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향한 로마네스크의 상징성 Ⅰ

성 안티모 수도원 | 중세 수도원 이야기

by Roma Vianney


성 안티모 대수도원의 간단한 역사


성 안티모 (Antimo) 대수도원은 이탈리아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없는 프랑스 건축의 영향을 받아 제대 뒤편을 둘러쌓고 있는 복도식 회랑과 그 회랑에서 확장된 세 개의 소성당을 볼 수 있는 독특한 토스카나 지방의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입니다.


먼저 안티모 성인에 대해서는 두 명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거의 전설에 가깝지만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 시절에 감옥에 갇혀 있던 안티모 사제입니다. 이 사람은 황제 갈리에노 (Gallieno, 253-268)의 조카이자 리치니아 (Licinia)의 남편인 피니아누스 (Pinianus)를 병에서 고쳐주고 그리스도교로 회개를 시켰다고 합니다. 회개한 피니아누스는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을 도와주거나 이탈리아 북쪽에서 로마로 들어오는 살라리아 (Salaria) 가도에 있던 자기의 빌라에 숨겨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안티모는 이교도 사제였던 실바노 (Silvano)와 함께 그의 가족들 모두를 그리스도교로 회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로마 신전에 제사를 바치지도 않고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안티모는 목에 무거운 돌을 메고 로마의 테베레 강에 던져졌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305년 5월 11일 참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신은 신앙고백을 하였던 살라리아 가도 주변 성당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드리아노 1세 교황은 781년에 순례자로 로마에 내려온 카를로 황제에게 성 안티모와 성 세바스티아노의 유해 일부를 주었다고 하고 황제는 그를 기념하여 안티모 수도원 옆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성당을 봉헌하였습니다.


또 다른 안티모 성인은 362년에 순교한 아레쪼의 주교 도나토 성인의 순교록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아레쪼의 주교가 미사를 드릴 때 두 명의 부제가 함께하였는데 그중에 한 명이 안티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티모가 유리잔에 담긴 성혈 (예수님의 피로 성변화된 포도주)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동안 몇 명의 이교도인들이 들어와 잔을 던지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잔의 한쪽이 깨졌지만 성혈은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으며 안티모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성혈을 영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이교도인들은 회개를 하고 어떤 이교도인들은 도나토 주교와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교 인들을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안티모도 역시 미사를 드릴 때 미사 경본이나 제구를 옮기며 도왔다는 이유로 줄리아노 황제 시절에 종종 있었던 박해 때에 현재 수도원 성당이 있는 언덕 위에서 순교하고 묻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그의 무덤 위에 성 안티모를 기념한 소성당을 봉헌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레쪼의 안티모 보다 더욱 유명하고 공경을 받았던 동명이인인 로마의 안티모 성인의 유해 일부가 이곳에 모셔지면서 함께 성인 공경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실은 카를로 황제의 기적 이야기로 좀 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티모 수도원 근처의 지도

안티모 성인의 유해가 묻혀있는 이 위치는 중세 롬바르디아 왕국 시절에 만들어 놓은 프랑스에서 로마로 내려가는 길인 프란치제나 (Francigena)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며, 농사나 목축을 하기 위한 물이 풍부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길로 순례자뿐만 아니라 군인이나 상인들이 많이 지나다녔고, 그 당시 수도원의 역할 중에 하나가 순례자나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대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숙소나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인의 경당 옆에 770년경 근처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회의 타오 (Tao) 원장에 의해서 수도원 부속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식당과 숙소 (Forestia) 건물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카를로 황제와 카를로의 풀 (Bald's Leechbook, British Library)

