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지사 발령과 계획에 없던 미혼모 임신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던 브런치에 돌아오게 된 이유는 인생에 대박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닌 두 개나...
1. 미국지사 발령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작년에 미국 회사와 흡수통합(Combination이라고 하던)이 된 이후로 수 많은 구조조정을 거치게 되었다. 미국 모회사와 독일 자회사의 주력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당장 다수의 인원의 업무가 겹쳐 짐을 싸야 한다든가 하는 일은 아니지만, 회사 문화가 점점 미국식으로 바뀌어가고 회사 조직도 모회사의 구조를 따라가며 독일 자회사의 주력분야를 미국 모회사에 옮기는 일이 시작되어 구조조정 및 인사이동이 큰 스케일로 시작되었다.
나는 독일에 10년 이상 살면서, 독일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중소도시의 협소함에 크게 질려있는 상황이었기도 하고, 2년 전에 새로 임명된 독일인 팀장과도 업무적으로나 스타일적으로나 맞지가 않아서 최근 1~2년간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내심이 바닥나고 인성에 문제가 생겨 결국은 퇴사하겠다고 HR이다 그룹장이다 다 찔러서 개지랄을 하며 실제로 이직 준비도 했었는데, 직장인 MBA를 병행하며 이직준비를 하는 것 또한 녹록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 인도인 그룹장이 "네가 일을 잘 하는 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를 보내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큰 손실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구조조정이 많으니 곧 여러 기회가 올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운을 떼기에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일하며 때를 기다린 결과, 미국지사로 (아직 자회사 헤드 오피스는 독일인 상태)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다.
말이 나온 것은 작년 11월. 가장 빠르고 현실적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곳은 미국이라고 하였고, 협의를 통해 싱가폴/한국 등도 자리를 마련해볼 수는 있다고 했지만 그룹장 말 하는 눈치가 미국으로 가줬으면, 하고 강하게 바라는 눈치였고, 예로부터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미국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사회주의의 끝판왕 독일에서 10년을 버텼으면 이제는 자본주의의 본고장 미국으로 가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알겠다고 했다. 알지 못하면 퇴사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게 구두로 협의가 되고 HR 프로세스를 통해 내부 잡 디스크립션이 나오고, 형식에 맞춰 지원을 하고, 조건 협상을 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길게 걸렸다) 중간중간 미국 매니저가 될 브라질 사람과 캐치업도 하고, 그룹장이랑도 캐치업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드디어 얼마 전 오퍼레터를 받았다.
이제 모빌리티 팀이나 리로케이션 팀에서 이사 관련이나 비자 프로세스 등을 시작하게 된다. L1 비자로 들어가게 되고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면 미국 이동 말 나온 후 부터 이동이 완료되기까지 근 1년이 걸리는 셈이다. 성질 급한 나는 이런 거 못 참아... 하지만 미국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으므로 겨우 참았고, 아직 직장인 MBA도 병행하고 있는 중이며 8월 최종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을 마지막으로 졸업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타이밍이 잘 맞았다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2. 계획에 없던 미혼모 임신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세상 일이 이렇게 간단할리가 없었다. 얼마 전, 생리주기가 되었는데도 생리가 없어서 며칠 간은 스트레스 때문에 며칠 밀리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다가 예정일에서 5일이나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뒤통수가 쎄해지면서 임신 테스트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밤이었기 때문에 드럭스토어나 약국들은 문을 다 닫은 상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 첫 소변을 참고 7시에 여는 드럭스토어로 출동해 테스트기를 한 다발 사왔다. 집에 와서 종이컵에 소변을 받고 테스트기를 담궜다 빼서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일반 테스트기 시약지의 임신확인선이 점점 선명해지는 와중에 깜빡깜빡 하던 디지털 얼리테스트에서 플러스 표시가 딱 하고 뜨는 순간
하는 생각만이 머리 속을 채웠다.
수요 없는 TMI겠지만, 거의 수절하다시피 살아오다가 최근 유일하게 한 번 사고를 친적이 있었기 때문에 뭐 생각의 회로를 따를 것도 없이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자명했고, 바로 아이 아빠에게 연락을 했다. 다른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꽤 시간이 지나 연락이 왔고, 어째저째 연락을 한 결론은 남자는 중절을 원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계획하지 않았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 남자의 아이를 어찌 낳아서 키우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독일의 중절 시스템을 찾아보았는데
-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임신 확인을 받고
- 정부 공인 상담기관에서 원치않은 임신에 대한 상담을 받으면
- 임신 14주차 이내까지는 중절 전문 클리닉에서 합법적으로 약이나 수술을 통한 중절이 가능하다
그래서 회사에 급히 병가를 내고 내가 다니던 산부인과에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운전대를 쥔 손이 덜덜 떨려서 이러다가 어디에 갖다 박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 눈을 부릅뜨고 겨우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클리닉이 휴가 중이라 (그렇다, 독일은 병원도 휴가가 있다) 사흘 후에 다시 열린다는 공지사항과 함께 급한 경우에는 대타 산부인과에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남겨 놓아서, 그 대타 클리닉에 전화를 해보니 리셉셔니스트가 기존에 다니던 병원에서 임신 확인을 받는 것이 좋겠다며, 원치 않은 임신일 경우 다니던 클리닉이 열 때까지 미리 공인 상담기관에 연락해서 상담부터 받아놓으라는 안내를 해주었다.
