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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Jun 22. 2022

글라라 수도회 - 회칙 인준서를 받은 최초의 여자수도원

중세 수도원 이야기

* 커버 이미지 : 왼쪽 주교좌인 성 루피노 대성당과 오른쪽 성녀 글라라 대성당 (C) 2022.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성녀 글라라 (1193-1253년 8월 11일)

성 루피노 대성당.  노란색 화살표 방향이 글라라 성녀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 지낸 집이 있던 장소  (C) 2022.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성녀 글라라는 1193년 성 루피노 대성당 광장과 맞붙어있는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1182년에 태어났으니 거의 띠동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영화를 보면 두 분이 어린 시절에 이미 알고 지내는 친구처럼 나오지만 이것은 정말 소설 같은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길을 찾아가던 22살 즈음에 글라라는 11살 정도밖에 안된 아이였기도 했지만, 글라라의 집안은 귀족파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주인으로 섬기며 지지하고 있었고 프란치스코는 보르게제 (중간계급)로써 아시시의 자치도시제를 외치는 집안에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1199년에서 1200년 사이에 두 지지세력은 무력으로 아시시에서 충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때 글라라의 가족은 페루자로 피난을 떠나 한동안 그곳에서 머물렀었고 다시 아시시로 돌아왔을 때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형제들과 포르치운콜라에서 수도 생활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림 설명 : 성지주일에 모든 소녀들이 제단으로 나아가 성지 가지를 받았지만 겸손한 글라라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주교가 내려와 글라라에게 직접 성지 가지를 주었다. 이것은 교회로의 부르심의 표현이다. (글라라 대성당에 있는 '글라라의 생애' 판화 일부)
그림 설명 : 집에서 도망친 글라라를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포르치운콜라에서 맞이하고 있다. (글라라 대성당에 있는 '글라라의 생애' 판화 일부)


1206년 프란치스코가 아버지와 재판에서 자신의 옷을 아버지에게 다 벗어주고 아시시를 떠난 사건은 그 당시 아시시 사람들에게는 이해 못 할 행동이었고 열세 살이었던 글라라에게도 예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프란치스코의 회개의 방법과 하느님을 향한 그의 행동은 큰 충격과 함께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진 것 없이 아시시를 나가버린 그들에 대해 인간적인 걱정도 들었습니다. 글라라의 이 시절 있었던 일화 중에는 글라라가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린 글라라는 부모로부터 받은 돈을 가지고 프란치스코가 있던 포르치운콜라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주며 고기를 사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집 저집 구걸로 연명하던 프란치스코를 보며 측은한 마음과 함께 고기로 육체적인 힘을 얻었으면 하는 생각이 어린 글라라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글라라의 종교적인 심성은 어린 시절 어머니 오르톨라나 피우미 (Ortolana Fiumi)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의 사후에 글라라가 있던 수도원의 삶을 선택하게 될 어머니는 글라라에게 기본적인 종교 교육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실천하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공경,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마음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물질적 도움 등을 가르쳤습니다. 글라라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아시시에서 가장 고귀한 귀족 집안의 딸이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난한 사람처럼 옷을 입었고, 한 끼조차 얻어먹지 못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런 글라라에게 프란치스코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는 필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211년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화되어 자신도 프란치스코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귀족의 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중에 하나였습니다. 자기와 같은 귀족 집안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베네딕도 규칙을 따르는 여자 수도원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글라라가 선택한 것은 결혼도 아니었고 자신이 받아야 할 유산을 가지고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 섭리에 의지하는 프란치스코적 가난의 삶이라는, 그전에 여자 수도원에는 없었던 새로운 수도 생활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녀 글라라는 중세의 신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성들도 이른 시기부터 수도 생활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독립된 여자 수도원장이 생긴 것은 글라라 성녀 때에 와서야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을 세웠을 때 자기 동생인 스콜라스티카가 근처에 머물며 수도 생활을 하였다고 나오지만 이것은 독립된 여자 수도원이 아니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을 따르며 남자수도원의 하부 조직에 놓여 따로 모여 사는 여자 공동체였으며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삶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봉쇄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림 설명 : 성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콜라에서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로 글라라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있다. (글라라 대성당에 있는 '글라라의 생애' 판화 일부)
그림 설명 : 아버지와 친척들이 글라라를 끌고 가려고 할 때 글라라는 제대포를 잡고 자신의 자른 머리를 보여주고 있다. (글라라 대성당에 있는 '글라라의 생애' 판화 일부)


