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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May 12. 2022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 사람들 속으로

중세 수도원 이야기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아시시 마을 일부 (저 멀리 들판에 보이는 마을은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이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 시절 교황권이 세속권을 누르고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고 있을 때, 교회의 힘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과 나눔 그리고 겸손이라고 몸으로 외치면서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설자인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는 기존에 있었던 베네딕도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회와는 달리 개인 소유뿐만 아니라 건물이나 토지 등 수도회 공동 소유 또한 배격하였고, 그렇다고 시토회처럼 수도회 유지를 위해 농장 운영이나 목장의 노동에 의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제들 간의 사랑과 신자들의 애덕에 의존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청하였기에 탁발 수도회로 불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는 절대적인 믿음이었고 성서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과 나 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프라테 (Frate) 즉, ‘형제’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 앞에 붙여 불렀습니다. 그전까지 '홀로 있다'라는 뜻의 모나코 (monaco, 수도승)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었습니다.


베네딕도회의 생활 중심은 수도원 (monastero)이라는 건물이었고 세상을 포기하고 하느님께만 마음을 두기 위해 마을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를 장소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 식사, 노동, 묵상, 공부 등 모든 것이 수도원 규칙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들을 수도승 (monaco)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새로이 시작된 이 수도회는 세상과 떨어져 고립되어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 세상 안으로 향해 나간 사람들이었고 성서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던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규칙서는 프란치스코가 말한 데로 바로 복음서 자체였습니다.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하였던 이 수도자들은 한 명 한 명이 수도원이었고, 그래서 수도승과 콘베르시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사람 중심주의로써 서로를 ‘형제 (fratelli)’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성당은 사람들이 살던 도시 근처에 세워졌고 건축의 형태도 수도자들만의 기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신자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전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세속의 권한을 두고 교황과 황제가 대립의 시기를 지나 프란치스코가 활동하였던 13세기는 ‘교황은 자체 발광체인 태양, 황제는  태양빛에 의존해서 빛나는 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교황권이 최고의 정점을 찍은 인노첸시오 3 (1198-1216) 교황 시절이었습니다. 교황의 축복 없이는 황제라는 칭호를 받을 수도 없었고, 교황에게 막강한 군대는 없었지만 파문이라는 교회의 최고 무기로 황제마저 살아있는 동안지옥으로 보낼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신다라는 구호 아래 성전이라 불리는 십자군 전쟁이 교황의 지휘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로,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완성될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봉건영주 중심의 장원 경제의 핵심인 농업에서 자치도시라고 불리는 코무네 (Comune) 등장할 정도로 상공업이 도시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지며 사람들은 영주들이나 수도원장들의 예속된 삶에서 벗어나 자기의 능력을  중요시 여기는 자유시민의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615년 스페인 왕 필립 3세의 봉헌금으로 프란치스코의 생가 터에 세워진 성당 (Chiesa Nuova)과 프란치스코의 어머니와 아버지 청동상
사진 설명 :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소성당. 원래 이 소성당은 마구간이었고 프란치스코 어머니 피카 부인이 프란치스코를 낳으려 집에서 산통 중에 있을 때, 한 순례자가 들어와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으려면 집 밖의 마구간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장소를 옮겨 이곳에서 출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출산 이야기는 성인이 선종하시고 난 후 300년이나 지나서야 문서 상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이것은 탄생 장소의 진위를 밝히려 했다기보다는 프란치스코의 삶은 첫 순간부터 예수님을 닮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1182년 아시시에서 태어나 1226년 44세의 나이로 아시시 성 밖의 포르치운꼴라에서 선종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던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포목을 수입하면서 아마도 아들이 프랑스 남자처럼 자라길 원하는 맘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부유한 포목점과 염색 업을 하던 상인 집안에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지내게 되는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했던 페루자와 교황을 지지했던 아시시의 전쟁에 참전하면서부터입니다.


어린 시절 라틴말도 배우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프란치스코였지만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중인이었지 귀족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 신분 상승의 유일한 방법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기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02년 부푼 꿈을 안고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와 함께 전쟁 포로로 갇히는 신세였습니다. 처음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하 감옥 안에서 1년간 갇혀 있던 기간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참담하고 나약한 모습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진 설명 : 노을 지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정면과 노르베르토 프로이에티 (Norberto Proietti, 1927-2009)가 만든 성 프란치스코 청동 기마상. 1202년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여해 죽음과 패배의 비참한 바닥까지 떨어진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삶에 대한 답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행히 아버지의 보석금으로 풀려난 프란치스코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에서 얻은 상처와 후유증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십자군에 참전할 마음으로 아시시 옆 동네였던 스폴레토 (Spoleto)라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첫 번째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프란치스코는 무기가 가득한 건물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은 기사들을 위한 것이라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과 종 중에 누가 더 많은 것을 프란치스코에게 해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며, 왜 진정한 주인을 섬기지 않느냐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프란치스코는 아시시로 돌아와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지만 아직도 정확한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1206년경에 다 허물어져 가던 아시시 성 밖의 다미아노 경당의 십자고상 앞에서 기도를 하던 중 두 번째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 세워라
 

