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아래층 성당의 문은 사실상 정면이 아닌 앞쪽 측면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아래층 성당이 성인의 유해를 보호하고 외부인들로부터 도굴을 방지하려는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형적으로 평지가 아닌 절벽으로 떨어지는 언덕에 성당을 세웠기 때문에 아래층 정면은 자연스럽게 땅속에 위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1271년 전에 완성된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문은 대성당 입구로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고딕 아치형을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문과 함께 이 두 개의 문을 둘러싸고 있는 또 따른 큰 아치는 비록 두 개의 문이지만 세 개의 문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고딕 양식의 성당 문 위에 들어가는 장미 원화 창도 빼놓지 않고 만듦으로써 아래층 성당도 위층 성당과 같은 독립된 장소임을 다른 한편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창 두 개를 추가함으로써 문처럼 상징적 3이라는 교회 숫자를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큰 창이 창과 두 문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된 부분에는 이 문을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자이크를 볼 수 있습니다.
A 아래층 성당 정문 B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 C 체르키 가문 무덤 D 성가대석 E 브리엔느의 요한 무덤 F 성 안토니오 아빠스 경당 G 공동 무덤 H 성녀 카타리나 경당 I 제의방 J 성 스테파노 경당 K 성 안토니오 경당 L 성녀 막달레나 경당 M 성 마르티노 경당 N 폰타나 경당 O 성 안드래아 경당 P 제의실 Q 마돈나 경당 R 성 니콜라오 경당 S 수도자 기도석과 후진 (최후의 심판 그림) a 중앙제대와 천장화 (b 청빈의 비유 c 정결의 비유 d 순명의 비유 e 프란치스코의 영광) f 치마부에의 마에스타 벽화 g 황혼의 성모 벽화 h 위층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i 프란치스코 무덤 경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처음 아래층 성당이 만들어졌을 때는 좌우에 있는 소성당들이 없는 하나의 중앙 회랑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벽을 부수고 증축해서 소성당을 만들었다는 것을 벽에 있던 그림들이 손상된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성당들은 고위 성직자나 귀족들의 봉헌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불러 소성당 내부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하였습니다. 오른편 세 개의 소성당 그리고 왼편에 두 개의 소성당이 있는데 그중 유명한 것은 1313년에서 1318년 사이에 시모네 마르티니 (Simone Martini)가 그린 투르의 성 마르티노 소성당입니다.
성당 내부는 불빛이 없어 옆에 소성당들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카타콤베나 무덤 속에 들어온 것처럼 무척이나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둠은 빛이 없다가 아니라 빛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덤은 죽음이 아니라 온전한 빛으로 가기 위한 쉼의 장소입니다. 지하 무덤 성당이 만들어지기 전 이곳은 프란치스코의 유해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곳이었고, 성 프란치스코가 부활을 기다리며 쉬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위층 성당을 올라가기 전 부활을 준비하는 예행연습을 하게 됩니다.
시토회 성당이 라틴 십자가 모양의 평면도라고 한다면 이 성당은 프란치스코의 십자가로 불리는 타우 (Tau) 형태 즉, 영어 대문자 알파벳 T 모양의 평면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성인이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타우 (Tau) 십자가는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의 방패였으며 구원의 표시였습니다. 이 표시의 처음 등장은 구약성서에서부터입니다.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파스카의 축제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 직접적인 타우를 언급하지 않지만 문설주와 상인방의 형태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의 문은 그들의 히브리어 알파벳 타우(ת) 모양과 같았고 이 표시는 이집트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 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탈출기 12장 6-7절, 13절)
에제키엘서에서는 예루살렘을 벌할 때 정의로운 사람들을 구하는 표시로써 타우가 처음 직접적으로 언급이 됩니다.
