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수도원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관계를 먼저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313년 밀라노 관용령 이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온 (Βυζάντιον)이라는 곳으로 옮겼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리스도 교회는 기존에 있던 네 개(1)의 지역 교회에 콘스탄티노플 교회까지 합쳐서 다섯 개의 지역 교회가 생기게 되는데, 이 지역 교회들은 고유의 주교를 가지고 있어 타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행정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황 (Papa)이라는 호칭도 5세기 말에 가서 나 등장을 하고 이때는 모두 주교라는 호칭을 공통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보여주는 것으로써 로마에 있는 칼리스토 카타콤베 안에 3세기 때 교황들의 무덤을 보면 그리스어로 쓰인 주교라는 뜻의 약자ΕΠΙ(σκοπος)로 적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박해가 끝나면서 각 지역 교회 간에 차이가 있던 교리에 대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황제의 소집으로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지금이야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교황에게 있지만 초기 교회 때에는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주교조차도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통치하던 이 시기는 정교분리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중요한 직책 중에 하나가 대제사장 (Pontifex Maximus)(2)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고, 교리에 대한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은 제국의 안전과 치안에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니케아 1차 공의회 (325년)부터 니케아 2차 공의회 (787년)까지 일곱 번 동안 모든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하여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소 또한 황제가 있었던 콘스탄티노플이나 근처 도시에서 열렸고 언어도 그리스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이야기할 때 가장 처음 등장하는 수위권 문제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황제가 거처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반면에 서방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수위권을 물려받은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고 묻혀 있는 로마의 주교가 모든 교회의 대표자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은 이 하나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근 5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일곱 차례에 걸쳐 치러진 이 공의회를 통해 드러난 문화적, 언어적, 교리적, 전례적 그리고 가장 컸었던 정치적인 문제로 동방과 서방 교회는 서로에 대한 이해나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사랑보다는 균열과 오해의 골이 깊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언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교리도 철학 용어에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였고 그들 안에서는 이해하기도 쉬운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절대적인 황제의 권한으로 주변의 종교적 상황을 모두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교도에 대한 다툼이나 선교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의 영향력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안정적인 종교생활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 교회는 유럽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언어도 군사나 행정 그리고 법치주의를 강조한 로마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인들과는 사고방식이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경 (Credo)에 대한 그리스어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완전한 직역이 될 수가 없었고 그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추가적인 단어들이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필리오케 (Filióque)라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없는 말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원래 그리스 원문에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말이 있었으나 라틴어 번역에 이 '필리오케'라는 단어가 추가되면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고’라는 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황제에 의해 종교적인 문제도 잘 통치되었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와는 달리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민족들의 침입과 주변 이교도인에 대한 선교 문제,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예수님의 신성을 더욱 명확히 표현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성부와 성자를 같은 신경안에 넣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아이덴티티와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온다는 말로써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수위권이 로마의 주교들에게 내려오면서 성령의 하느님은 로마 교회를 통해 모든 지역 교회를 이끌고 계시다는 우위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1054년 동서교회가 상호 파문함으로 발생한 교회 분열을 야기한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전례적인 문제로서 이콘에 대한 입장 차이도 분명하였습니다. 사실 우상 논쟁 앞에서 성상이나 성화 모두 다 자유롭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육화의 신비로 인간의 몸을 취하여 형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심으로써 신약시대에는 이 구약의 우상 논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볼 수 있었고, 우상처럼 그 자체를 본질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콘이라는 말 뜻대로 본질적인 것의 비추어진 상(3)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가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동방교회에서는 이콘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였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3세 (재위 717-741)에 의해 공식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같은 시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눈으로 보아야만 믿음을 가졌던 이교도인들에게 이콘은 선교를 위해 중요하였고, 또한 우상과는 다르다고 황제에게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콘에 대해 우호적이어서 탄압을 받고 있는 동방의 수도원들이 서방 교회로의 이주를 허락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콘에 대한 탄압과 다툼은 니케아 2차 공의회 (787년)에서 이콘은 공경의 대상이지 훔숭받는 것이 아니며, 훔숭의 대상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해당된다는 개념의 구분으로서 종식을 시키며 동서방 교회가 이콘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는 듯했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로는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인 자신의 동의 없이 동로마 제국의 이레네 여제가 혼자서 공의회를 소집시켰다는 굴욕감과 반 비잔틴의 감정으로 오히려 성상에 대한 공경을 부정하게 되어 이제는 두 교회가 반대의 상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 라틴어는 공경과 흠숭을 구분해서 쓰는 단어도 없었기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로마 교회는 이콘보다는 조각상에 더 관심을 갖고 전례와 선교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을 하게 됩니다. 이 반비잔틴 감정은 로마의 교황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교회 간에 신학적인 문제보다도 사실 교황의 눈에 가시거리는 콘스탄티노플 뒤에서 로마 교회를 간섭하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지리적으로 비록 멀리 있었지만 제국의 땅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럽에서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탄생한 나라가 프랑크 왕국이었고, 이들은 로마교회의 후견인으로서 이민족인 롱고바르디족을 몰아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영토까지 교황에게 바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로마 교회는 서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잇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카를로 왕에게 씌어주게 되고 로마 교회도 콘스탄티노플 교회처럼 강력한 군대를 후견인으로 두면서 두 교회는 더욱더 날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1054년 쌍방의 파문으로 치닫게 되고 동방교회는 교회의 여러 본성 중 정통성을 강조하여 오르토독스 (Orthodox)라고 불렀고 서방교회는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보편성을 강조하여 가톨릭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두 교회의 다툼은 성직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두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금이 완전히 간 것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을 주도했던 도시는 십자군의 이동을 위해 선박을 제공했던 베네치아였는데, 십자군이 건조된 선박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자 믿음보다는 장사를 통한 실리를 중요시 여겼던 베네치아 인들은 선박 대금을 후불로 미뤄주면서 십자군들을 자신의 이익에 맞춰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도록 만들어 살인과 약탈을 하였고, 심지어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 대신에 라틴제국이라는 나라까지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동방교회 사람들의 서방교회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돌아서서 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800년 동안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4 개의 지역 교회(1) :
예루살렘,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대제사장 Pontifex Maximus(2) :
이 용어는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교황의 공식 호칭에 사용된다. Pontifexs는 '다리는 만들다'라는 뜻을, Maximus는 ‘가장 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를 이어주는 최고의 다리를 만드는 사람이 교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추어진 상(3) :
본질적인 달은 하나이지만 비추어진 상으로써 달은 호수나 우물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 비추어진 상이 바로 이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