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수용(自己受容, self-acceptance)이라는 말은 수많은 심리 관련 분야에서는 단연코 단골 주제이다. 또한 상담을 할 때 성공적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이는 자기를 수용하는 데 이르지 않고서는 어떠한 변화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용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인지했으나 선명하게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 안되면 그저 '옳은 말'에 그치고 만다. 먼저 수용이라는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수용이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바람직하든 바람직하지 않든, 장점이든 약점이든, 잠재력이 있든 없든 가진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다'는 뜻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수용은 회피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느낌이 들면 느낌이 드는 그대로로, 생각이 들면 생각이 드는 그대로, 행동할 때면 행동하는 행동 그대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내 느낌이 아닌 것처럼, 내 생각이 아닌 것처럼 내가 한 행동이 내가 하지 않은 것처럼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에 나 자체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끔은 내가 했던 생각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 미움이 생기거나,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감과 죄책감을 부인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실망감이든 죄책감이든 그 무엇이든지 내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한 수용은 필요하다. 자기 수용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행동에 있어서 숨기려 하지 않는 태도와 같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읽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불편감, 두려움, 고통, 불안함이 찾아와도 그것을 내 경험으로 인정하고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합리화를 통해 보기 좋게 포장하지 않으며 변명하지 않는다.
자기 수용은 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자기 수용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존감이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자존감에 대한 단어 안에는 '평가'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자존감이 높거나 낮다는 말을 할 때는 그 사람을 향한 평가적 의미에서 한 말이기도 하다. 자존감과 자기 수용의 연관성은 있으나 자기 수용은 자존감처럼 평가적인 의미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자기 수용을 위해 무엇을 쟁취할 필요도 없고 좋은 결과를 얻어내야 하는 조건도 없다. 그저 있는 그래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수용은 자기 자신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도 없다. 자기 수용은 언제든, 어디서나 가능하다.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자기 수용이 되어야만 변화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평가 중심의 삶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어린 아기였을 때는 아기인 모습 자체로 사랑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랑스럽게 굴어야 사랑받고 사랑받을 행동을 해야 사랑을 받는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주변을 의식하는 삶에 익숙해진다. '내가 이렇게 해야만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 주는구나'하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다른 사람이 제시한 조건에 맞추기 위한 삶이 시작된다. 다행히 그 조건에 맞출 수 있을 때는 안심이 되지만 그 조건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삶의 만족도는 떨어진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낙인찍고 평가한다. 다른 사람이 내 삶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자신이 행동하는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자처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진행 중이라면 '멈춤'을 선언해야 한다.
자기 수용을 위한 과정 중 긍정적인 부분 외에 부정적인 부분의 수용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생각, 잘못한 행동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들에 대한 부분 또한 수용해야 할 일부분이다. 그러한 부분들 또한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가 했던 이러저러한 생각, 내가 했던 이러저러한 행동, 이 모든 것들은 내가 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한 것이 맞다', '내가 그때는 그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그랬다'라고 인정하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과거의 올무에 걸려 있던 자신이 자유롭게 되는 경험을 한다.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게 된다.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태도야 말로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주범이다.
자기 수용을 위해서는 자신을 향한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잘못인걸 알면서도 내가 왜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까
그때는 내가 왜 몰랐을까.
그땐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향한 호기심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관심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사실만으로는 자신에 대한 이해의 근거로는 부족하다. 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 행동의 근원적인 동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을 수용하기 위한 호기심 어린 질문을 통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다.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려는 욕구만으로 '나'의 모든 것들을 알 수는 없다.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행동들에 있어서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자신에게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르니 좀 알려줄래?'라는 탐색 질문을 해보도록 하자. 차단된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아는 척 넘어간 부분은 어디인지 발견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나에 대한 새로운 관계 방식이 탄생한다. 이러한 탄생을 기점으로 나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방식 또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탐색 질문을 스스로 해봄으로써 자신에 대한 이해는 깊어지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감각을 찾을 수 있다.
자기 수용을 위해서는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너 왜 그랬어, 안 그런다고 했으면서 왜 또 그랬어'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안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다시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그 이유가 뭐야?'라며 공감 어린 대화가 필요하다. 비난을 통해 자신의 행동이 바로잡아진다면 얼마든지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비난을 통해서는 올바른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해주고 싶을 때는 잠시 숨 고르기를 한 후 마음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상처로 얻어진 자기 수용은 없다. 진정한 자기 수용은 자신을 향한 존중 어린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바라봄에 있어서 대립하는 시선이 있다면 자기 수용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적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데 어떻게 서로 아군이 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때 거절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야 한다. 거절하고 싶은 부분을 제대로 의식하고, 똑바로 바라보며 '모난 부분도 나의 일부분이구나'라고 안아주자. 그래야 내 안의 나는 통합될 수 있다. '나의 좋은 모습, 나의 좋지 않은 모습'이 자신의 모습임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때 자기 수용은 가능하다.
자기 수용은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 경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고 오래되어 낡은 신념이나 행동 패턴을 교정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어떤지, 기대하는 대로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패턴들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에 대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다. 자기 수용은 관심이다. 나를 향한 진솔한 관심이다. 내가 경험하는 것, 그 경험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좋은지, 싫은지에 대해 스스로 묻고 자각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전체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경험이다. 자신을 향한 관심은 늘 옳다. 타인의 대한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향한 관심은 더더욱 옳다. 자신을 향한 진솔한 관심을 통해 자기 수용의 흐름에 올라타자.
p.s 바탕화면 사진은 옥잠화(玉簪花)라는 뿌리식물입니다. 꽃봉오리가 마치 옥비녀(玉簪)처럼 생겨 옥잠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제가 지켜본 바로는 8월 초가 되면 15일-18일 정도 피고 사라지는데요. 눈이 오고 녹는 이 날씨에 새순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저로서는 화단도 없고, 식물 키우는 재주도 없어서 저희 동 출입구 작은 공간에 심겨 있는 옥잠화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새순이 꽃이 되려면 6개월이 남았습니다. 지난 몇 번의 눈이 쌓일 때도 새순이 있었는데 눈이 녹은 다음에도 보니 새순이 그대로 있더군요. 생명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때가 되면 싹 띄울 준비를 하고 때가 되면 꽃대를 올리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지요. 진한 향기와 아름다움을 주던 꽃도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지고 말지만 군말 없이 꽃잎을 떨어뜨리며 씨앗을 남깁니다. 그러고 나서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보내고 없는 듯이 웅크리고 있다가 다시 봄이 되면 생명으로 존재했음을 알리더군요. 사람도 자연입니다. 힘들기만 할 것 같은 시간도 버티다 보면 지나고 즐겁기만 할 것 같던 시간도 어느새 지나가버립니다. 내게로 오려는 삶이 어떤 모양일지, 어떤 빛깔일지, 어떤 내음 일지 알 수는 없으나 그저 받아들이고 할 수만 있다면 즐기고 감사하면서 내가 선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8월이 되면 제가 분주해집니다. 오며 가며 옥잠화 꽃내음을 맡느라 고개를 박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날이 많지요. 옥잠화 꽃은 특히 밤이 되면 활짝 피고 아침이면 봉우리가 닫히거든요. 며칠 후면 사라져 버릴 꽃이기에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욕심을 부리는 모습입니다. 경비아저씨가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그 꽃이 이쁘냐"라고 묻더군요. 저는 민망해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옥잠화는 알겠지요. 제가 얼마나 자기를 기다리고 아껴주고 예뻐하는지를요. 올여름을 기다리다 보면 몇 개월이 훌쩍 가겠지만 그 시간 동안 저도 저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