"너희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타우 표를 해놓아라...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그러나 이마에 타우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에제키엘 9장 4절, 5절 b, 6절 b)
이 전통은 신약성서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묵시록에서 이 인장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찍는 표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요한묵시록 7장 2-3절)
타우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 (ת)이며 세상의 마지막 날을 상징하는 예언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오메가(Ω) 또한 요한묵시록에 쓰인 것처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요한묵시록 21장 6절)
라틴어 성서로 번역이 되면서 이 타우는 교회 안에서 알파벳 T로 사용하기 시작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의 모양과도 일치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구원의 표시라는 것으로 확실히 각인이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타우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4차 라테란 공의회가 있던 1215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개회식에서 언급하면서라고 합니다. 교황은 에제키엘서의 타우 표식을 인용하며 자신도 모든 교회를 가난한 옷을 입고 다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인장을 이마에 찍어주길 희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죽음까지 1년도 안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도전에로 초대를 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많은 군중 사이에 프란치스코가 있었고 이 교황의 말씀은 메아리가 되어 프란치스코에게 강한 부름으로 마음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더욱 열정적으로 참회와 회개로 이끄는 설교를 하였고 그 표시로 자신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타우의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식은 사람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서명처럼 자신의 편지와 자신이 머물던 건물 (폰테 콜롬보)에도 새겨 넣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타우는 참회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었고 그리스도의 삶과 승리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타우 십자가는 프란치스코에게 누구보다도 특별하였고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타우는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의 십자가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타우 십자가의 평면도를 가지고 있는 이 성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모든 악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으며 확실한 구원에로 초대받는 구제적인 표징을 온몸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앙 제대 왼편에는 석양의 마돈나 (Madonna dei Tramonti)라는 몬테시에피 은수처에 그림을 그린 암브로시오 로렌체티의 형 피에트로 로렌체티 (Pietro Lorenzitti)가 1310년에서 1319년 사이에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황금색 바탕 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해가 저물며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을 받으면 누부 시도록 아름다워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로렌체티 형제들의 작품을 보면 표정보다는 손짓으로 대화를 이끌어내며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많이 느껴집니다. 이 작품도 그림은 한 장이지만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여주듯 마음속에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을 보면 중앙에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 오른편에 성 프란치스코가, 왼편에는 사도 요한이 서 있습니다. 보통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이 함께 그려지면 성모님은 항상 아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면서 시선을 앞쪽으로 향하게 되지만, 이 그림 속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은 서로를 쳐다보며 뭔가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님이 말이 새어나가면 안 될 것처럼 성모님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묻습니다.
"엄마, 엄마.... 프란치스코와 요한 중 누가 더 이뻐?"
이 질문을 들은 성모님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지고 눈은 좀 더 크게 뜨신 것이 꽤나 난처하신 것 같습니다.
"음... 그걸 내가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니."라고 하시며 들키면 곤란하신 듯 아기 예수님과 자신의 가슴 사이로 천천히 손을 올려 엄지손가락을 펴 프란치스코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무슨 대화를 하시는지 궁금한 듯 머리를 앞으로 쭉 내밀고 있고 성모님의 손가락을 본 순간 기쁨 반 놀라움 반으로 왼쪽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정말로 저를 더 사랑하시는 건가요?"
반면에 이 모든 상황을 깨달은 사도 요한은 한 발짝 뒤로 움직인 듯 이 세람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 듯 접을 듯한 오른손의 제스처만으로도 사도 요한의 실망감이 충분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모님이 누가 더 사랑스러운지를 따져보는 인간적인 질문이 이 그림에서 의도하는 메시지는 아닐 것입니다. 성모님이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는 만큼 그 이상으로 프란치스코가 아기 예수님처럼 얼마나 성모님께 의탁을 하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중앙 제대 오른편에는 조토의 스승 치마부에가 그린 마에스타 (Maesta')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에스타는 스승이라는 의미로 성모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옥좌에 앉아있는 모습에 붙여진 이름이고,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사이에 제단화나 프레스코화로 유행하던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이 그림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땅바닥이나 방석 같은 곳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돈나 델 우밀타 (Madonna dell'Umilta', 겸손하신 마돈나)라는 그림들이 14세기부터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치마부에가 아닌 14세기에 다른 화가가 이곳에 같은 테마로 그림을 그렸다면, 가난하고 겸손한 교회를 상징하는 마돈나 델 우밀타가 그려졌을 것 같고 프란치스코 성당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마에스타는 