글라라는 1212년 성지주일인 3월 18일 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에서 도망쳐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머물고 있었던 포르치운콜라로 내려와 머리카락을 자르고 귀족의 옷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고 회개의 표식인 누더기 옷을 걸치는 착복식을 하였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립된 여자 수도원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바스티아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에 거쳐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곳에서 글라라는 자신의 하느님께 향한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글라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큰딸이 지난밤 저지른 행동에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글라라가 있던 베네딕도 수녀원으로 찾아와 딸을 강제적으로라도 끌고 가려고 하였지만, 글라라는 완강하게 제대포를 붙잡고 자신의 잘린 머리카락을 보여주며 하느님의 사람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여동생 아녜스도 언니 글라라를 쫓아 수녀원으로 도망을 칩니다. 이때 아버지는 둘째 딸마저 잃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데려와 끌고 가려고 하였지만 성녀의 기도로 아녜스의 몸은 돌처럼 무거워져 움직이지를 않았고 친척이 아녜스를 때리려고 할 때는 그 팔이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동생 아녜스도 성녀 글라라를 따르는 첫 번째 영적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림 설명 : 글라라 성녀의 기도로 동생 아녜스의 몸은 돌보다 무거워졌고 친척이 때리려던 손은 허공에 멈춰졌다.  (글라라 대성당에 있는 '글라라의 생애' 판화 일부)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은 채 일 년도 가지를 못했습니다. 글라라가 생각한 삶은 이미 정형화되고 안정되어 풍요한 삶을 사는 베네딕도 규칙을 준수하는 여자수도원의 수도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글라라는 아녜스와 자신을 따르는 자매들과 함께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듯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 말씀으로 미리 고쳐놓은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옮기게 되었고, 프란치스코가 써준 복음적 가난 정신으로 바탕이 된 생활양식 (Formula vitae)을 따르며 새로운 수도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네딕도의 규칙이 아닌 고유의 회규로 태어난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생활양식이 교황의 인준을 받은 규칙서는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처럼 살기를 원했던 글라라였기 때문에 프란치스코가 적어준 기본 생활 규칙으로도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도와 수도 생활에 더 적합한 회규에 대한 인준을 교황청으로부터 받기를 원했지만 그 시기에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선은 모든 여자 수도원들이 베네딕도 규칙 외에 고유한 규칙서를 써본 적도 새로운 규칙서에 대한 필요성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메니코 수도회를 인준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더 이상 새로운 수도회 인준은 없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혹여 새로운 수도회가 생긴다고 해도 새로운 규칙서를 만들 수 없도록 하였고 기존에 있던 규칙서 즉, 베네딕도 규칙서를 사용해야 한다고 정하였습니다.


글라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들의 수도 생활에 맞는 규칙서 인준을 받으려 시도했지만 교회에서는 글라라에게만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뒤집고 예외적으로 인준해주기를 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수도회 인준은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입니다. 성녀 살아생전 어려울 것처럼 보였던 글라라회 인준은 성녀께서 임종하기 이틀 전인 1253년 8월 9일 갑작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시기 교황은 페루자 근처에 머물고 있었는데 글라라가 임종 시기가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글라라 회규에 대한 인준서를 적어 보내게 됩니다. 글라라는 이 인준서를 받고 입을 맞추고 기쁜 맘으로 이틀 후인 8월 11일 선종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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