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크 쉘터(2011)

영화 내용 스포일러 포함

by 마법거북이

사전에선 'shelter'에 두 가지 뜻을 제시한다. 거주지로서의 쉘터와 피난처로서의 쉘터. 집을 보살피고 가꾼다는 건 당연한 일이겠으나 피난처를 보살피고 가꾼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테이크 쉘터(2011)라는 제목이 향하는 건 당연히 후자다.

불안에 시달리는 주인공 커티스는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는 쉘터에 집착한다. 그의 불안은 지켜내지 못한 딸의 잃어버린 청력에서 비롯된다. 모종의 사고로 인해 장애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딸을 두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악몽을 꾼 다음날이면 꿈에서 본 대상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계속되는 강박적 불안에 시달리는 그가 피난처로 삼은 곳은 지하실이다. 비좁은 지하실에서 그는 영화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숨을 내쉰다.

지하실 만으론 부족했던 그는 다가올 무언가에 대비한 쉘터를 직접 마련하기로 한다. 언뜻 보면 딸의 귀에 사로잡힌 그가 구멍을 파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정말 그를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다.


'테이크 쉘터'의 커티스에겐 근본적 불안이 있다. 그는 미지의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런 강박에도 강박을 느낀다.

그에겐 조현병을 앓았던 어머니가 있다. 괜한 걱정은 아닌 것이 조현병에는 유전적 요소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아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일종의 트라우마나 마찬가지이기에 그는 현재 자기의 나이가 어머니가 발병했던 나이와 같은 35세임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불안과 강박을 파고 들수록 일은 도리어 꼬여만 간다. 쉘터를 만들기 위해 직장의 기계를 몰래 사용하다 들켜 해고되기에 이른 그는 직장 보험을 통해 딸의 청력을 다시 되살리는 수술마저 위험에 처하게 만들면서 아내와의 갈등도 최고조에 이르고, 친했던 친구와의 갈등, 마을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 속에 그 누구의 이해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선다.

광기에 젖은 커티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올 폭풍을, 거의 종말에 가까운 무엇을 예언했을 때, 거짓말처럼 폭풍이 온다. 커티스가 공들여 지은 쉘터는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 가족은 무사히 폭풍을 지나 보낸다.

아직 폭풍이 완전히 지나간 것이 아닐지 몰라 불안에 떠는 커티스에게 단호한 태도로 스스로 문을 열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드디어 커티스는 자신의 손으로 쉘터의 문을 열고 밝은 햇살을 본다. 부부는 서로를 끌어안는다.

끝.


여기서 끝이 난다면 진진한 드라마가 되겠으나 영화는 여기에 사족처럼 두 장면을 더한다.

커티스는 아내와 함께 정신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는다. 그는 결국 어머니처럼 입원치료를 받기로 한다. 여기서 끝이 난다면 비록 조금 잔인할지라도 사실적이면서도 작은 희망을 제시하는 드라마가 될테다.

영화는 여기서 한 장면을 또 한 번 더해 이상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입원하기 전, 영화 중간에도 몇 번 언급됐던 휴가를 떠나는 이들 가족. 이곳에서 커티스가 계속 시달려 왔던 갈색 물이 떨어지는 폭풍을 함께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를 통해 가족이 커티스의 지난 과거처럼 이별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이건 해피 엔딩일까? 어쩐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휴양지가 낙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이상한 해피 엔딩에 대해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어느 방송에 나온 정신과 전문의는 공유 정신병이란 견해를 제시했다. 덧붙여 그의 망상이 가족에게 공유되고 있으니 이제 커티스 가족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나아갈지 모른다는 진단을 내린다. 그의 말을 따르면 영화의 엔딩은 당연히 해피하지 못하다.


질리도록 커티스의 내면에 집중하는 영화에서 정작 불안의 정확한 근원은 분명하지 않다. 물론 딸과 어머니의 문제가 있지만 왜 이들 과거의 문제가 오지 않은 미래를 나서서 앓는지를 밝혀주진 않는 것인데, 이는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꿈에 나온 대상을 현실에서 마주칠 때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 대상은 개, 동료 등으로 매번 바뀐다. 즉, 그의 불안의 구체적인 대상은 꿈에 의해 비롯되고 논리가 없는 꿈에는 이유도, 치료 방법도 없다. 그렇기에 그는 그 원인을 본인의 내력에서 찾는 것일 테고. 다시 말해 전사에 해당하는 딸과 어머니의 문제는 불안을 증폭시키는 존재일진 몰라도 불안의 직접적인 고리는 아니다.

영화가 보여준 것만을 바탕으로 다시 영화를 들여다 보는 일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라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유를 모를 불안이 정말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커티스의 까닭 없는 불안을 단지 정신병으로만 치부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실만을 보여준 채 곧바로 영화가 끝을 맺는다는 사실이 주어진다.