처음에 프란치스코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자기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다미아노 경당을 고치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성당 수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이 작게는 나 자신의 회개, 넓게는 전체 교회의 회개가 필요하다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회개의 행동으로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포목과 돈을 나누어 주었고,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설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아시시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귀도 주교에게 자신의 아들을 고발하였습니다.


포르치운콜라

법정에 선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에게 받을 상속권과 함께 자신의 속옷까지 벗어주면서 “이제부터 하늘에 계신 하느님만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며 세상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따르기 위해 아시시 성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프란치스코와 그를 처음 따랐던 친구이자 형제들은 리보 토르토를 거쳐 포르치운콜라를 거처로 삼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전적인 무소유를 원했던 프란치스코였기에, 1년 사용료로 물고기 한 바구니를 소유주였던 베네딕도 수도원에 주면서 조그만 이 경당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1209년 마티아 사도 축일에 들은 복음 말씀은 프란치스코의 전 수도 생활의 중심을 뚫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복음 9장 2절-3절


여기서 우리는 한 수도회 창립자로서 프란치스코의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 수도회들은 베네딕도 규칙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수도 생활의 방법을 찾아 약간 변형된 수도회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특별한 부름심 (두 번의 꿈)과 신약 성서 안에 예수님 삶의 모습이 규칙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승은 예수님이었고 그 스승의 삶을 닮아 충실히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였고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란치스코에게 '제2의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따라붙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은 프란치스코에게도 적용이 되어 이때부터 형제들을 세상 곳곳으로 파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선포하려면 설교를 하여야 하고 설교는 성직자에게만 부여된 직무였기에 초창기 사제가 없었던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은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위험성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실 그 당시 프란치스코만 엄격한 금욕주의와 가난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풍요함과 교황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교회의 폐단을 비판하였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해서 프란치스코는 1210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찾아가 수도회 인준을 받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 라테란 성전에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접견한 프란치스코는 성서에 기반한 생활양식을 말씀드렸으나, 너무 이상적이다 하여 인준을 받지 못하고 성당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자신의 방에서 잠시 쉬던 중 끔을 꾸게 되고, 그 꿈속에서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라테란 성전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손도 쓰지 못하고 보게 되는데, 바로 그때 거지 프란치스코가 달려와 부서진 기둥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는 모습을 보면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하는 수도회 인준을 구두로 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수도회 역사상 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 개혁 수도회를 포함해서 모든 수도회는 베네딕도나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기반으로 하는 수도회였기 때문에 프란치스코회는 새로운 생활양식의 규칙을 가지고 탄생한 수도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니 사람들에게 빌어 얻어먹을 수 있는 권리도 받게 되어 탁발 수도회라는 새로운 수도회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이름은 그다음 교황인 오노리오 3세로부터 정식으로 인준서를 받으면서 프란치스코가 자기의 공동체에 스스로 명칭 한 ‘프란치스코의 가장 작은 형제회 (Ordine dei frati minori)’라는 이름으로 1223년 탄생하였습니다.


