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마크 Jan 31. 2023

공포의 집들이

Ep3

이사를 하고 어느 정도 짐 정리가 끝나자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했다.

'우리 집에 놀러 와.'라고 하기엔 뭔가 궁색해 괜히 '우리 방에 놀러 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코딱지만 한 집에 왜 자꾸 사람을 들이냐는 가족의 핀잔에도 집들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취를 결심하며 마음속으로 품어온 나만의 로망이랄까.


맞다. 사실 이런 건 죄다 핑계일 뿐.

내가 바랬던 건 집들이를 구실 삼아 들어오는 친구들의 선물 보따리.

마침 우리 집에 화장지가 다 떨어졌다.


첫 손님은 시나리오 멘토링 활동을 하며 알게 된 리즈(인권 보호를 위한 가명이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럽고 똑 부러지며 어마무시한 능력을 지닌 22세기형 인재다.

그녀의 집은 내가 이사한 곳과 같은 동네.


게스트, 날짜, 동선, 나의 컨디션, 날씨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가 그녀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집들이 당일.

그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무려 24 롤이나 패키징 된 화장지를 선물로 들고 왔다.

인생사 기브 앤드 테이크. 고로 오는 법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 그녀의 센스 넘치는 선물을 받았으니 이제 보답할 차례다. 오늘의 게스트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을 음식을 대접하리라!


꼼꼼한 사전 조사 결과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파스타. 나는 게스트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냄비에 물을 발발발 끓이기 시작했고 행여 양이 모자랄까 싶어 3인분의 파스타를 만들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3인분의 파스타면을 끓여서일까?

살다 살다 면이 떡이 져 있는 건 또 처음 봤다.

아니 이건 면이 아니라 떡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이 내 손에서 탄생한 거다.

퉁퉁 불은 면은 도저히 소스와 섞일 틈이 보이지 않았고 무마해 보려 소스 한 통을 죄다 집어넣어 봤지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맛이 없었다.

이건 단순히 음식이 '맛이 없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무(= 無, 없을 무) 맛. 즉, '맛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급히 냉장고에서 파김치와 양파 절임, 무말랭이 같은 갖가지 반찬들을 꺼내줬다.

심성 고운 리즈는 “파김치가 정말 맛있네요.”, “양파가 정말 맛있네요.” 라며 먹어줬지만 그녀의 입에서 파스타가 맛있다는 말을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난 방금 전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다. 그녀를 위한 다음 코스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얼마 전 큰언니에게서 받은 파파야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또 왜 이렇게 딱딱한지 칼질을 할 때마다 접이식 테이블이 지진이 일어난 것 마냥 달달달 흔들렸고 보다 못한 리즈가 양손으로 테이블 양 끝을 부여잡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파파야를 써는 내내 과일을 써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며 몇 번이나 내 손가락을 썰 뻔 한 위기를 넘겼다.

드디어 주황빛 속살을 드러낸 파파야. 이제 정말 맛있게 먹을 일만 남았다.


“어…?”

파파야를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은 우리는 거의 동시에 짧은 탄식을 내질렀다.

내 평생 과일이라곤 그냥 있으면 까서 먹는 그것이었지, 후숙을 해서 먹어야 한다고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후숙이 채 되지 않은 파파야는 이러다가 턱뼈가 나가는 건 아닌가 심히 염려스러울 정도의 강직도였고 과일이 아니라 타이어를 씹는 기분을 느꼈다.


날 보는 리즈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섬광처럼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녀는 핫초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스타벅스표 핫초코 가루가 있다!

우유에 타서 섞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 역시 없다.  

핫초코를 타주겠다며 호기롭게 냉장고 문을 연 나는 무설탕 아몬드 우유 밖에 없다는 사실에 순간 아차했지만 맛에 큰 차이가 있으려나 싶어 핫초코 가루를 듬뿍 넣은 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어...?"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왜 그날 먹은 핫초코에서 따뜻한 쓰레기 냄새가 났는지.

핫초코 가루 사이에 들어있던 마시멜로우는 탄력을 잃은 채 괴기스럽게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


그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이토록 멀리 왔을까.

리즈는 연거푸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괜찮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나는 급히 냉동실에서 동그랑땡을 꺼낸 뒤 에어 프라이기에 돌렸다.

완성된 동그랑땡은 해동을 하지 않은 채 돌려 표면이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곰팡이가 내려앉은 듯한 비주얼의 동그랑땡을 내려다보며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직감했다.

보통은 해동을 시키거나 계란물을 입혀서 프라이팬에 부쳐 먹지 그렇게는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난 그날 알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그것도 세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네 번이나 저지르고 나니 이쯤 되면 고의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심히 염려스러웠다.

리즈가 나를 가학적 성향의 사이코패스라 생각한대도 반박할 수 없다.


“아니에요 언니. 정말 맛있었어요.”

연신 미안하다는 내게 리즈가 따뜻함을 보여줬다.

역시... 따뜻한 사람... 리즈...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좀 풀 우리 집을 나서는 그녀에게 용기 내어 말했다.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녀는 특유의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답했다.

"다음엔 밖에서 만나요."

역시.. 많이 힘들었구나...



이 자리를 빌려 그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고 싶다.


"리즈야. 우리 다음엔 꼭 배달 음식 시켜 먹자."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셋 겨울, 고려장을 당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