이 수도원의 발전도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 황제 때부터 시작됩니다. 781년 프랑크 족의 왕이었던 카를로는 순례자로 로마로 내려가 아드리아노 1세 교황에게 로마의 안티모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유해 일부를 받아 프란치제나 길을 통해 돌아가던 중 자신의 군대 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를로 왕은 자기의 병사들이 완치되길 바라며 기도를 하였고, 그때 한 천사가 나타나 산 위에 올라가 활을 쏘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활이 떨어진 자리에 있는 풀을 다려 병사들에게 먹이면 전염병에서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기적은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이 풀에 황제의 이름을 붙여 ‘카를로 풀’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로마에서 모시고 온 성 안티모와 세바스티아노의 이름으로 성당을 봉헌하였고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사용을 하면서 안티모 수도원으로 호칭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의방으로 되어 있는 ‘카를로 소성당’입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복합적인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813년으로, 카를로의 적자였던 신심 많은 루도비코가 이곳을 ‘황제의 수도원’으로 명하여 많은 특혜와 보호를 해주었고 이러한 안티모 수도원의 특혜는 1051년 하인리히 3세 황제, 1105년 하인리히 4세 황제의 문서에 재천명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

수도원 성당 후진 회랑으로 가면 12세기에 그려진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프레스코화를 아직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 함께 있는 분은 안티모 성인의 프레스코화가 아닌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의 모습입니다. 안티모 성인의 프레스코화 없이 세바스티아노의 것만 있다는 것은 수도원은 안티모 성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기 때문에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모습만 그려 넣음으로써 이 수도원이 두 성인에게 모두 봉헌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네딕도의 규칙대로 수도 생활을 하였던 분이고 교황으로 선출이 되어 최초로 베네딕도의 전기를 쓰신 분입니다.





몬탈치노 (Montalcino)

이 당시 수도원장은 황제의 고문으로써 백작의 직분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 재산의 소유 지역과 사법권은 시에나와 피렌체 그리고 피스토이아 (Pistoia)까지 토스카나 지방 대부분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장은 몬탈치노를 행정 도시로 소유하면서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 궁까지 따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권력과 부에 걸맞은 새로운 성당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11세기부터 등장한 개혁 수도원인 시토회, 카말돌리회 그리고 발롬브로사회(1)로 부자들의 기증이 몰리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베르나르도 백작의 재산 기증이 적힌 내용
20200904_113505697_iOS_(2).jpg 종탑에 남아있는 알라바스트로 대리석

그러던 중 1118년에 아르데게쉬의 베르나르도 백작이 자기의 전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을 하게 됩니다. 아직도 성당 안에는 이때 받은 베르나르도 백작의 기증을 기억하고 증명하는 글이 표지석처럼 제대 앞 계단에 긴 문장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증으로 귀도네 (Guidone) 수도원장은 ‘황제의 수도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성당 외벽이나 기둥들을 어떤 수도원도 사용하지 못했던 값비싼 알라바스트로 (alabastro) 대리석을 사들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당의 모델은 순례자에게 적합화되어 있는 클루니 수도원의 성당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위치적으로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프란치제나 길 근처이고 전염병으로부터 지켜준 카를로의 풀이라는 기적 이야기, 그리고 병자들의 수호성인이라는 안티모 성인 이야기는 많은 순례자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쉽게 성인의 유해가 있는 중앙 제대에 접근하고, 또 가까이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소성당을 만들었던 클루니 수도원의 성당 같은 것이 꼭 필요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이탈리아 건축가뿐만 아니라 프랑스 건축가들도 합류시켜 수도원은 프랑스 비뇨리 (Vignory)에 있던 클루니 수도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지어지게 되었다.



또, 여기서 잠깐~! ^^


성 크리스토포로 (San Cristoforo)

수도원 성당을 들어서자마자 첫 번째 기둥에서 만나는 성인이 크리스토포로입니다. 길 위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분은 순례자들에게는 친구이고 동행자였으며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는 주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이 프레스코화 앞에서 기도하였을까요?