1210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가장 작은 형제회에 대한 구두 인준은 수도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란치스칸이라 불리는 수도자들의 증가였습니다. 형제애를 중요시 여겼던 프란치스코회는 13세기 성행하고 있었던 시토회나 카르투시오회처럼 수도자의 역할이 기도만 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하는 평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서 인준을 받기 전까지는 사제가 없는 일반 평수사들만의 있었고 프란치스코도 사제품을 거절하고 부제품만 받았습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라는 그리스도교적 임무 앞에서 학식 있는 사람들은 프란치스코회에 필연적이었고, 1213년부터 학식 있는 형제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사제 수사들도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설교를 잘 준비하기 위해 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였고 그것을 위해서 유럽에서 최초로 대학이 설립된 볼로냐에 수도원을 짓게 됩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이라는 건물을 지칭하는 콘벤토 (Convento)라는 말을 싫어하였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땅이 필요하고 건물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제약이 당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원래 베네딕도회의 수도원주의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말 대신에 루오고 (luogo), 장소라는 말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세워진 것이 없는 장소는 프란치스코에게 단순함이었고 가난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소는 하느님주의, 사람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장소라면 사람은 미련 없이 그 장소를 버리고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수도자도 한 곳에 정착하고 소유하기 시작하면 본연의 복음 정신보다는 세속의 것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머문 장소들을 보면 수도원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자연 동굴이나 초막을 쳐서 임시로 지낼 수 있는 은수처에 더 가까운 장소들이 더 많았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장소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형제들과 머무는 장소였고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머무는 장소는 도시 밖 가장자리에 주로 생겨났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가난하고 병자들과 함께 살 수 있었으며 도시민들에게 구걸을 하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도하는 장소는 사람들과 떨어져 기도와 묵상 그리고 참회할 수 있는 산속이나 섬, 절벽 등 사막과도 같은 곳을 선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살아 계실 당시에 이미 수천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던 프란치스코회는 성인의 선종 이전부터 프란치스코의 규칙은 너무 금욕적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절대적 가난은 지키기에 너무 힘들며 또 설교를 통한 선교의 생활에도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존의 수도원주의와 금욕주의의 중도를 걸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폰테콜롬보 수도원

결국 성인은 수도회 총 봉사직을 사임하고 1223년 폰테 콜롬보에서 수정된 규칙서를 만들어 호노리우스 3세 교황에게 인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선종 2년 전인 1224년 해발 1200미터 되는 라 베르나 산으로 성 미카엘 대축일을 준비하기 위해 오르게 되었고 이곳에서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오상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것처럼 프란치스코의 형제들도 프란치스코의 예수님을 향한 삶의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올라갔던 이 라 베르나 산은 프란치스코에게는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이었고 오상의 상처는 참 잘 살았다는 예수님의 도장이었으며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에게 세 가지 눈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육안,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심안 그리고 지혜로 보는 혜안입니다. 심안은 인간의 노력 지식을 쌓아 세상을 이해하고 볼 수 있는 눈이지만, 혜안은 인간의 의지로는 될 수 없고 하늘에서 열어주는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신비 (Misterium) 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오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신비에 완전히 동참함으로써 프란치스코가 바라보는 세상은 바로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세상이었고, 그로 인해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사랑의 결과물인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선종 일 년 전 작성한 '창조물의 노래'는 하느님을 온전히 찬미하며 하느님 현존을 증거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Sorella(자매)라고 불렀고 1226년 10월 3일 그 자매와 함께 천상에 올라 하늘나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기존에 있었던 수도 규칙을 기본으로 한 것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고유의 회칙으로 탄생된 수도회다 보니 다른 수도회와는 다르게 창설자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회칙에 대한 이견과 어떤 생활 양식을 따라가야 할지에 대해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가 1210년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구두로 인준을 받은 엄격한 회칙으로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금욕주의의 은수자적 영성을 따르려는 사람들 (Spirituali)이었고, 다른 하나는 1223년 호노리오 교황에게 문서로 인준을 받은 완화된 회칙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설교를 통해 복음 전파라는 사도적인 실천을 따르기 위해 도시 안에 수도원을 세워 지낸 사람들 (Conventuali)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7대 총장이었던 성 보나벤투라 선종 후에는 수도회 내적 분열과 갈등이 더 깊어져 프라티첼리 (fraticelli)라 불리는 수도자들의 이단이 나와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1517년(1) 레오 10세에 의해 꼰벤뚜알리 작은 형제회와 여러 개혁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형제들을 합친 오쎄르반티 작은 형제회로 교회법적으로 나누어져 각 회의 총장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10년 후인 1528년에는 오쎄르반티 작은 형제회에서 좀 더 엄격한 생활을 염원했던 형제들이 카말돌리 수도자들처럼 큰 두건을 쓴다 하여 이름 붙여진 카푸치니 (Cappccini) 수도회가 클레멘스 7세 교황으로부터 인준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은 오쎄르반티 작은 형제회 안에 있었던 여러 분파 (오쎄르반티, 리포르마티, 레콜레티, 스칼찌)을 합쳐 최종적으로 레오 13세 교황 때 ‘작은 형제회 (O.F.M.)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 (O.F.M. Conv.)와 카푸치니 작은 형제회 (O.F.M Cap.)로 되어있습니다. 이 세 개의 남자 수도회가 프란치스코 1회이고 2회는 클라라 여자 수도회 그리고 3회인 프란치스코 재속회가 있습니다.



(1)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비판하며 95개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성당 문에 내 걸은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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