1285년에서 1288년 사이에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비잔틴 양식의 마지막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치마부에의 제자인 조토로부터 천상의 그림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치마부에의 마에스타는 형식은 비잔틴 양식이나 얼굴의 모습은 이미 실제 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눈은 어느 한 곳이 아닌 모든 곳을 바라본다는 초점이 잡히지 않은 비잔틴 양식의 규칙을 따르고 있지만 엄격한 얼굴이 아닌 따스함과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 아기 예수를 무릎 위에 잘 놓기 위해 한 발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 있고, 그럼으로써 성모의 몸은 정면을 바라보는 경직된 비잔틴 양식이 아니라 몸이 살짝 비틀어진 모습과 머리의 기울기는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성모의 오른손은 아기 예수의 발바닥을 간지럽히듯 지탱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얼굴은 신성이 가득한 얼굴이기보다는 아시시 마을에서 볼 수 있을듯한 인성이 더 강조되어 보이는 곱슬 머리카락과 함께 옆에 서 있는 프란치스코의 아기 때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주변에 있는 네 천사들의 얼굴은 좌우로 서로 다르게 기울어지게 함으로써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 그려진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프레스코화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살아생전의 프란치스코와 가장 닮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마부에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성인이 돌아가시고 60년 정도가 지난 시기이기 때문에 살아생전 성인의 모습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마부에가 그린 프란치스코의 얼굴은 상상 속의 얼굴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었던 프란치스코가 곁에 있는 느낌을 더 강하게 줍니다. 그림 속 성 프란치스코는 맨발로 가난을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작성하여 두 손으로 꼭 잡고 있는 회칙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었고, 프란치스코 자신도 임종하기 2년 전인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받은 예수님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있는 오상의 상처로 자신이 예수님의 고통까지 온전하게 일치하였음을 겸손한 눈으로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치마부에의 마에스타 아래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한 초기 형제들 중 다섯 명이 마에스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벽 속에는 그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덮고 있던 바위처럼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위에 놓인 중앙 제대는 가로 3,80미터 세로 1,80미터의 통으로 된 하나의 대리석입니다. 지하 무덤 경당이 만들어지기 전 제대 아래 성인의 석관을 볼 수 있던 사각형의 구멍이 있고 제대 위로 머리를 들면 배의 삼각돛처럼 생겨 이탈리아 말로 vela (벨라)라는 건축용어를 가진 천장에 그려진 네 장의 그림이 펼쳐집니다. 미술가보다는 미술사학자로 더 알려지며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린 조르조 바사리 (Giorgio Vasari, 1511-1574)는 이 네 장의 프레스코화를 조토의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날 이 그림은 익명의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고 있고 화가의 호칭도 벨레의 마에스트로 (Maestro di Vele, 벨레의 명인)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씀하신 수도 생활의 복음 삼덕인 청빈 (윗편), 정결 (왼편), 순명 (오른편)을 의인화하여 보여주고 있고,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삶으로 보여주신 성인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천상의 고귀한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 (아래편)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앉은 의자 위로 이 그림의 주제인 GLORIOS FRANCISC (프란치스코의 영광)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제대 뒤편으로는 1468년에서 1471년 사이에 리파트란소네의 아폴로니오 페트로키 (Apollonio Petrocchi)와 여러 장인들이 협력해서 만든 수도자들의 나무 기도석 (Coro ligneo)이 반타원형의 건축구조에 맞게 만들어져 있고 그 위 천장에는 체사레 세르메이 (Cesare Sermei) 1623년에 그린 최후의 심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기도석에서 피운 양초의 연기에 훼손된 부분을 2009년 복원 작업을 거치며 예전의 색깔을 많이 찾게 되었습니다. 천상에서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려는 예수님 주변에 프란치스코회와 글라라회 수도자들이 모습이 보이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편 회랑 (익랑)에는 조토의 공방에서 그린 예수님 탄생, 이집트로 피난, 죄 없는 아이들을 죽임 등 예수님 공생활 전의 이야기가 있고, 왼편 회랑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등 14세기 시에나 학파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 끝에 고딕 양식의 창문이 아름다운 마돈나의 경당과 프란치스코 유물이 있는 성 니콜라오 경당이 있습니다.
사진 설명 : 많이 상하였고 수선을 한 프란치스코 성인이 입으셨던 수도복은 언어적 가난이 아닌 물질적 사회적 가난을 사신 프란치스코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 설명 : 1223년 9월 29일 호노리오 3세 교황으로 인준받은 수도회규 진품이고 다른 한 장에 바티칸에 있다.
사진 설명 : 1224년 9월 라메르나 산에서 레오 형제에게 성 프란치스코가 써준 강복장 진품. 강복장 아래에는 성인이 쓰신 타우 십자가를 상징하는 T가 보인다.
사진 설명 : 성광 안에 있는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으신 후 손바닥을 감쌌던 천으로 탁한 핏자국이 중앙에 있다. 아래 십자 모양으로 묶은 돌은 성인이 선종하였을 때 머리에 놓았던 돌베개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은 성인이 사용한 방석이다.
사진 설명 : 오상받은 프란치스코를 위해 글라라가 만든 양모 신발과 그 위에 짙은 고동색 가죽 천은 성인의 오상 중 옆구리에 대었던 것이다. 흰색 수의는 아마도 야고바 부인이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진 설명 : 야고바 부인인 만든 자수 수건 두 장이며 위에 있는 수건은 성 프란치스코 임종 전엔 땀을 닦았던 것이라고 한다. 야고바 부인은 성인에 대한 공경심이 지극하여 유일하게 성인 옆에서 임종을 지킨 부인이고 성 프란치스코는 부인이라는 호칭 대신에 야고바 형제라고 불렀다.
사진 설명 : 이집트에서 술탄 멜렉 엘 카밀을 만났을 때 받는 상아뿔이고, 이것은 성인이 기도하도록 형제들과 신자들을 부를 때 사용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슬람 사람들이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것을 부러워하였고 그들이 종으로 기도 시간을 알린 것처럼 어쩌면 이 상아 뿔 소리로 기도 시간을 알렸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위층 성당을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