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성인이 활동한 14세기 초반은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의 여명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이슬람이 점령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명목으로 200년 동안 끌어오던 십자군 전쟁은 1291년 그리스도교 군의 패배로 끝을 맺게 되고, 그 여파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힘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대도시들은 더 이상 믿음을 바탕으로 한 교회와 교황 중심으로 살기보다는, 이성을 기반으로 한 각 도시 중심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고 하는 도시주의를 택하게 되었고 도시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귀족 가문들이 등장하며 국가주의로 변해가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의 최대 수혜를 본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 중에 태어난 성전 기사 수도회를 이단으로 몰아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프랑스인 출신 추기경 베르트랑을 클레멘스 5세 교황으로 즉위시키면서 1309년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사실상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가 태어나던 해인 1347년도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으로 들어온 상선으로부터 시작되어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흑사병은 당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염세주의적 사상을 낳으며 더욱더 암울한 시기로 변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창설자인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Bernardo Tolomei)는 1272년 시에나의 명문가인 톨로메이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톨로메이 가문은 8세기 카를로 황제 시절에 롱고바르디 왕국과 싸워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시에나에서 은행업을 통해 부와 권력을 쌓은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이탈리아 도시들은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누어져 서로를 적대시하였고 톨로메이 가문이 지지한 구엘피당은 기벨리니당에게 패하면서 시에나에서 쫓겨나 1262년에 다른 도시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가문이 다시 시에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르도 톨로메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270년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태어난 성인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다행히 톨로메이 가문에 걸맞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명석한 두뇌와 기억력을 가지고 있던 요한은 젊은 나이에 법학 교수로써 시에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갑작스러운 눈병으로 장님이 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도 시에나에 있었던 도메니코회 수도자들과 영적 대화를 통해 배웠던,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느님께 의지하여야 한다는 말은 요한에게 위로를 주었고, 눈병의 치유라는 기적을 체험하며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삶을 살기로 다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도메니코회를 택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본인이 존경하는 성인이 세운 시토회를 선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40의 나이로 접어든 요한은 저물어가는 중세 말 혼돈의 시간 속에서, 그리고 가문의 권력과 부를 누리며 어쩌면 호화스럽게 살던 삶에 대한 반성으로 두 명의 친구이자 동료와 함께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던 톨로메이 집안의 소유지 아코나 (Accona)에서 엄격한 삶인 노동과 기도와 침묵 속에 관상을 하는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존경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이름을 수도명으로 택하여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로 불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성 베네딕도처럼 동굴에서 하느님을 찾는 은수 생활을 몇 년 동안 하였고, 귀족의 깨끗한 손은 수도자의 노동의 손으로 거칠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와 노동의 은수자들이란 소문은 주변 마을로 퍼져나갔고, 귀족 출신과 비귀족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초기 베네딕도 성인이 세운 수도원처럼 모두가 평등한 형제애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동하였습니다. 베르나르도 역시 사제가 될 수 있었지만 형제들과 함께 애덕을 실천하며 평수사로 지내는 것에 만족하였고 수도원장으로의 추대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즈음 지금 수도원 성당이 있는 자리에서 기도를 하다가 신비 체험을 하게 됩니다. 베르나르도는 기도 중에 환시를 보게 되는데,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은으로 된 사다리가 동쪽 하늘로 뻗어 있었고 그 사다리를 타고 흰옷을 입은 많은 수도자들이 천사의 도움을 받으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다리 끝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계셨고 두 분 다 흰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단들이 너무나 많이 있던 시절이었기에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환시 이야기를 쉽게 사람들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베르나르도의 카리스마에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교회에서는 조사단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네딕도 규칙에 따라 엄격하고 형제적 사랑으로 사는 수도자들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베르나르도는 오히려 자신의 환시에 대한 식별을 위해 순명의 마음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아레쪼 교구의 주교 귀도 타를라티를 찾아가게 됩니다.
