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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May 17. 2022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무덤 경당)

중세 수도원 이야기

푸른 밀밭 넘어 아시시 전경.  왼편에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오른편 글라라 대성당이 아시시를 감싸 안고 있다.
아시시로 들어가는 14세기 프란치스코 성문
프란치스코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란치스코 광장 앞 성문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광장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성인 선종 후 엘리아 수사 (Frate Elia)의 감독하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초창기 건축의 목적은 성인의 유해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보존하기 위한 것과 함께 많은 신자들이 성인을 찾아와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당은 수도회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성당이면서 성인을 기억하기 위해 모든 공간이 봉헌된 영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당이 세워진 이 자리는 원래 죄수들을 처형하던 곳이었습니다. 중세 시절 아시시 서쪽 성 밖으로 한 500미터쯤 떨어진 언덕의 끝자리였고 아래로는 절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리를 지옥의 언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인께서 살아계실 때 이미 이 지옥의 언덕을 자신이 묻힐 자리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도 그 뜻을 전하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 있었던 시토회나 베네딕도회 같은 경우라면 수도원 외부에, 그것도 죄수들을 죽였던 형장에 수도자를 묻는 것도 말이 안 되었지만 창립자를 묻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한 장소에 머물기 싫어했던 프란치스코의 성격으로 봐서는 가능한 일이었고 또한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렸던 프란치스코가 죽은 후에도 예수님을 닮으려고 했다면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찾으셨던 장소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 하는 고성소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죽음의 세계에서 하늘나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도 죽음으로 떨어진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큰 죄를 짓고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언덕은 프란치스코가 묻힘으로써 천국의 언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1226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포르치운콜라에서 선종을 하신 후 그의 시신은 아시시의 동쪽 성 밖에 있던 성 조르조 성당에 모셔지게 됩니다. 이 조르조 성당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이 세워진 곳입니다. 그리고 시성식 다음 날인 1228년 7월 17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이 천국의 언덕에 성당 건축의 초석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22개월이 지난 1230년 5월에는 1층 성당이 완성되면서 성인의 유해를 안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같은 달 25일 성인의 유해는 조르조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중앙 제대 아래 크립타로 유해를 옮겨오게 됩니다. 1236년에는 성당의 지붕이 올려졌고 1239년에는 종탑이 만들어졌습니다. 성당 축성이 된 것은 1253년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의 주례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지하 무덤 성당과 지상 2층으로 된 고딕 양식의 성당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이탈리아 초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으로 프랑스나 독일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당과는 다른 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고딕은 외형적인 것에 치중을 많이 하여 첨탑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과 함께 넓은 스테인드글라스로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비적으로 표현하였다면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내형적인 것에 중심을 더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당의 모습은 웅장하지만 고딕의 복잡함보다는 로마네스크의 단순함을 더 따르고 있습니다. 밖에서 보는 성당은 가난한 사람 즉, 프란치스코의 겉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하느님의 이야기와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로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음으로써 인간의 내부에 있는 영혼의 모습과 하느님의 영적인 부분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1층 성당은 천장이 낮고 빛이 적게 들어옴으로써 죽음을 강조한다면 2층 성당은 높은 천장과 함께 사방에서 들어오는 빛으로써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프란치스코 회보다 앞서 탄생한 시토회의 성당 모습과 비교해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두 수도회 모두 성당 양식으로는 100퍼센트 고딕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혼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보는 두 수도회 성당의 느낌은 비슷합니다. 웅장하지만 장식을 절제하고 있습니다. 두 성당이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내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토회는 수도자들의 마음을 온전하게 하느님께 향하게 하기 위해서 성당 내부에 장식이나 그림을 그리지 못하도록 하였고 수학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한쪽에 기울지 않는 완벽한 비율을 가지고 있는 성당을 만들도록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수도회 성당을 사용하는 대상자는 일반인이 아니라 수도자였습니다. 그들에게 성당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미 성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시토회 수도자들에게 성당 내부에 성서 이야기나 성인 이야기 같은 프레스코화들은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3랑 식의 2열 기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내부에 기둥이 없는 하나의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설교를 하는데 최적화된 성당입니다. 기둥들이 있으면 사제와 신자들 사이를 가리게 되고 마이크도 없던 그 시절엔 더욱이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신자들에게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과 만나 함께 기도하는 장소도 되었지만 프란치스코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학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벽과 천장은 온통 그림으로 가득합니다. 건물이 아니라 성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한 것처럼 프란치스코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설교하려고 했던 프란치스코회의 카리스마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800년 전에는 프란치스코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세상 곳곳을 찾아갔지만 지금은 세상 곳곳에 있는 사람들이 프란치스코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시시로 모여드는 기적이 지금도 매일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하 무덤 경당 (크립타)

지하 무덤 경당. 제대 위 철 격자와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석관이 모셔져 있다.
*사진(좌) : 1239년 선종한 세테솔리의 야고바 부인의 유골함.  1209년경 수도회 인준을 받으러 로마로 내려갔을 때 프란치스코는 로마의 귀부인 야고바를 처음 알게 되었고 이 부인은  프란치스코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 장소가 지금 로마에 있는 리파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임종이 가까움을 느낀 성 프란치스코는 야고바 부인에게 자신의 수의를 만들어달라고 청하였고 임종의 순간에도 유일하게 성 프란치스코 곁을 지킨 여인이었다.  이 수의는 유물 경당에서 볼 수 있다.  
*사진(우) : 1층 성당에 있는 수의를 가지고 오는 야고바 형제의 프레스코화


무덤 경당은 성당 중앙에 있는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당 안에서 성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무덤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지만 무덤 성당이 만들어지는 것은 가장 마지막이었습니다. 중세 시절 순례자들이 성인의 무덤 가까이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성인의 유해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유해가 옮겨졌던 1230년 성인의 유해가 성 조르조 성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지자마자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잠그고 비밀스러운 장소를 선택해 사람들이 모르는 중앙 제대 아래에 견고하게 매장을 하였고 누구도 찾아갈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15세기 때에는 성인의 유해의 존재성에 대해 의심의 말도 돌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성인의 유해의 위치를 정확히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1818년에 와서야 철 격자로 보호된 석관을 발굴하게 되었고 1820년 비오 7세 교황은 매장 이후 처음으로 성인의 시신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1824년에 건축가 파스쿠알 벨리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하 무덤 성당을 만들었으나 전체적으로 대성당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하여 1925년에서 1932년 사이에 우고 타르키에 의해 현재의 무덤 성당이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성인의 무덤 주변 네 모퉁이에는 성인의 초기 동료들로서 안젤로 (+1258), 맛세오 (+1280), 레오 (+1271) 그리고 루피노 (+1270) 형제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성인의 무덤 맞은편 위층 성당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만나는 지점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야고바 형제'라고 불렀던 세테솔리의 야고바 (+1239) 부인의 유해가 들어있는 철제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인의 유해는 1층 성당 중앙 왼편에 프란치스코의 수의를 들고 있는 야고바 부인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곳에 있었는데 1932녀에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가장 가까이 묻혀있는 유일한 여자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유해 (출처 : git.sanfrancescopatronoditalia.it)

1978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프란치스코의 시신에 대한 새로운 확인 작업을 인준하였고 세상에 성인의 유해가 공식적으로 처음 보이게 됩니다. 성인의 유해는 특수 처리된 플래시 글라스 안에 넣어 원래 있던 석관 안에 모셔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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