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영화 '세계의 주인' 후기, World of love

by 양소유

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주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주인은 18살 고등학생이다. 태권도를 배워서인지 에너지와 활기가 펄펄 넘치고, 농담과 장난을 잘하고, 핑크색 후드 집업을 즐겨 입으며 엄마, 남동생과 함께 산다. 요즘 가장 고민인 것은 수시로 바뀌는 남자친구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연애, 쉽게 정해지지 않는 진로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주인의 활기는 범상치 않다. 남자친구와 정신없이 빈 교실에서 키스를 하다가 교실로 돌아오더니, 수업시간에도 장난치며 여기저기 부딪히고 사과하느라 정신이 없다. 학예회를 준비하는 발랄하고 말 안 듣는 남동생, 술을 좀 많이 마시는 게 탈이지만 다정한 엄마, 제 갈 길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씩씩하고 사랑이 많은 주인. 보편적이고 따뜻하며, 가끔은 힘들기도 한 일상.

영화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는 게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먼 곳에서 울리는 종이 귀보다 어깨에 먼저 닿을 때처럼, 우리는 평화로운 장면 사이사이에서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주인이 동그랗고 빨간 사과를 사로잡힌 듯 응시할 때, 엄마의 힘겨움을 다정한 남매가 말없이 비워줄 때, 수호가 붉게 욕설이 적힌 계단을 밟아 내려가고 동생의 목에 난 상처를 바라볼 때. 예감은 빗나가지 않고 우리는 누구보다 먼저 주인을 설명할 길을 찾느라 저도 모르게 머릿속이 바빠진다.

피해자가 겪는 불합리한 시선들에는 정말 피해자가 맞는지에 대한 적의 어린 검증, 완전히 무고해야 한다는 결벽, 미숙했던 대응에 대한 질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가장 오래도록 뼈아픈 것은 아마도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피해자가 겪는 그 모든 시선을 여실히 체험한다. 주인에게 이유 모를 쪽지를 보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 곁을 든든히 채우던 친구들마저 주인의 과거와 현재를 따져 묻느라 여념이 없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면서도 우리의 머릿속에선 비슷한 가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주인이 태권도를 배우는 것과 남자친구를 끊임없이 갈아치우는 것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일까. 함께 봉사를 하는 간호사 언니는 참사 희생자들처럼 누군가를 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치유하고 경제적 독립을 얻었을까. 미도 언니가 겉으론 떵떵 소리를 지르면서도 접객 대신 요리만 하길 택한 건 아직 괜찮지 않아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추측이 모두 틀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이 돌잡이로 태권도 도복을 잡은 영재이고 다가오는 마음에 약해서 일지도, 간호사 언니는 성적 맞는 대학에 몽땅 지원했는데 때마침 간호학과에만 철썩 붙어버렸는지도, 미도 언니는 타고나길 요리에 맞는 손인데 뒤늦게 제 능력을 알아챘는지도. 아니면 이 모든 가능성과 가설들이 몽땅 다 맞거나 틀렸을지도 모른다. 결국엔 전부 다 모를 일이다.

큰 아픔과 상처를 입었으므로 응당 처량하고 아픈 구석이 그 사람 안에 남아 있으리란 짐작, 그래야 한다는 멋대로의 합의, 그럼에도 너무 오래 슬퍼하거나 과한 처벌과 보상을 바라선 안된다는 불합리. 그러니 주인이 어쩔 줄 모르고 감정을 폭발해 냈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것은 주인의 탓이 아니다. 주인에게 있었던 일이 주인의 탓이 아닌 것처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 세계의 주인은 누구인가. 영화의 주인공이자 괜찮아졌다가, 아니길 반복하는 주인일까. 속앓이와 울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주인을 사랑하는 주변인들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며 간담이 서늘해졌다가 울고, 웃고, 박수를 쳤던 우리일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주인을 정하기 어렵다면 사실 누구의 것도 아닌 게 아닐까? 모든 것에 꼭 주인이 정해져 있어야 할까?

세계의 주인이 나라면 이 세상은 얼마나 버겁고 어려울 것인가. 내가 내리는 결정은 얼마나 신중하고 숨 가빠질 텐가. 우리는 모두 의도치 않은 산과 돌풍을 만나고 뜻하지 않은 만남과 사건을 겪는다. 그러니 세계의 주인이 있다면 단 하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단 하나의 공평함, 의도치 않은 모든 운명과 우연들, ‘불의’야 말로 세계의 주인이 될 테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서 태연해졌다 아니길 반복한다. 왜 하필 나였냐며 억울해하고, 모두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음에 탄복하고, 타인의 행운과 불운을 지켜보다가 나 또한 또 다른 미지수의 사건에 빠진다.

불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 대항하고 싸우고 굴복하는 법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에 나와 있다. ‘World of love’, 바로 사랑이다.

수호가 끈질기게 서명을 요구한 것은 주인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주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주인과 엄마가 해인(동생)의 마술쇼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해인이 보잘것없어서가 아니다. 물론 이들이 겪었던 과거야말로, 더더욱 응당 그럴만한 전생의 업보가 있어서 겪게 된 일이 아니다.

모든 일은 의도 없이 일어나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장면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현명한 일은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장면을 모두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사춘기 시절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는 류의 착각에 불과하다.

잘 되지 않는 연애를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뻗어보는 끈기,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고함을 지르다가 꼴깍꼴깍 찬물을 받아 마실 용기, 자신을 망친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무진 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우연과 필연의 소용돌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태도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품어주려는, 아프면 아프다 외치고 사랑하면 사랑한다 말할 줄 아는 대범함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불의에 저항해 또 다른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18살에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주인은 그러니 얼마나 사람다운 사람일까. 주인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것을 숨기지 않아서,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내내 웃다가 울음 짓기를 반복했다. 주인은 끊임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이름 모를 누군가를, 주변인과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모두 구한다. 그러니 ‘사랑’을 진로 희망으로 적어내는 주인에게, 그 용기와 생명력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낼 수밖에.

좋은 장면이 많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압도적이었던 세차장, 모두의 목소리로 바뀌어 울리는 편지, 수술 끝에 눈을 뜨자마자 딸의 손을 꼬집어 확인해 봐야만 풀리는 애정 어린 원망, 무엇보다 다시 걸어갈 용기를 북돋아 주는 메시지.

재잘대는 활기. 서로의 곁이 되어주고 날개가 되어주는 사랑. 우리는 모두 사랑하며 씩씩하고 온화할 권리가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사랑하고자 애써야 할 의무가 있다. 영화를 본 모두가 행복하고 위로를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좋고, 이 좋은 걸 나만 아는 게 억울할 지경이라 글로 남겨봤다.


제발 많은 사람이 봤으면!!




작가의 이전글낯이 부끄럽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