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시작과 끝 | 중세 수도원 이야기
몸이 점점 쇠약해져 가던 성인은 1226년 10월이 시작하면서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수도 생활을 보호해 주시길 청하며 성모님께 봉헌한 포르치운콜라에서 죽음을 맞기를 원하였습니다. 아시시에서 내려오던 도중에 잠시 멈추어 당신이 사랑하는 도시 아시시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축복하였고 그의 지친 몸은 포르치운콜라에 도착합니다.
성인이 선종한 곳은 초기 프란치스코 공동체의 병실이 있던 장소입니다. 안전상의 문제로 병실은 생활하는 수도원 건물과 떨어트려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맨몸으로 바닥에 누워 죽음의 자매를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맞이하였습니다. 해가 넘어간 토요일 저녁은 이미 주일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늘에 태어난 축일은 10월 4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선종하시기 전 당신이 지었던 창조물의 노래 (일명, 태양의 찬가)의 마지막 부분인 죽음과 관련된 찬미가를 첨가하였습니다. 죽음마저도 자매로 맞아들이는 프란치스코의 마음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한 잠시의 지나감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감의 경당이라고 부릅니다.
내 주여, 살아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죽음인 누님의 찬미받으소서. 죽을죄 짓고 죽는 사람들은 두 번째 죽음에서 도망갈 길이 없지만, 두 번째 죽음이 해칠 수 없는 당신의 더없이 거룩한 뜻을 좇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내 주를 높이 찬양하고 찬미하여라. 위대한 겸손으로 주님을 섬기고 감사하여라.
경당 안에 있는 제대 위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마지막까지 메고 계셨던 수도복 띠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경당의 외부 벽에는 도메니코 부르스키가 1886년에 그린 프란치스코의 죽음과 장례를 표현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진 설명 : 장미 정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아마트리체의 루이지가 1885년에 지점토를 구워 만든 프란치스코의 석상이 있다. 평화의 사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는 스스로와, 하느님과 그리고 세상의 창조물들과 화해를 하신 분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프란치스코상 주위에는 항상 살아있는 비둘기 두 마리가 평화를 상징하 듯 맴돌고 있다.
사진 설명 : 굽비오 (Gubbio)라는 동네에서 포악한 늑대와 마을 사람들을 화해시켰던 것처럼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동물들은 하느님의 고귀한 창조물들이었고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었다. 같은 의미로 장미 정원 가운데에는 빈첸조 로시뇰리 (Vincenzo Rosignoli)가 1916년에 만든 '성 프란치스코와 양'의 청동상이 있다.
포르치운콜라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장미 정원은 예수님께 완전한 용서를 얻기 전 마음속에 일어나던 의심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 알몸으로 뒹굴었던 장소입니다. 13세기 말의 문서에 등장하는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에는 원래 장미 나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시나무 덤불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덤불에 몸을 던져 뒹굴었을 때 성인의 몸과 닿은 가시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장미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이 나무들은 아시시의 장미라는 고유종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도 이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는 이 장미 나무들이 자라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미의 기적이 일어난 1215년에서 1216년 사이의 프란치스코 주변은 여러모로 혼돈스러운 상태였습니다. 1210년 경에 수도회 인준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처럼 살겠다고 찾아왔지만 성인의 엄격한 삶을 보면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아있는 형제들 사이에서도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규칙으로 된 작은 형제회의 구걸하는 삶 속에서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의심과 유혹은 다툼으로 일어났고 성인에게도 이런 공동체의 상황은 힘겨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프란치스코에게 유일한 해결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가시에 몸을 던진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일치함으로써 십자가의 은총을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인의 전적인 믿음의 행동은 가시나무의 가시만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 상처를 주었던 마음속의 가시도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한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가 3월 초이기 때문에 아직 잎사귀와 장미꽃은 볼 수가 없었으나 나뭇가지에 가시는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시 없는 장미 정원을 통해 인간적인 유혹과 의심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시 없는 장미 정원 바로 옆에 있는 경당입니다.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은 포르치운콜라를 중심으로 개인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프란치스코가 잠을 자고 기도했던 초막이 있던 장소가 바로 이 장미 경당입니다. 이 장소는 성인의 생애 중 가장 많은 날을 보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적인 순례와 설교를 하기 위해서 다른 장소를 다니신 후에는 항상 이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형제들을 선교사로서 파견을 하였고 매년 이곳에서 돗자리 총회를 열어 돌아온 형제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1221년 돗자리 총회 때는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도 이곳에서 만나셨습니다.
