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커버 이미지 : 올리브 밭과 붙어있는 석양의 글라라 대성당과 수도원.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아시시의 서쪽 편 끝에 있다면 글라라 대성당은 동쪽 편 끝에 위치를 하고 있어 두 성인께서 아시시를 축복하고 보호하는 듯하다. (C) 2022.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1111년에 나오는 문서에 의하면, 현재 글라라 대성당이 있던 자리에 성 조르조 (S. Giorgio) 성당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과 주교좌 사제단의 소유인 학교도 딸려 있었던 아시시 도시 바깥 성벽과 가장 가까운 성당이었습니다. 이 병원은 처음엔 주교좌성당인 성 루피노의 병원으로 불렸지만 후에는 성 조르조의 병원이라고 불리면서 가난한 사람과 순례자들의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도시로 들어오기 전에 병원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었고 혹시나 모를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1226년 10월 3일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조르조 성당 제대 아래 크립타에 3년 반 동안 모셔져 있었고, 그 사이 1228년 7월 16일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혀있었던 같은 자리에 1253년 8월 11일에 선종한 글라라 성녀의 유해가 모셔지게 됩니다. 아시시에서 거리상으로 떨어진 다미아노 성당보다는 도시와 가까이 있던 조르조 성당이 좀 더 안전하였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혀있던 같은 자리에 성녀의 유해를 모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미아노 수녀원에서 자신들의 창립자와 함께 수도 생활을 한 수녀들 또한 글라라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조르조 성당으로 수도원을 옮기고 싶어 하게 됩니다. 다미아노 성당과 바꾸어 사용하는 데에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1257년 알렉산드로 4세 교황 (1254-1261)의 중재로 조르조 성당은 글라라 회의 소유가 되었고 아시시의 주교는 글라라 성녀를 기념할 만한 새로운 성당 건축을 결정하게 됩니다. 공사 감독은 캄펠로의 필립보 수사가 맡았고 공사를 시작한 지 채 10년도 안된 1265년에 완성되어 클레멘스 4세 교황 (1265-1268)에 의해 글라라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축성이 되었습니다.
조르조 성당에 있던 글라라 성녀의 유해는 글라라 대성당이 완성되기 전인 1260년 10월 3일 현재의 중앙 제대 아래로 옮겨졌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지하로 내려가서 볼 수 있는 무덤 경당은 없었고 제대 계단의 구멍을 통해서만 석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글라라 성녀의 유해가 모셔진 글라라 대성당을 조르조 성당처럼 아시시 성 밖에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1365년에는 글라라 성당 밖으로 아시시 성벽이 연장됐고 새로운 성문 (Porta Nuova)이 다시 만들어지면서 원래 있던 조르조 성문은 도시 안으로 들어와 그 기능을 잃게 되었지만 중세 도시의 산증인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1912년 8월 9일에는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 이 성당은 바실리카 미노레 (Basilica minore)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사족입니다.
바실리카 (Basilica)는 큰 바실리카 (Basilica Maggiore)와 작은 바실리카 (Basilica Minore)로 구분이 되며 큰 바실리카는 로마에 있는 4대 성당을 칭하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 큰 바실리카라는 칭호는 1300년 최초의 성년을 반포한 보니파시오 8세 교황 때 처음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전대사와 관련이 있어서 이때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두 곳만을 큰 바실리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 성년이었던 1350년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서 라테란 대성당이 추가되었고 40년 후인 1390년도에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최종 추가가 된다. 이 네 개의 대성당은 각각 성문 (Porta Santa)를 갖고 있고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이 대성당을 순례하는 것이 조건이 되었다.