'황금의 책'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크리스토포로는 젊은 거인이었고 세상 최고의 권력자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이나 황제를 만나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탄을 찾아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탄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세상 가장 힘 있는 분은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은수 생활 속에 세례를 준비하며 주님의 봉사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봉사의 마음을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실천하겠다는 생각으로 강 근처로 내려와 강을 건너는 여행자들을 도와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와서 강 건너편까지 데려다줄 것을 청하였고 크리스토포로는 여느 때처럼 아이를 어깨에 메고 물살을 헤치며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강 중심부로 갈수록 그전과는 다르게 물에 깊게 빠지기도 하며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림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크리스토포로 어깨에 짊어진 것은 단지 아이 예수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손에 안고 있는 지구 즉, 세상의 무게도 함께 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크리스토포로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아이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고 아이는 자신이 예수임을 밝히며 크리스토포로가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교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토포로는 세례를 받고 소아시아에 있는 리치아 (Licia)라는 지역에서 예수님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다 250년 경에 순교를 하였습니다.


지도도 여행 정보도 없던 시절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오랜 시간 동안 로마를 향해 걸어가던 순례자들에게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원인도 몰랐던 페스트라는 전염병도 유럽에 번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갑작스럽게 닥치는 죽음 앞에서 마지막 도움을 청한 성인의 이름은 '그리스도를 메고 건너는 자'라는 뜻을 가진 크리스토포로 (Cristoforo)였습니다.





귀도네 수도원장의 예상은 적중하여 100년 가까이 풍요한 시기를 누렸지만 12세기 말부터 지방 도시들이 황제에게 대적할 만큼 힘이 세지기 시작하였고 교황청도 더 이상 수도원에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12세기 중반 급성장을 하고 있던 시에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싶어 하였지만 북쪽은 막강한 피렌체가 있었기 때문에 남쪽으로 땅을 넓히게 됩니다. 결국 1212년 안티모 수도원의 행정 중심 도시였던 몬탈치노를 시에나에 뺏기게 되면서 수도원의 번영도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여 1293년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땅의 5분에 1 정도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이 수도원을 굴리엘모 수도원에 합병해 버려 1462년 까기 굴리엘모 수도자들 안에서 수도원장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 수도원 안에서 두 수도회의 갈등은 매우 깊어지고 되었고 교황청의 중재라는 이름으로 간섭은 계속됐습니다.


피엔자의 두오모 성당

1462년 시에나의 피콜로미니 가문 출신인 비오 2세 교황은 안티모 수도원을 폐지하면서 새로운 교구로 만들어진 피엔자와 몬탈치노에 운영을 맡기게 하였습니다. 비오 2세 교황이 태어난 피엔자 도시의 원래 이름은 코르시냐노 (Corsignano)였는데, 교황은 자기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도시 전체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고 자기의 이름을 붙여 피엔자 (Pienza)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자기의 조카인 치누기 (Cinughi)를 주교로 세우면서 피엔자와 몬탈치노에 속해 있던 안티모 수도원까지 차지하였고 수도원 소유의 모든 것을 교황의 피콜로미니 가문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치누기 주교 이후로 다섯 명의 주교가 모두 이 가문에서 나온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1600년도가 되어서야 몬탈치노는 피엔자에서 독립된 교구로 다시 승격이 되었지만 안티모 수도원은 몬탈치노 교구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면서 1986년까지 교구장 명의로 있게 됩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1870년까지 안티모 수도원은 더 이상 수도자들이 머물지 않는 하나의 건물로 전락하였고, 수도자 대신 소작농들이 거주하면서 주교의 방은 그들의 거처가 되었고, 중앙 제대 밑 크립타는 그들의 창고가 되었으며 수도원 성당 내부는 농작물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그리고 화합의 장소인 수도원 사각 정원은 동물들이 차지하였습니다.


1970년 교황청의 위임을 받은 시에나 대교구에서 1979년에 프랑스 출신의 수도자들에게 이 수도원을 맡겼지만 2015년에 프랑스에서 성소자가 줄면서 결국 이 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2016년도에는 이 근처에 있던 올리베따노 대수도원에 맡겼지만 이것도 1년밖에 가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시에나 대교구에서 관리를 하고 있고 더 이상 수도자가 머물지는 않고 있습니다.




(1) 성 요한 괄베르토 (995-1073)에 의해 창설된 개혁 수도회 중에 하나이다. 클루니 수도회 이후 은수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일치시키려 했었고, 특히 ‘시모니아’로 불리는 성직 매매자들에게 강경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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