구조 속에서 느리고 난해한 글을 쓰는 것은 선택이며, 그 선택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나는 고독 자체를 위해 쓰지 않고, 고독을 통해 도달하려는 사유를 추구한다. 그 사유는 결국 타인에게 닿아야 한다.
결국 내가 쓰는 글은 대중성과 사유, 애매함과 명료함, 공감과 거리두기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시도다. 나는 여전히 고독 속에서 글을 쓰지만, 그 고독을 미화하지 않는다. 사유의 깊이는 홀로 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타인에게 닿으려는 움직임 속에서 생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전제를 의심하고, 언어를 점검하며, 목적을 재설정한다. 사유를 예술로 삼는다는 것은, 전제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이 해체는 끝나지 않는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깊이는 구조의 문제, 공감은 사유의 출발점, 타인에게 닿으려는 시도가 사유의 조건이라는 전제를 새로 만들고 있다. 이전보다 투명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전제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나의 태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