마지막 폭풍이 이전의 폭풍과 다른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그것을 딸이 먼저 발견한다는 데 있다. 딸과 함께 모래성을 짓는 일에 집중하느라 해변을 등지고 있던 커티스에게 딸이 수화로 폭풍이 다가옴을 알린다. 이어 실내에 있던 아내가 밖으로 나와 다가오는 폭풍을 본다. 언제나 커티스가 혼자 보곤 했던 폭풍과 같이 갈색 물이 떨어지고, 그 물은 아내의 손에 떨어진다. 이 실물감은 그만의 상상이라고 치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오직 그 혼자만이 보았던 폭풍을 처음으로 그가 아닌 다른 존재가 확인하는 순간에 끝나버리니 앞으로 이들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하는 건 무의미하다. 커티스 가족이 정말로 망상을 공유할 것인지도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이들이 무슨 노아의 방주가 될 것도 아니오. 그저 탈주, 최소한 이탈했을 뿐이라는 사실, 그것이 전부다.


어디서 어디로의 탈주인가, 커티스 가족이 향한 휴양지에는 가족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씬은 애초에 주변을 보여줄 생각이 없어서 폭풍이 다가오는 해변을 보여주기 위한 단 한 컷을 제외하곤 모두 세 인물의 타이트한 숏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면 남은 질문은 어디로부터의 탈주인가일 테다.

영화에 나오는 그의 악몽은 총 세번이다. 폭풍이 다가오는 중에 기르던 개에게 물리는 꿈, 폭풍이 다가오는 중에 차 안에서 사고를 겪고 이어 괴한에게 습격을 받는 꿈, 폭풍이 부는 집밖에 동료가 서 있는 꿈. 동료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진 않지만 집이 흔들리며 모든 가구가 중력을 잃는다.(베르누이의 원리, 너무 강한 바람이 불면 바깥의 기압이 낮아져 바깥에 비해 건물 안은 현저하게 기압이 높아진다. 이 기압차로 인해 집은 폭발하듯 터져버리는데, 토네이도가 불면 지붕이 날아가고 집이 통째로 들려 날아가는건 바로 이 원리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집은 멀쩡하면서도 집 안의 모든 가구가 날라가고 커티스는 제트기라도 탄 듯 무언가를 견뎌내는 모습이다.)

폭풍은 반복되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는 건 다양하다. 알 수 없는 타인, 기르던 개, 불가사의한 힘. 이 위협은 변화하며 그의 주변에서 일반적으로 안정을 기대할 만한 것들의 힘을 잃게 만든다, 기르던 개가 자신을 물고 차는 힘없이 부서지며 집이 중력을 잃는 식으로.


사전에서 제시하는 'shelter'의 두 가지 뜻. 거주지로서의 쉘터와 피난처로서의 쉘터. 그에게 집은 이제 거주하는 장소가 되어줄 수 없다. 집이 더는 안전하다는 감각을 제공해주지 못하기에 그는 구멍을 파내려간다.

감독 본인의 언급에 의하면 결혼 이후 가장으로서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 사회 전반의 위기와 정부에 대한 불신등이 겹치며 커티스와 본인을 동일시했다고 한다. 이런 감독의 언급 때문인지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무렵, 경제적 파산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으로 커티스의 불안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사실 우리가 아무리 과거에 무언가를 겪었다 해도 그것이 미래에 또 오지 말라는 법, 그것을 이번에는 잘 이겨낼 거라는 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떠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불안이란 원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그가 느끼던 이 해답이 없는 불안 덕택에 그는 꿈을 꾸고, 꿈이 현실에서 망상으로 전이되고, 폐허의 낙원(타인에게는 다가올 폭풍이 탈출구가 될 수 없기에 낙원에는 커티스 가족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처럼 보이는 피서지에서 다가올 폭풍을 맞이하는 것으로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던 탈주에 이른다.

다시 말해 집을 벗어남으로서 역설적으로 과거와는 달리 가족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사의 진단이 맞을지도 모른다. 불안 역시 공유 정신병처럼 전염된다. 그가 내면의 불안을 견뎌내기 어려워 할수록 불안은 밖으로 새어나오고, 이 불안을 감지하는 가족에게도 불안은 조금씩 스며든다. 마지막 장면은 그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거주하는 장소에 더는 의미를 둘 수 없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감독의 말을 떠올려보자면 감독은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그 불안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불안을 만드는 힘은 내가 아닌 외부, 사회에도 존재한다. 출구가 없는 불안은 압력이다.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압력. 사회와 그 사회에 감응하는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 본 감독이 그리고자 한 것은 바로 그것일 테다. 폭풍이란 압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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