상담 핫라인에 연락을 하여 내 상황을 이야기하니 갈등상담(Konfliktsberatung)을 받아야 한다며 집 근처 상담소를 추천해주셨고, 바로 연락하니 당일 상담이 가능한 슬롯 하나가 남아 있어서 예약을 하고 상담을 진행하였다. 상담사분은 과하지 않게 친절하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 없이 나의 상황을 내가 이야기하게 유도하고, 나의 마음이나 생각은 어떤지 잘 이끌어내주는 매우 좋은 상담사분이셨다. 특히 인상깊었던 점은, 내가 상황 상 중절이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완전히 결정한 것은 아닌데 아이 아빠는 중절을 원해서 더욱 갈등이 된다고 말을 하자, 이건 당신의 몸과 건강이고 당신의 인생이기 때문에 당신 외의 어느 다른 누구도 결정하지 못한다. 당신을 최우선으로 두고 선택하라,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구도 당신의 선택에 반발하거나 도전할 수 없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주셨고, 이 말이 내가 며칠 동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상담 센터에서 확인증을 받고 클리닉 업무가 다시 재개하는 날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가 진료를 받았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꽤나 기다렸지만 곧 차례가 왔고, 의사에게 임신테스트를 했더니 양성이 나와서 확인을 받으러 왔다고 하니 초음파를 봐주셨다. 이리저리 초음파 초점을 돌리다가 뭔가 작고 동그란 부분에서 멈추더니 "당신의 홈 테스트가 맞아요, 당신은 임신입니다"라고 아주 중립적인 톤으로 나의 임신을 확정해주었다. 이 또한 흥미로웠던 것이, "축하합니다! 엄마가 되셨네요!" 이런 식의 호들갑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임신이 원한 것인지 원치 않은 것인지, 계획한 것인지 아닌지 등에 따라 누구나 속사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또 앞서 말했듯 독일은 초기 중절이 합법이라 산모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뉴트럴하게 진단 결과만 사실적으로 전달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그냥 정말 아무 의도 없는 업무적 태도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아무렇지않아 하는 태도가 오히려 나를 더 차분하고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1초 생각한 후 바로 진료대에 올려진 내 양 다리가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인생에서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진지한 생각이나 계획은 전혀 해본적이 없었지만, 초음파로 처음 아기집의 모습을 확인하고, 다음 진료에서 심장소리를 들은 순간, 당연히 임신을 유지하고 낳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12주차에 진행될 NIPT 테스트에서 기형이나 장애 확률이 높게 나온다면 중절을 결정하게 될 것 같다. 싱글맘은 자신있지만 싱글맘+장애아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막 8주차를 지난 극초기이기 때문에 사실 자연유산 확률도 아직은 없지 않은 상태라 회사에는 알리지 않았고, 미국행 오퍼와 거의 동시에 내 앞에 펼쳐진 일이기 때문에 미국팀에 임신 사실을 전한다면 내 미국행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미 이런저런 검색을 통해 내가 갈 회사가 있는 주법 상 잡 인터뷰 때 임신 여부나 임신 계획을 묻는 것은 불법이다 등 법적으로는 내가 불리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알지만 또 업무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고, 또 미국 회사에 새로 계약을 하는 입장이다보니 산후휴가나 육아휴직 등도 고려해야 하고, 또 이 한 몸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예정대로 미국에 가게된다면 임신한 몸으로 가게 될텐데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다음 주에 독일팀 팀장에게 미국행 오퍼를 받은 사실은 미리 알리고, 독일팀 미국팀 모두에게 12주차가 지나 NIPT 테스트를 무사통과하면 그 때 임신사실을 알릴 예정이다.
지금까지 싱글로서 독일에 세금만 실컷 내고 받는 것은 없어서 열받아왔었는데, 인증기관 갈등상담소 운영이나 퀄리티, 산부인과의 입덧약 무료 처방, 무료 채혈 검진 등에 매우 놀라고 있는 상태이고, NIPT 테스트도 건강보험으로 커버가 된다고 들어서 세상에 내 세금과 의료보험료가 다 여기에 들어가고 있었군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래 내 아기 건강해라 이제까지 낸 세금 보험료 나도 좀 누려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아기가 잘못되지 않고 잘 자라나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미국행과 무사 임신 출산, 한 번에 두 마리 토끼 잡기 과연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