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할 수 있다는 자유에서 오는 기쁨
“우리 직업에는 승진이란 게 없어요.”
“연봉도 오르지 않아요.”
이 말은 이십 대였던 통역대학원 시절, 학교에서 마련한 <선배와의 만남>에서 들은 이야기다. 선배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통역사라는 직업에서의 '자리'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나와는 상관없는 아주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어느덧 선배의 말이 실감되는 연차에 다다랐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협업했던 대리나 과장이었던 분들은 이제 부장이나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에 비해 나는 여전히 ‘통역사’다.
외국계 기업에서 처음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내 연봉은 과장, 차장급의 수준이었다. 그 후 공기관에서 일했을 때는 연봉이 낮아질 때도 있었고, 프로젝트 통역을 하면서 공기관 연봉의 두 배 이상을 벌 때도 있었다. 그간 프리랜서 업계 표준 요율이 한 두 차례 올랐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체감적으로는 예전보다 낮아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일이 많으면 얼마든지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기업 임원처럼 수억 원 이상을 버는 일은 흔치 않다. 프리랜서로 일하니 4대 보험도 물론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역사로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만족을 넘어 흡족하다.
#외재적 vs 내재적 동기
승진이나 연봉보다 중요한 것은 일에서 얻는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였기 때문이다.
흔히 승진과 연봉을 성공의 척도로 삼기도하지만, 직함과 통장에 찍히는 월급은 어디까지나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외재적 동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오래, 잘하기'위해 서는 외재적 동기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남부러운 직장에 다니면서도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내재적 동기'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좋은 기업은 '성장기회', '다양한 성취 경험', '인정과 칭찬', '자율근무'같이 주도성이 발현될 수 있는 근무 여건 조성 등 '내재적' 보상에도 큰 관심을 기울인다. 아무리 화려한 직책을 가졌거나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해도, 하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결코 만족스러운 삶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적 동기'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자 다니엘 핑크는 <드라이브: Drive>에서 세 가지를 내재적 동기의 핵심 요소로 꼽았다.
자율성 (Autonomy), 숙련 (Mastery), 의미 (Purpose)
자율성 (Autonomy)
자율성은 내가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할 수 있다는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내가 맡은 일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방식으로 해낼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누구나 큰 만족을 느낀다. 특히, 통역사라는 직업은 매번 다른 사람과, 다른 주제와 마주하게 된다. 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매일 새롭고 다양한 도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일에 대한 몰입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맡은 일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그 불확실성이 바로 이 직업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율성이 주는 가장 큰 보상은 내가 주체가 되어 그 과정을 이끌어 가는 데 있다.
숙련 (Mastery)
숙련은 내가 점점 더 능숙해져 가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이다. 통역의 길은 언제나 도전이다. 어려운 주제와 상황을 맞닥뜨릴 때면 중압감도 느껴지지만, 그 중압감을 통과하면서 더 강해질 수 있기도 하다. 더 나은 통역사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서 값진 경험이다. 표현의 전달을 넘어서, 각 주제 영역에 대해 공부하며 단어와 문장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살리기 위해 노력할 때마다 능력이 확장되고 있다는 순도 높은 기쁨을 느낀다. 숙련의 과정은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여정으로, 배우는 과정을 즐긴다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전문성은 빛을 발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느껴지는 '숙련의 감각'은 어느 분야든 그 일을 계속하고 싶게 만든다.
의미 (Purpose)
일을 하다 보면 언어를 넘어 각자의 고유한 문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결이 느껴진다. 내가 맡은 일이 다른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돕고, 그들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는 사실에서 책임감을 느낀다. 때로는 한 사람의 삶, 기업 나아가 한 나라의 명운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몇 년 전 총 1조 원이 달려있는 프로젝트 계약 건을 통역했다. 수차례 기술 및 재무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양측 변호사들이 면밀하게 계약 조건을 따졌다. 내 통역 하나하나가 계약 성사 여부를 가를 수 있을 만큼 민감한 논의였다. 다행히 계약은 성사되었고, 프로젝트는 한창 진행 중이다. 때로는 절박한 상황에서 내 목소리를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진심을 전해야 하는 순간도 온다. 그럴 때 우리 일이 단순히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진심으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에게 일이란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자율성, 숙련, 의미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될 때, 일은 매일 의미 있는 도전과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역량을 확장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을 넓히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바로 이 일 속에 담겨 있다. 승진이나 연봉 같은 외적인 보상이 없어도,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 그 자체로 얼마든지 충만할 수 있다.
표지사진: Unsplash의 Karly Santi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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