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이 정원은 수도원에 있는 세 개의 정원 중 가장 크며 1426년에서 1443년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된 성 베네딕도의 상이 있고 구석에는 1439년도에 만들어진 우물이 있습니다. 정원의 회랑 벽에는 루카 시뇨렐리 (1450-1523)와 일명 소도 마라고 불렸던 안토니오 바찌 (1477-1549)가 그린 성 베네딕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 35장의 벽화로 이루어져 있고 성 그레고리오 교황이 쓴 대화록 2권에 나오는 베네딕도 전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시뇨렐리는 1497년에서 1498년 사이에 여덟 장의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큰 사각 정원 서쪽 편 회랑 21번부터 28번까지) 나머지는 소도마가 1505년에서 1508년 사이에 그렸습니다. 이 중 하나는 리쵸라는 사람에 의해 다시 그려진 것입니다. 시뇨렐리는 이 그림들을 그릴 때 이미 오르비에또 주교좌성당 안에 있는 성 브리지오 소성당 안에 그림을 그려달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일 년 정도만 이곳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세 시절 프란치스코회와 도메니코회만 제외하면 모든 수도원들이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회칙으로 두고 지키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수도원도 생활의 중심에 있는 사각 정원에 베네딕도 성인의 삶을 그려놓고 마치 규칙서의 방에서 성인의 규칙서를 한 장씩 읽는 것처럼 마음에 새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가 끝나가고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이 시기에 세워진 올리베타노 수도원의 이 그림들은 새로운 시대에 베네딕도 성인의 삶을 재조명하며 수도자들의 마음에 두려는 강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창설자인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몬테 올리베타노 수도원 규칙서를 따로 쓰지 않았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새로운 규칙서를 인준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있기도 하였지만 성인은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랐던 많은 수도원과는 다르게 수도원 생활의 중심이 되는 가장 큰 사각 정원에 베네딕도 성인의 중요한 이야기를 그려 넣음으로써 베네딕도 성인의 초기 정신대로 중세 말의 수도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베네딕도 규칙서를 통해 하느님을 따라야 할지를 새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혁 수도회들은 황제나 왕들로부터의 제도적 개혁을 이루었다고 한다면 올리베타노 수도원은 베네딕도 규칙을 새롭게 살려는 수도자적 정신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팔을 벌려 두 권의 규칙서를 주고 있는 성 베네딕도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수도원의 삶과 그 규칙을 따르면 누구든지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라틴말로 적혀있는 문장은 1319년 3월 26일 아레쪼 교구의 귀도 주교의 인준으로써 수도원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 당시 교황은 아비뇽에 있었던 요한 22세였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 그림의 시작은 동쪽 편 회랑에서 시작하여 남쪽, 서쪽 그리고 북쪽 편 회랑에서 끝을 맺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서쪽 편 회랑은 루카 시뇨렐리의 그림이고 나머지는 소도마가 그렸습니다.
1. 베네딕도가 로마로 공부를 하러 가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집을 떠나면서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타고 있는 말의 역동적인 모습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없는 베네딕도의 젊음이 느껴집니다. 모자를 쓰고 있는 아버지 옆에는 베네딕도의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난 여동생 스콜라스티카가 부러운 듯 오빠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안쓰럽게 보입니다.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은 함께 떠나는 유모이며 어린 베네딕도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줄 또 다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자세로 말위에 앉아있는 모습과 남아있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하는 모습은 활기찬 베네딕도와는 다르게 세상에 대한 걱정이 많아 보입니다. 오른쪽 멀리 보이는 마을이 베네딕도가 태어난 노르치아이고 그 밑에 조그맣게 그려진 두 마리의 당나귀 중 한 마리는 화가가 잊어먹었는지 앞다리가 없습니다.
2. 베네딕도가 로마에 도착한 시절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북쪽의 야만족들이 내려와 땅을 차지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학문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베네딕도에게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먼저 느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세상의 배움에 대한 실망을 느낀 베네딕도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과감하게 로마의 학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둥근 벽에 그려 넣어 베네딕도의 방향에서 벽화를 보면 마치 벽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보이고, 세상의 학문을 완전히 떠나는 것처럼 중앙 의자에 앉아있는 선생님은 벽화에 그려진 원근감보다 더 멀리 보이는 보이는 듯합니다. 학교 밖 왼쪽 풍경은 멀리 로마의 천사의 성과 천사의 다리 그리고 그 밑을 돌아 흐르는 로마의 테베레 강물이 보이고 있습니다.
