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A 작은 경당 B 입구 C 성 예로니모 경당 D 십자가 경당 E 다미아노 성당 F 글라라회 수녀들의 기도소 G 글라라의 작은 정원 H 성녀 글라라 경당 I 글라라회 수녀들이 잠자던 곳 L 수도원 사각 정원 M 공동식당 1 다미아노 십자가 2 성당 가대 3 무덤 4 성녀 글라라 선종하신 곳 5 벽화
성당 가대 오른편에 있는 문을 통과하면 바로 왼쪽으로 초기 글라라회 수녀들의 유해를 안치한 무덤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람이라도 죽으면 살아있는 공간으로부터 멀리 분리시키고 싶어 하는 우리의 문화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예를 중요시 여기는 유교가 있었지만 사후 세계라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대한 답도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두렵고 피해야 하고 생각하기 싫은 나쁜 것이라는 이미지가 더 지배적이었고 죽은 사람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을 자리를 마련하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활이 핵심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죽음도 하나의 지나감이었고 죽은 사람도 언젠가는 부활해서 다시 만날 사람들이었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동네 가까이 가족들의 무덤을 마련하였고 수도자들은 수도원 안에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어의 세미트리의 어원이 되는 라틴말 체메테리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뜻은 죽은 자들이 함께 있는 곳이 아니라, 잠자는 곳, 휴식하는 곳, 부활을 기다리는 장소라는 뜻이었습니다. 제대 옆에 마련된 이 무덤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도 희망하는 또 따른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이곳에 글라라 성녀의 동생 아녜스 (+1253)와 어머니 오르톨라나 (+1238)도 있었고, 현재 이곳에 있던 유해들은 글라라 대성당 내에 있는 성체의 소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계속해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글라라 성녀와 수녀들이 기도했던 나무로 만들어진 가대가 있는 작은 기도소가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나무로 만든 독서대와 기도석은 성녀가 살아계셨을 당시의 시절로 우리를 안내하는 듯합니다. 수녀원의 심장인 이 장소는 우리에게 기도란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귀 기울임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한 애독과 묵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자정에 성녀는 이곳에서 촛불을 밝히며 자매들을 초대하였듯이 우리를 스승이신 예수님에게로 안내하는 기도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층과 연결된 계단을 통해 오르다 보면 성녀 글라라의 작은 정원과 통하는 조그만 문이 나옵니다. 수도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성녀와 자매들은 움브리아 지방의 평야와 계곡이 보이는 이곳의 자연과 하늘을 보며 기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 아래에서 라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받은 성 프란치스코가 말년에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를 쓰셨다고 합니다. 선종하시기 1년 전에 작성하셨으니 사실 눈이 안 보이던 상태였었고 그럼에도 이런 아름다운 찬미가를 불렀다는 것은 육안으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혜안으로 보이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조화로운 진짜 세상을 찬미한 것입니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다미아노 성당 제대 위쪽으로 만들어진 성녀 글라라의 경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녀는 1224년부터 선종하실 때까지 29년간 긴 병상 속에서 수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당이나 기도 속에 내려가기 어려울 때 성녀가 기도하고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잠자는 곳과 가까운 장소에 경당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녀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였기 때문입니다. 제대 앞바닥에는 다미아노 성당 가대가 보이는 사각 나무로 된 덮개가 있습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등을 내려보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아마도 성당까지 내려갈 수 없었던 성녀가 미사 소리를 들으면서 이 구멍을 통해 사제가 올려주는 성체를 영하였을 것입니다.
제대 왼쪽에는 벽을 파서 만든 감실이 있고 성녀는 성체를 모신 이 감실 앞에서 선종하실 때까지 자매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듯 감실 왼쪽 아래에는 성녀가 기도하는 자매들과 함께 감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감실 안에는 아기의 모습으로 그려진 예수님이 있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굳건하게 믿고 있었고 사방이 막힌 수도원 안에서만 예수님의 현존을 드러내신 것은 아닙니다. 볼세나에서 있었던 성체의 기적 (1264년) 보다 일찍 빵의 형태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라센 사람들에게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사라센인들을 시켜 수녀원과 (1240년) 아시시 도시를 (1241년)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녀는 방패처럼 성체를 모시고 나와 수녀원과 도시를 구하였는데 사라센 사람들은 성체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빛을 보고 놀래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림 설명 :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에서 본 한 자매의 환시.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가 한 무리의 동정녀들과 함께 글라라가 누워있는 곳에 들어와 빛나고 아름다운 천으로 성녀의 시신을 감싸고 있다.
그림 설명 : 성녀의 선종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시시 도시에서 몰려들었고 인노첸시오 4세 교황님과 교황청 추기경들이 장례예식을 하고 있다.