작은 바실리카 (Basilica Mionre)는 존경의 호칭으로써 교황 교서 (Breve apostolico)를 통해 인준이 이루어지게 된다. 작은 바실리카는 교황 작은 바실리카 (Basilica minore papale), 교황청 작은 바실리카 (Basilica minore pontificiale) 그리고 일반 작은 바실리카 (Basilica minore) 세 가지 호칭으로 나누고 있다. 교황의 작은 바실리카는 아시시에 있는 프란치스코 대성당 (basilica di S. Francesco)과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이 있고 교황청 작은 바실리카는 바리에 있는 성 니콜라오 대성당, 로레또에 있는 성스러운 성모의 집 대성당, 파도바에 있는 안토니오 대성당 그리고 폼페이에 있는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들은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를 하고 있고 교황청 정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구 안에서 중요한 성당은 주교가 머무는 주교좌성당이고 교황님은 교구 안에 많은 신자들이 공경하는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든지, 중요한 기도의 장소로서 중요한 성당을 교황의 칭호를 붙여 교황과 지역 교회 간의 깊은 유대 관계를 보여주게 된다. 바실리카 미노레의 명칭을 받기 위해서는 이 성당이 교구 안에서 전례적 그리고 사목적 삶의 중심이어야 하고, 공경받는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교구 안에서 그 명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성체성사와 고백성사가 이루어지고 매년 한 번씩 성당 축성 기념일 혹은 성당에 봉헌된 성인 기념일 등에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바실리카 미노레는 성당 정면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받은 수위권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와 교회의 열쇠가 교차된 모습으로 된 교황 문장을 사용할 수 있다. 바실리카라는 호칭을 가진 성당은 전 세계적으로 1600개 정도가 있고 그중 이탈리아에만 3분의 1인 583개의 바실리카 성당이 있다. 애석하게도 한국 교회는 아직까지 바실리카 미노레의 성당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당 정면은 고딕 양식으로써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2층 정면과 거의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로 흡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훨씬 단순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고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장미원 화창이 이중으로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고 성당 출입구는 하나만 가지고 있지만, 문을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예수님을 상징함과 동시에 거룩한 이 집에 우리들이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듯합니다. 사용한 석재는 아시시 주변에서 나오는 붉은색 대리석과 석회가 많이 섞여있는 흰색 돌로 되어있습니다. 두 가지 색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색인 붉은색 돌은 예수님의 고귀함을, 일반인들의 집에 들어갈만한 흰색 돌은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그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가난함입니다. 돌이라는 재료로 하느님의 본성을 드러내어 우리를 맞아주는 이 성당은 교회의 칠성사에 더해 건축의 성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른편 성당과 덧붙여 만들어진 글라라 수녀원 안에서 글라라 성녀가 만 60세에 선종하신 것을 기억하 듯 항상 60명의 글라라 회 수도자들이 이곳에서 봉쇄 수도 생활과 함께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왼편의 고딕의 건축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버팀기둥은 오른편 수녀원으로 인한 성당의 좌우 무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 1351년에 추가로 만들어졌습니다. 성당 뒤편에서 볼 수 있는 글라라 성당의 아름답고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종탑은 1926년에 다시 만든 것입니다.
A 성녀 아녜스 소성당 혹은 성체의 소성당 B 중앙 제대와 페르골라(pergola) C 성 조르조 성당 D 성녀 글라라 지하 무덤 출입구 E 종탑 1 십자가 2 성 다미아노 십자가 3 성 조르조 성당 입구
성당 내부는 라틴 십자가 형태의 평면도를 가지고 있고 기둥이 없는 하나의 본당을 가지며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전형적인 수도원 성당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본당 측면에 있는 소성당들은 14세기 초에 성당 벽에 덧붙여 만들어졌습니다. 성당 벽에는 글라라 성녀의 생애와 관련된 프레스코화가 있었지만 세월의 무게와 지형적 위치에 의한 잦은 지진에 의해 많이 손상되어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아녜스 소성당에는 글라라 성녀의 동생이며 성녀와 같은 해에 선종한 아시시의 성녀 아녜스 (1197-1253)의 유해가 있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있었던 복원 공사 후에는 감실을 모시고 있는 성체의 소성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앙 제대에는 페르골라 (pergola)라고 불리는 사제석과 성가대를 분리하고 제대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제대 아래 성녀의 유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철로 만들어진 구조물과 연결된 15세기 때의 석조 구조물이 있습니다. 12개로 이루어진 짙은 붉은색의 팔각기둥들은 이곳이 얼마나 고귀한 자리인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제대 아래 두 번째 계단에 나있는 구멍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중앙 제대 아래 놓여있던 성녀의 석관을 볼 수 있도록 1260년에 뚫어놓은 것입니다. 제대 위에 매달려 있는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이 그려진 이콘형 십자가는 1260년경 베네데타 여수도원장이 의뢰로 만들어졌고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 그리고 의뢰자인 여수도원장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제대 왼편 익랑에는 다미아노 성당 편에서 부분으로 그림 설명할 때 인용한 13세기 때의 소위 '성녀 글라라의 마에스트로' (Maestro della S. Chiara)가 그린 '글라라 성녀의 생애' 목판 그림이 있습니다. 중앙에는 글라라 성녀의 모습과 함께 양편에 네 장씩 여덟 가지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미아노 십자가가 있는 이 경당은 글라라 대성당 이전에 있었던 조르조 성당의 일부분에 속했던 곳입니다. 제대가 있는 후면 벽에는 14세기 중반에 푸치오 카판나 (Puccio Capanna)가 그린 옥좌에 아기 예수님과 앉아계신 성모님과 좌우로 성녀 글라라, 세례자 성 요한, 사도 성 요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 위로는 역시 같은 시기에 피에트로 로렌제티의 제자들이 그린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예수님 무덤에 묻히심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그림이 있습니다. 왼쪽 벽에는 조토의 공방에서 그린 예수님 탄생 프레스코화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3년 동안 잠들어 있었고, 같은 자리에 글라라 성녀의 유해가 지금의 중앙 제대로 옮기기 전까지 모셔져 있던 곳입니다.