3. 베네딕도가 로마를 떠나 유모와 함께 수비아코로 가던 도중 아필레 (Affile) 마을에서 있었던 베네딕도의 첫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건을 세 가지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 왼편에 있는 유모는 베네딕도를 위한 빵을 만들기 위해 고운 밀가루를 걸러낼 수 있는 나무채를 꺼내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깨져버린 나무채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망연자실 서 있습니다. 그 옆에는 깨진 나무채 앞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는 베네딕도의 모습과 함께 기적적으로 붙어가고 있는 채의 모습이 보입니다. 오른쪽 한 무리의 사람들은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와 기둥에 걸려있는 기적의 나무채를 보고 놀라며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소도마 본인으로 칼과 함께 기사 복장을 하고 있고 자신의 애완동물도 그 옆에 그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오른편 사람들 중에는 그의 친척들과 부인과 딸을 등장시켜 천 년 전 이 기적이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님을 그림을 보는 우리를 보며 확인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4. 부서진 채가 하느님의 자비로 완벽하게 붙은 기적을 체험한 베네딕도는 자신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전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유모마저 노르치아의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림 왼쪽 위에 수비아코로 홀로 걸어가는 베네딕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비아코 근처에서 은수 생활을 하고 있던 로마노 수사를 만나 자신이 입고 있던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수도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후에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던져버리는 것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베네딕도의 적극적인 결심과 함께 멀리 보이는 평화로운 수비아코는 마치 앞으로 베네딕도가 찾아가야 할 하느님이 계시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5. 로마노 수사의 안내로 베네딕도는 절벽 사이에 있는 동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기다리는 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젊고 활기찬 베네딕도의 모습은 사라지고 거뭇하게 올라온 턱수염과 햇빛에 그을린 얼굴색, 그리고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은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함께 이미 은수자로서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베네딕도가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노 수사는 절벽 위에서 음식을 내려 주었고 음식이 내려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조그만 종을 매달아 흔들어 소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 사탄이 내려오는 줄에 매달린 종에 돌을 던져 깨뜨리곤 하였습니다. 사탄의 장난으로 종이 여러 번 깨졌지만 로마노 수사는 지치지 않고 베네딕도에게 최소한의 음식을 내려 주어 주님을 찾는 베네딕도의 조력자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500년 후에 등장할 개혁 수도회의 기도하는 수도자와 노동하는 수도자의 역할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6. 이 벽면은 3분의 1 정도가 창문으로 사용되었지만 두 가지 사건을 좌우로 나누어 하나의 일화처럼 잘 연결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문의 오른편을 보면 부활절 날 예수님께서 (중앙 창문 위에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모습) 한 신부에게 나타나셔서 베네딕도의 은수처를 알려주시며 단식하고 있던 베네딕도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갑작스러운 예수님 발현에 놀라며 얼굴을 소리의 방향으로 돌린 사제는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겸손하고 신심 깊은 신부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남자 하인을 시켜 (오른편 건물 그림 속 내부) 베네딕도에게 가져다줄 음식을 준비시킵니다. 창문의 왼편은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베네딕도를 찾아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부활의 기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자 하인은 신선한 붉은 포도주를 따르고 있고 사제는 모자를 벗고 베네딕도 앞에 무릎을 꿇고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며 자신이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닌지 혹은 음식은 너무 적은 것은 아닌지 왼손으로 비워진 음식 바구니를 가리키며 묻는 듯한 모습입니다. 은수자로서 사람들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을 선택한 베네딕도였지만, 그의 얼굴은 온화하며 다정한 동작으로 사제를 맞이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수도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예수님 보듯이 맞이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이 연상되는 부분이며 수도자는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 신부의 방문 후에 주변에 있던 목동들이 성인의 위치를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성인에게 육신의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성인은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말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인께서 은수 생활 이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해주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베네딕도는 손가락을 펴고 접는 동작 같은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네딕도를 찾아온 사람들은 옷차림새로 목동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임을 이 그림에서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수도자는 자신이 찾은 하느님을 혼자 알고 천국에 가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여 세상에 보여주었듯이 수도자도 하느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세상에 나누어주는 사람들입니다.
8. 모자와 지팡이까지 준비하여 은수처를 떠나 세상 사람들을 만나려는 베네딕도에게 여태껏 없었던 강한 유혹이 닥치고 있습니다. 베네딕도의 머릿속 (하늘 위)은 예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유혹하는 사탄이 있고 성인은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 예수님께 은총을 청하며 맨몸으로 가시덤불에 몸을 던지게 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으려는 사탄의 유혹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는 수도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사십일 동안 단식하셨던 예수님에게도 나타났으니까요. 이 유혹은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무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선택하며 원죄라는 굴레를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네딕도는 유혹을 이기겠다는 자유의지로 수도복마저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가시덤불에 몸을 던져버립니다. 수도복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방패는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환상 속에 나타난 유혹을 쫓아내듯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자비입니다. 천사가 나타나 사탄을 물리치고 있고 베네딕도는 더 이상 이런 유혹이 생기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림 속 배경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수비아코에 흐르는 아니에네 강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유혹을 이기도 난 후에 만나게 되는 하느님의 평화일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