제대 앞쪽에 있는 출구를 통해 몇 계단 올라가면 글라라 성녀와 자매들이 잠을 잤던 침실이 나옵니다. 지붕을 덮은 기와가 직접적으로 보이는 이 장소는 겨울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웠을 것이고 여름엔 뜨거운 열기가 침실을 한증막처럼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위 사이에서 즐겨 잠을 자던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각하면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글라라 성녀는 이것도 큰 사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252년 지상에서 마지막 성탄을 맞이한 성녀는 이곳에서 탈혼 상태에 빠집니다. 자매들 없이 홀로 기도속에 있던 성녀는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이루어지던 성탄 미사를 환시 속에서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에 성녀를 텔레비전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장소에서 29년이라는 병상에서 수도 생활을 하셨지만 성녀는 글라라 회에 맞는 특별한 영성을 살 수 있도록 기도와 하느님 체험 속에서 얻은 규칙서를 오랜 시간 동안 작성하고 끈기 있게 인준을 기다렸고, 마침내 선종하시기 이틀 전 기쁜 마음으로 인준된 규칙서를 받아보실 수 있었습니다. 창립자가 선종하기 전에 글라라 수도회 인준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글라라 회의 기쁨이기도 하였지만 앞으로 교회 안에서 탄생할 다양한 카리스마를 가진 여자 수도회를 위한 하느님 은총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하신지 27년이 지난 1253년 8월 11일 저녁 즈음 성녀는 "저를 창조하신 주님, 당신은 축복받으소서"라는 마지막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하늘나라에 태어나셨습니다. 벽에 붙어있는 나무 십자가는 15세기의 것이고 침실의 창문들은 봉쇄 수도원답게 사각 정원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수도원 생활의 중심인 사방이 막힌 사각 정원 (Chiostro)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진 설명 : 성녀께서 임종하신 침실의 창문에서 내려다 본 사각 정원. 회랑 지붕은 빗물이 정원으로 떨어져 모일 수 있도록 내부로 기울어져있고 정원 바닥 아래에는 물을 모아두는 집수장이 만들어져있다.
사진 설명 : 수도원 사각 정원. 회랑의 천장은 우물 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로 만들어져있고 벽돌 기와로 되어있다. 의미 부여를 하며 만들어진 시토회의 사각 정원과는 달리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드러나는 단순함이 묻어나는 정원이다.
수도원 사각 정원의 중심에는 빗물을 받아 모아놓은 저수조에서 물을 길어올릴 수 있는 우물이 중심에 있습니다. 우물은 목마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 사각 정원에서 수도원 공동식당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검소한 식사를 하였던 아무 장식 없는 투박한 나무 의자와 식탁은 성녀와 자매들이 사용한 초창기의 것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식탁 오른쪽 끝에 꽃이 놓여있는 자리가 성녀가 건강이 허락할 때 내려와 식사를 하였던 곳입니다. 1228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시성식 후 이 식당에서 성녀와 함께 자리를 하였고 성녀에게 식사 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성녀가 십자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자 그곳에 있던 빵 하나하나에 십자 표시가 빵 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빵의 기적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표징이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며 살던 수녀원에 식사 시간이 다 되었지만 빵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들은 걱정과 함께 오늘은 굶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녀는 그 한 덩어리 빵마저 반은 잘라서 프란치스코 형제들에게 보냈고 나머지 반은 50조각으로 잘라 식탁에 앉아있는 각 자매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성녀의 강한 믿음과 하느님께 향한 간절한 기도 속에 바구니에서 나오는 50조각의 빵은 완전한 하나의 빵으로 나오기 시작하여 모두가 충분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설명 : 글라라 성녀 당시의 수녀원 식당의 식탁과 의자. 벽에는 성녀가 식사 전 기도를 하자 십자표시가 빵 위에 나타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수도원을 나와 조그만 광장에 서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너머로 프란치스코가 형제라고 부른 태양의 노을을 바라봅니다. 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들입니다.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릴 만큼 예수님을 닮으려 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낸 분입니다. 글라라 성녀는 평생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 조그만 수도원에서 생활하셨지만 여러 번의 성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그리스도인들과 이교인들에게 증거하셨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삶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드러내심이 충분하지만 이 두 분의 삶의 이야기를 합치면 시너지 효과로 인해 더욱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십니다. 마치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처럼요.
미사는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자비의 시간입니다. 말씀의 전례에서는 성서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의 눈과 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성찬의 전례에서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몸 안에 직접 들어오십니다. 미사의 이 두 부분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삶과 겹쳐서 보이지 않으신가요? 말씀의 전례가 프란치스코의 삶이고 성찬의 전례가 글라라의 삶입니다. 사람은 두 명이지만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가리키며, 주님과 프란치스코 그리고 글라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