귀도 주교는 1319년 3월 26일 베네딕도의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회 창설을 인준하였고 톨로메이는 ‘올리브 산의 성모 마리아’라는 수도원 이름과 성모님에 대한 공경과 신앙으로 흰색 수도복을 택하였습니다. 톨로메이의 흰색 수도복은 개혁의 정신으로 흰색 수도복을 입었던 시토회나 카르투시오회 그리고 카말돌리회와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지만 성모 마리아 특히,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주시기 위한 연결고리로써 성모 탄생의 의미를 수도 생활의 중심에 두려고 한 것도 이 수도회만의 특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수도원장의 시기는 1년이었는데 베르나르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원장이 되기를 사양하다가 1321년에 형제들에 대한 더욱 완전한 봉사를 위해 수도원장 직을 수락하였고. 26년 동안 매년 수도원장으로 추대를 받아 선종할 때까지 모든 형제들에게 모델이 되는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1344년 1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공식적으로 교회 안에서 ‘몬테 올리베또의 성모 마리아 베네딕도 수도 연합회'를 인준하였고 이탈리아 안에서 급속하게 수도원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일까요, 1347년 이탈리아 남부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1348년 이탈리아 중부지방까지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본 베르나르도는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 형제들을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보냈으며, 본인 스스로도 그들을 돌보고 위로하기 위해 잠시 수도원을 떠나 시에나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역시 흑사병으로 인해 어려움에 빠진 이웃이자 친구들을 위해 온전하게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사랑의 완성을 실천하며 8월 20일 선종하였습니다.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1644년 복자로 선포되었고, 시성은 2009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들어서며 처음 마주치는 건물은 붉은색 벽돌로 쌓아올린 웅장해 보이는 탑과 함께 있는 입구입니다. 출입구는 중세 시절 성에 나옴직한 해자를 사이에 두고 오르고 내릴 수 있는 문입니다. 문 위에는 롭비아 (Della Robbia) 조각가 집안에서 테라코타를 유리로 덮어 만든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이 우리를 맞이해주고 계십니다. 문을 지나 반대편 쪽 위에는 역시 같은 사람이 만들었고 규칙서를 들고 축복해 주는 베네딕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경사진 벽돌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 편에 물을 모아 두었음직한 수영장 같은 구조물이 나오는데 이것은 1533년도에 만들어 양어장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기를 먹을 수 없었던 날이 많은 수도자들에게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하여 산에서 물고기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 같습니다. 수도원 식사를 표현한 그림을 보면 항상 빵과 물고기가 식탁에 등장했던 이유가 이 양어장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내려가다 보면, 성당 후미가 등장하고 최근에 만든 것처럼 깨끗한 하얀 대리석으로 된 성인상을 볼 수 있습니다. 2009년에 성인품에 오른 창립자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성인의 석상입니다.
이 수도원 대성당은 1400년에서 1417년까지 고딕 –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만들어졌지만 1772년도에 죠반니 안티노리에 의해 내부가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성당 외부와 종탑은 15세기의 모습을 보존하여 붉은색 벽돌로 되어 있고 라틴 십자가 형태로 지어진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기둥 없는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어 소외되는 사람없이 누구나 서로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공동체의 일치가 느껴집니다.
그러기에 중앙 세로 복도에 다른 수도원에서 볼 수 없는 수도자들의 기도 장소인 가대를 볼 수 있습니다. 시토회도 이렇게 성당 중심부에 가대를 설치해 공동체가 함께 기도를 하였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에 눈길이 한참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더 특별한 것은 바로 상감 기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그 정성이 더 느껴집니다. 여러 가지 나무색을 이용해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상감기법은 르네상스 시절 수도원에서 많이 사용하였고 특히 이 가대는 올리베타노 수도회 출신이면서 조각가이자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책에 처음 도입 부분에 들어가는 미니어처의 장인이었던 베로나의 요한 수사가 1503년에서 1505년 사이에 만든 것입니다. 일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도 규칙에 가장 잘 맞는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수도원 성당은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에게 특히, 성모 성탄에 대한 신심으로 봉헌한 성당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탄생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주곡이자 우리 모두에게는 하늘의 문을 열어 줄 축복입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수도원을 창설할 때 특별히 성모님께 봉헌하였고 그 신심의 표시로 백색의 백합처럼 흰색 수도복을 입었습니다. 창립자의 성모 탄생 신심은 성당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단화는 1598년도에 야곱 리고찌 (Giacomo Ligozzi)가 그린 동정 마리아의 탄생이 있고 성당 가로 세로가 교차하는 천장에는 역시 같은 화가가 그린 성모 승천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 특별한 것은 중앙 제대 오른 편에는 아기 예수님처럼 보이는 18세기 때 만들어진 아기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토디 (Todi)에 있는 글라라 수녀원의 키아라 이사벨라 포르나리 (Chiara Isabella Fornari, 1697-1761) 수녀가 밀랍으로 만들어 자신의 고백 신부에게 준 것입니다. 이 신부는 다시 1755년에 이곳 수도원에 기증하여 현재 대성당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성모 탄생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었지만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도 9월 8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대 오른편 쪽에는 제의실이 있고 그 중앙에 브레쉬아 (Brescia)의 라파엘 수사가 만든 가대에서 사용했던 기도서 받침대를 볼 수 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나오려면 아직도 100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라 양가죽을 이용한 양피지에 필사로 이루어지던 책들은 무척이나 귀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도서를 갖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볼 수 있도록 기도서를 크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시절이었고, 이것을 가대의 중앙에 놓을 수 있도록 만든 받침대입니다. 역시 상감기법으로 만들었고 받침대 밑 부분에 있는 고양이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십자가의 소성당이 있습니다. 이 소성당 제대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 고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그림으로 그려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베르나르도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1313년도에 창설자인 베르나르도가 이곳에 모셨고 여러 번 십자가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제의실 오른쪽 문으로 나가면 큰 사각 정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