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연대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는다면 2002년 월드컵이다. 하필 영국에 있었고 잉글랜드는 예선에서 탈락한 터라 흥분을 나눌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2006년에는 중국에 있었는데 술집에서 큰 소리를 내봤자 좋을 게 없어 조용히 지나갔다.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 공동의 이해를 갖고 누군가를 위해 나설 때, 반대로 누군가 나를 위해 나선다고 할 때의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하지 못했다.
고작 영화를 통해 간접 체험한 것이 전부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을 위해 책상 위로 올라가 존경과 지지를 표한다.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가 퇴학 위기에 놓인 학생을 위해 펼친 변론은 지금 들어도 찡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이 관공서 담에 낙서하는 장면에서는 길 건너 응원하는 무리 중의 한 명이고 싶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 연대의 힘을 뚜렷이 보여준 영화를 꼽으면 2014년 작 <런던 프라이드>다.
영국 대처 정부의 광산 폐쇄 결정에 맞서 석탄 노조가 힘겨운 싸움을 하던 1984년, 한 동성애 단체가 광부들을 돕겠다고 나선다. 우리도 소외받는 처지에 어떻게 남을 돕냐는 내부 반발이 있고, 웨일스의 노조원들 역시 당황해한다. 처음부터 환영하는 사람, 떨떠름하면서도 도움은 필요하다는 사람, 인정할 수 없으니 지원도 필요 없다는 사람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밝고 경쾌하게 그렸다. 이 모든 것이 실화로 1985년 영국 노동당은 동성애 차별 철폐를 정식 당론으로 채택하게 된다.
서울은 연대할 대상을 꼽아봤다. '캣맘을 아내로 두어 소외받는 남편들의 모임(캣소남), 방청소를 하지 않는 딸 때문에 환장하는 아빠들의 모임(방딸모)이 전부다. 정모를 열면 서로 푸념을 늘어놓거나 누가 더 불쌍한지를 놓고 경쟁할 것 같다. 좀 더 큰 대의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모이고 지지할 만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주위에 관심을 갖고 소외되는 것을 살펴야 하는데 서울이 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퇴직 후에 생계 걱정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