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성 베네딕도의 규칙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서원에 대해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 생애 그리고 죽어서도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여야 하는 정주성,
하느님과 수도원을 이끄는 아빠스(수도원장)의 말을 따르겠다는 순명,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기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청빈,
그리고 가정을 갖지 않겠다는 정결입니다.
이 네 가지 서원은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의 자발적인 선택이지 강요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베네딕도 수도원의 설립 이후 몇 백 년 안에 많은 다른 수도원이 유럽 안에 생겼고, 수도원 주위로 마을, 병원, 학교 등이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였습니다.
베네딕도 수도원의 확장은 프랑크 왕국의 등장과 관련이 아주 많습니다.
754년 랭스 대성당에서 스테파노 2세 교황에게 세례와 함께 성유로 축성받은 키 작은 피핀 (Pipino III il Breve, 714-768) 왕은 교황에게 롱고바르디(1)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땅을 주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카를로(2) (742-814)는 왕좌를 이어받은 후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롱고바르디 족을 몰아내고 아버지 피핀이 약속한 로마와 주변의 땅을 교황에게 봉헌하고 로마 교회를 지키는 군대이자 보호자가 되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여기에 더해 기원후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 (재위 795-816)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라는 신성 로마 제국 (Sacrum Imperium Romanum)의 칭호와 황제의 관을 받으며 ‘위대한 카를로 (Carlo Magno)’라 불리게 되었고, 이것은 교회와 더욱 깊숙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교황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군대라는 힘을 얻었고 카를로는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자라는 정통성을 주님의 대리자인 교황의 축성과 인준으로 얻게 되었던 거죠.
다행히도 카를로 황제에게는 정치적 욕망만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카를로 황제는 로마 교회의 첫 번째 가치인 복음화를 위해 자기가 정복한 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수 있도록 힘썼고,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쓰거나 읽지 못했던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합당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글쓰기에 대한 통일된 서체인 카를로 소문자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Times New Roman이라는 서체로 내려와 사용하고 있고, 여러 부호 중에 물음표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물음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문장 끝에 라틴어의 ‘질문’ (queastio)이라는 의미의 약자인 'qo'라고 썼는데 이 글자는 종종 다른 의미로 혼동을 주어 행정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이민족들이 섞이면서 늘어난 사투리 대신 라틴어 사용을 권장하였고, 이를 위해 요크의 알퀴노 수사 등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여 궁중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흩어져 있던 성서 사본을 수집하여 만든 알퀴노의 성서가 만들어졌고, 로마 전례를 기본으로 한 통일된 전례를 만들어 제국 내에 사제들이 사용하게 하면서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는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제국 내에 모든 수도원은 베네딕도 성인이 만든 수도 규칙을 따르도록 하였고, 대학의 커리큘럼처럼 방법론적으로 신학적 연구를 통일시키기 위해 성경 읽기, 고대 철학자와 교부들에 대해 공부하기와 교양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논리학, 수사학, 문법을 궁중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업을 위한 라틴어 서적의 필사본들을 수도원을 통해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수도원을 보면 스크립토리움 (Scriptorium)이라는 필사실과 이 책들을 보관할 수 있는 도서관을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고, 이 일은 노동을 중요시 여겼던 수도승들에게 영성수련을 위한 중요한 사도직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크게 주로 나누고, 주 밑에는 구를 두어 주는 백작이 구는 봉건 제도를 통한 영주와 주교나 수도원장이 사법권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네딕도 수도원들은 황제의 보호와 제도 아래서 수적으로 크게 성장을 하였지만, 황제의 권력 아래에 있는 소유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노동을 중요시 여겼던 베네딕도 수도승들은 황제로부터 돈과 땅을 봉토로 받으면서 노동의 중요성은 떨어졌고, 결과적으로 수도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주성 또한 사라져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원래 고유의 수도 생활은 뒷전이 되고 황제의 일을 맡아보는 일꾼으로 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편에 설명하는 파르파의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성 안티모 수도원은 초창기 베네딕도 수도원이 세속의 권력인 황제와 영적 권력인 교회 사이에서 수도원의 고유한 본성과 독립성을 어떻게 유지하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롱고바르디 (1) :
게르만 민족의 한 부족으로 568년부터 774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이탈리아 땅 안에서 롱고바르디 왕국을 이루며 살았다.
카를로 (2) :
독일어로는 카를(Carl: Karl)이지만 프랑스어로는 샤를르(Charles)이며, 영어로는 찰스(Charles)이고 이탈리아어로는 카를로(Carl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