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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석 Jan 01. 2022

극부부도#4. 아내의 이 말 한마디에 결혼을 생각했다

“화내서 결과가 바뀐다면 화낼게”

1.

이삼십 대 초반까지는 주변에서 언제 결혼 상대라는 걸 직감했는지, 왜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건 아마도 지금의 내 아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걸 궁금해할 나이대의 어린 친구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일이 많지 않기에 답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울 지경이다.


지금부터 “라뗀 말이야..” 차원의 글이라는 소리다.


2.

교환학생 신분이던 2006년 3월, 여자 친구였던 아내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난 스페인이란 나라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마치 그녀는 교환학생 기간 동안 반드시 해야 할 리스트에 스페인 여행을 올려둔 듯 했다.

그것도 한 달 동안 일주를 해야 한다고 해 멱살 잡혀 끌려가듯 신발부터 신었다.


그렇게 해서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당시 영국은 저가항공사들의 경쟁적인 출범으로 기념비적인 해였다. 1파운드 여행 가능 시대가 도래했던 터였다.

“점심은 파리 가서 먹을까?”가 농담 같아도 실제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물론 유류세는 별도이나, 유럽 대부분의 도시는 대략 왕복 50파운드 정도로 크게 부담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린 당시 긁어모은 돈이 현금으로 대략 700유로 정도였는데, 호스텔을 전전한다고 생각하면 꽤나 지갑이 두둑하게 느껴졌던 액수였다.


첫날 바르셀로나로 입항했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던져놓고 바로 뛰쳐나왔는데 바르셀로나 하면 92년 올림픽이 떠올라 올림픽공원(?)부터 찾아갔다.


당시 찍은 사진이 없어 구글링으로 가져왔다. 출처: depositphotos


평일 대낮이라 인적이 드물어 관광지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설상가상 갑자기 머리에 어디선가 멀건 국물 같은 게 날아와 쏟아졌다.


머리에 묻은 누런 액체와 건더기들.

손으로 훔쳐 코에 대보니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역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케첩과 식초, 생선 내장 같은 걸 한 데 모아 음식쓰레기로 놔두면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앞에 있던 여자 친구도 “이게 대체 뭐어야아?” 라며 울상이 돼 머리와 이마까지 쏟아진 정체모를 액체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음식물 쓰레기차에 빠진 것 같은 카오스적 상황에 직면했는데  웬 아시아인 여성과 모로코인으로 추정되는 북아프리카계 남성이 배낭을 메고 다가왔다.


“버드. 버드.”

여성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니까 새똥이라고 이게..?

말로만 듣던 거대한 군함조 똥에 맞으면 이렇게 된다는 건가, 아무리 군함조라도 새똥에 머리가 젖을 수 있는 건가? 게다가 이 냄새는 대체 뭔데.


그 커플은 여행용 휴지를 꺼내 나와 여자 친구의 몸과 백팩, 머리카락에 묻은 액체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순간 남성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본격적으로 내 신발과 몸에 묻은 액체를 싹싹 닦아주더니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나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유어 우먼. 유어 우먼.”


이 말에 여자 친구를 보니 과장 좀 하면 영화 ‘캐리’에서 핏물을 뒤집어쓴 것 마냥 온몸이 굳은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거지.


‘아 내가 정신이 없다 보니 얘를 신경 못 써주고 있었구나!’


순간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여자 친구에게 묻은 액체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골골이 파고들어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순간, 그 남녀 커플은 가진 휴지를 다 건네주며 어깨를 들썩여보였다.


“잇츠 오케이. 잇츠 오케이. 저스트 언럭키.”


어수룩한 영어로 말한 뒤 떠나는 이들에게 우린 연신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허리를 숙였다.



3.

열심히 닦아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자 마음이 진정됐다.


씻고 싶은 마음이 텅 빈 공원 안을 가득 채웠지만, 다신 못 올 것 같다는 생각에 기념관까지 가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다면 민폐가 될 수 있어 생각을 바꿨겠지만, 단 한 명도 없었다.

매표원은 안내를 부탁하면 가이드 역할이라도 자처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돈을 꺼내려고 지갑을 꺼낸 순간, 신용카드와 현금 700유로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지갑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뭐라고 나올 것처럼 나는 지갑 구석구석을 쑤셔보다 현기증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표현은 그야말로 빈혈이 있거나, 일사병에 걸렸다든지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보통 수사적인 표현인 줄 알았다. 지금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걸까?


혹시 그 커플…? 우릴 도와주는 척하면서 지갑을 털어간 건가?


액체를 맞은 장소에 다시 가봤다. 우리가 있던 자리엔 희생양들을 향해 뭔가를 흩뿌린 자국들이 바닥에 선명했다. 우리를 향해 던진 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이런 시도가 더 있었는지 건조 상태에 따라 농도가 다른 흔적들이 여기저기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뿌려진 채 남아 있었다.


‘아, 당했다.’


선의인 줄 알았던 그들의 행위가 나를 등쳐먹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에 눈알이 뒤집히는 걸 체험했지만, 그걸 선의라고 믿고 당한 내 자신은 더 혐오스러웠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아는 이들을 비꼬아 ‘호이가 반복되니 둘리인 줄 안다’라고 하던데, 내 경우는 ‘호이에 속아 넘어간 고길동’이었나.


괴성을 지르며 돌멩이를 하나 주워 들고 그 커플이 걸어간 방향으로 뛰어갔지만, 찾을 길은 없었다.


4.

이번 여행은 망했다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한 푼도 없는데, 대체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여자 친구는 지갑을 가방에 넣고 있어서 안 털렸지만 그녀에겐 잔금 1파운드 정도 남은 은행카드 한 장 밖에 없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혼자 씩씩대다 여자 친구를 쳐다봤다.


그녀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 기준에선 이상하리만치 태연해 보였다.


“넌 화 안 나?”

“당연히 화 나.”

“그런데 왜 화 안내?”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녀가 말했다.


“화를 내서 벌어진 일을 없던 것처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면 화낼게. 그런데 바뀔 게 없다면 일단 진정하고 잊는 게 낫지 않아? 여행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렇다. 그녀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우린 여행 동안 노숙도 자주 했다. 하지만, 노숙도 같이 하면 재미있었고 지금은 추억이다.


앨도스 헉슬리는 말한 바 있다.


“Experience is not what happened to a man, it is what a man does with what happens to him.”


단순히 일어나는 일들이 경험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고 반응하는지가 경험이라는 것.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에도 지혜롭게 대처할 줄 아는, 적어도 마음만은 단단한 사람이었다. 결혼이라는 인간 삶의 중대사를 함께 해야 할 파트너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다른 한 편에 기대고 답을 요구한다면 둘 다 피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로부터 배운 레슨은 꼭 부부관계에서가 아니라 사람이 성장하는 하나의 토대였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었을 뿐, 실천은 쉽지 않다, 지금도.

다만, 하나는 확실히 안다. 아내가 내게 화를 낼 때는 나의 행동이나 생각 등에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분명 뭔가 잘못됐는데 아무런 화도 내지 않는다면, 이건 더 문제라는 것.


나에게서 개선의 가능성을 보지 않는다는 의미일 테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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