제대 위로는 허공에 매달려있는 다미아노 십자가 진품을 볼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로 그 십자가입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죽음의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고통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내신 성부의 뜻을 이해하시고 모두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 머리 뒤의 후광이 증명하듯 밝게 빛나고 있고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이나 천사들에게서 어떤 슬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 팔 아래 다섯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보다 작지만 십자가에 그려진 다른 사람들보다는 크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의 역할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직접 본 증인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왼쪽 두 명은 성모 마리아와 사도 성 요한 그리고 오른쪽 세 사람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인 클레오파의 마리아 그리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마르코 15장 39)'라고 고백한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의 이 한 마디는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계신다는 증언입니다.
성모 마리아 아래 작은 모습으로 그려진 사람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 병사이자 순교자인 성 론지노입니다. 백인대장 아래 작은 모습의 사람은 역시 로마 병사로써 예수님께 식초를 적신 해면으로 입을 적셔드렸던 스테파톤 (Stephaton)입니다.
발아래에는 여섯 명이 사람이 서있고 덜 훼손된 두 명의 사람은 후광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여섯 명은 움브리아 지방의 수호성인으로서 사도 성 요한, 성 미카엘, 성 루피노, 세례자 성 요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양 팔의 끝에 있는 여섯 명의 천사들도 슬퍼하는 모습보다는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서로 이야기하며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를 살아계시며 양팔을 벌려 모든 사람들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에게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에는 죄명판인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말이 라틴말로 적혀있고 그 위로 황금색 옷을 입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고 계십니다. 열 명의 천사들이 예수님을 반갑게 맡고 있고 하늘나라에 오르시는 예수님은 손을 들어 인사하시는 것처럼 밝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로는 두 손가락을 펴고 올라오는 성자를 축복하며 맞으시는 성부이신 하느님의 오른손이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 (신성)이시고 완전한 사람 (인성)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신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하느님의 본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수동적인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두 팔과 손을 벌려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세상 끝 날까지 기다리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십니다.
본당 중앙에 있는 계단을 통하면 글라라 성녀의 유해와 두 성인의 유품도 있는 지하 무덤 (크립타)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성녀의 유해가 보이는 크립타 전경. 성녀의 유해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 아치형으로 된 공간 안에 제대가 있는데, 그 위 부분이 성녀의 유해가 모셔진 석관이 발견된 곳이다. 티볼리 대리석으로 된 석관이 보관이 되어있다.
1818년 12월 13일에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있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석관 발굴 작업과 아래층 성당의 중앙 제대 아래 프란치스코 성인을 위한 새로운 무덤 성당의 건설은 글라라 수도회에게도 자신들의 창립자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모시고 싶다는 열망을 깨우게 됩니다. 그렇게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성당이 완공되던 해인 1850년 9월 23일 중앙 제대 아래 성녀의 유해가 모셔진 티볼리의 투박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관을 발굴하게 됩니다. 그리고 1852년부터 1872년 사이에 무덤 경당인 크립타를 처음 만들었고 1935년에 현재의 모습인 신고딕 양식으로 새로이 장식하게 됩니다.
성녀의 남은 유해는 사람의 형태로 만들어진 유골함에 모셔져 있고 글라라 수녀회의 수도복을 입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 누워계신 모습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잠들어있는 것처럼 세상 끝날 부활을 기다리는 듯이 보입니다. 성당 건축에 사용된 붉은색과 흰색으로 된 수비아코의 돌로 네 개의 기둥을 세웠고 크리스털 유리로 된 관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성 프란치스코의 활동과 성녀 글라라의 관상은 나누어지고 대치되는 수도 생활이 아닙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활동이 땅 위에 드러난 나무와 열매라고 한다면 성녀 글라라의 관상은 땅속에 있는 뿌리입니다. 예수님은 씨앗을 뿌리셨고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 씨앗 속에서 영적으로 하나가 세상에 그리고 천국에 태어나셨습니다.
맞은편에는 글라라 성녀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옷은 글라라 성녀가 입었던 수도복과 망토. 아래 동그란 유리병에 있는 것은 글리라 성녀가 사용한 실패. 왼편의 띠는 글라라 성녀가 사용한 수도복 띠, 그 위 은색 뚜껑으로 덮인 유리함 안에는 글라라 성녀의 머리카락이다. 왼편의 신발 하나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1226년 라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받을 때 신으셨던 신발이다. 왼쪽의 옷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회개 후에 입으신 옷이고 오른 편의 옷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도복이다. 아래 책은 성인의 기도서이고 그 옆에는 성인이 사용한 수도복 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