장미 경당 내부. 정면 큰 쇠창살 내부에는 제대가 있고 작은 쇠창살 안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잠을 자고 기도하셨던 장소이다.
1260년 성 보나벤투라의 원의에 따라 처음으로 지금 제대가 있는 장소에 조그만 경당이 세워졌고 확장된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1440년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S. Bernardino)에 의해서입니다. 제대 아래 프란치스코의 동굴에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의 상이 있고, 십자가 아래 있는 나무는 설교대에 있던 것으로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콜라에서 전대사를 선포할 때 올라갔던 것입니다.
경당 벽에는 피사의 바르톨로메오가 쓴 프란치스코 성인 전기를 기초로 하여 1506년에서 1516년 사이에 아시시의 티베리오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습니다. 다섯 장으로 그려진 이 프레스코화는 위에서 설명한 포르치운콜라 안에 있는 비테르보의 사제 일라리오가 그린 내용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 초막 옆에 있던 가시나무를 뜯어서 몸을 때리고 맨몸으로 뒹굴자 기적적으로 가시가 사라지고 장미꽃이 피어오릅니다.
두 천사의 도움으로 성인은 초막에서 포르치운콜라로 함께 이동하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오상을 받기 전인데 이 그림에서 성인은 이미 오상을 받은 상태로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천사들과 함께 포르치운콜라에 도착한 성인은 탈혼 상태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바랬던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완전한 용서인 전대사를 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예수님께 직접 청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을 프란치스코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가 아님에도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처럼 프란치스코는 이 엄청난 은총을 청하기 위해서 성모님의 도움을 먼저 청합니다. 무릎을 꿇고 성모님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예수님께 자신의 기도를 전구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모님은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두 손을 뻗어 받아들이고 계시고 얼굴은 당신의 아들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빛은 무언의 압력처럼 째려보는 듯이 아주 강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프란치스코를 바라보며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전대사의 은총을 주시겠다는 표시를 오른손 축복으로 해주시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사실들을 호노리오 3세 교황을 만나 설명을 하고 인준을 청하였습니다. 이 당시 전대사라는 것은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하거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작은 경당인 포르치운콜라에서 받을 수 있도록 교황의 인준을 청한 것입니다. 호노리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코의 장미의 기적과 포르치운콜라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고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기쁜 마음으로 인준을 하면서 기간은 얼마 동안 하기를 원하는지 물어봅니다. 성인은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기간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의 전대사라고 하며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이 받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군이나 신분의 사람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인은 당신만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신 것도 아니었고 자기와 사는 형제들만 천국에 들어가길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총은 계속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르치운콜라는 다른 말로 '천국의 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인은 아시시로 돌아와 포르치운콜라 옆에 설교대를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올라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고 교횡께서 인준한 아시시의 완전한 용서, 전대사를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순례를 하거나 십자군에 참전하는 조건 없이 하느님이 주시는 전대사를 부자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누구나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약속을 받은 날인 8월 2일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대사가 주어졌지만, 지금은 아시시에 순례를 온 사람들은 날짜에 상관없이 전대사의 은총을 청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전대사의 은총은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연혹 영혼들을 위해서 양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4년의 지상에서 성인의 삶은 짧고 강렬하였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 (悔改)는 하느님 안에서 잘못 가는 길을 인식하고 올바른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순간이고 때이고 하느님의 부름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라는 시간의 순서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바로 그 순간 결단할 수 있는 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천국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나나를 놓으려는 용기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결정의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하느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처럼 프란치스코도 예수님의 고통까지 완전히 닮으며 모두가 하늘나라로 직행할 수 있는 '완전한 용서'를 이곳 포르치운콜라를 통해 세상 끝 날까지 열어놓았습니다. 포르치운콜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땅이지만 가장 복된 땅이라고 어찌 말할 수 없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