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른이니까 당당하게 2천원 치 먹어야지
팔다리며 가슴께에 두드러기가 나 며칠을 괴로워하다 피부과에 갔더니 접촉성 피부염이라고 한다. 음식으로 인한 피부염이라면 온 몸이 가려워야 하는데 특정 부위만 증상이 와서 그렇단다. 음식 때문이 아니라는 말에 신나서 그날로 햄버거 세트에 (그러면 안 되는데) 맥주까지 한 병 마셨다. 어제의 나를 후회하며 오늘은 기필코 밥을 먹어야지, 하다가 곧 생리를 시작한다는 걸 알고는 오늘도 야식을 안 먹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머릿속 먹킷리스트를 룰루랄라 훑으며 뭘 먹지? 뭘 먹어야 만족스러울까? 고심하다 오늘은 염통꼬치, 너로 정했다. 염통꼬치만 단독으로 배달하는 가게는 당연히 없다. 분식집 사이드메뉴에 있는 걸 발견하고는 떡볶이와 함께 시켰다.
분식집이 너무 멀었던 걸까, 다 식어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꼬치를 하나하나 뽑아 먹는 맛이 재미있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가장 옛날인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염통꼬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장마차 안줏거리였다. 살짝 부족함을 느끼며 3개 정도 쏙쏙 뽑아 먹으면 그렇게 감질맛나고 재미있었다. 마음 같아선 다섯 개, 열 개 정도는 사 먹고 싶은데 무식하게 많이 먹는 아이로 보일까 두려워 꼭 3개만 먹고는 동전을 하나하나 헤아려 주인 아주머니에게 건네고 호다닥 학원으로 또는 집으로 향했었다.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은 기억 속 최초의 염통꼬치는 하나에 200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 중학생 시절에는 개당 300원(4개 천원) 정도까지 올랐다. 이 시기에 살던 우리 아파트 근처에는 그 지역 최대 규모의 시장이 있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면 길가에 나란히 서 있는 염통꼬치 가게 세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가게끼리 경쟁이 붙어 3개 500원, 6개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금액으로 염통꼬치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도 소심했던 나는 현장에서 3개 500원을 주고 사 먹은 후 엄마를 졸라 1000원치를 포장해 와 집에서 냠냠 먹었다. 포장마차 음식이 다 그렇지만 당연히 현장에서 먹은 3개가 훨씬 더 맛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제 막 입주를 시작한 신도시였던 옆동네로 이사를 오며 시장표 파격 저가 염통꼬치의 은혜를 더는 입을 수 없었다. 새 동네에서는 염통꼬치는 커녕 노점상이나 포장마차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염통꼬치를 잊고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대학에 가 보니 염통꼬치는 유행 한길가로 밀려났고 그 자리는 브라질산 닭정육으로 만든 대형 닭꼬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창 불닭꼬치가 유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학가 버스 정류장 앞 포장마차에서 불닭꼬치(맵찔이니 폭탄맛은 거르고 순한맛, 데리야끼맛) 먹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역시 손가락 한마디 만한 염통 꼬치를 소심하게 먹던 그 재미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무거운 전공책을 옆구리에 끼고 12센티 통굽 구두를 신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를 흩날리며 양념 뚝뚝 흐르는 커다란 닭꼬치를 처묵처묵 할 수도 없었다. 닭꼬치는 슬그머니 나의 식도락 목록에서 밀려났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염통꼬치를 다시 만난 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후 이제는 구도시가 된 우리 동네 홈플러스 뒷쪽 출구(=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 출구)에 자리잡은 두 대의 포장마차 트럭에서였다. 3개 천원. 이번에도 3개밖에 못 먹는 걸 한스러워하며 당시 홈플러스 문화센터에서 배웠던 필라테스나 비누만들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 먹곤 했다. 운동을 마친 후 저녁 아홉시 남짓이라는 늦은 시간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 서른 남짓이 되어서야 꼭 3개만 먹을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6개씩 2000원을 내고 사 먹었다. 이것이 어른의 뻔뻔함이고 품격이라는 것이군. 진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캠핑 준비를 할 때쯤에는 염통 꼬치 부위를 식자재마트나 정육점에서 20개씩, 30개씩 냉동제품으로 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도 먹는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20개씩 먹으려고 사기는 좀 그래서 결국 사지 못했다. 그렇게 또 한동안 염통 꼬치를 잊고 지내다가, 평생 잊지 못할 염통 꼬치와 딱 한 번 만났다.
이제 두 살 또는 세 살 남짓한 딸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엄마와 서문시장에 갔을 때였다. 둘 다 쇼핑엔 젬병이고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는데 그날은 모처럼 옷 구경이나 하러 가자고 의기투합을 했다. 계단 밑 국숫가게에서 국수부터 한 그릇 말고 정말 오랜만에 폭풍(처럼 빠르게) 쇼핑을 한 다음, 우리는 길거리 음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문시장 길거리 음식이야 전국구 수준이니 너무 휘황찬란해 고르기가 어려운 게 문제다. 먹을거리를 즐기자고 다짐하고는 고르지를 못 해서 아이쇼핑만 실컷 할 판이었다. 만두, 호떡, 어묵, 꼬마김밥, 떡볶이, 튀김, 순대, 부침개, 찐빵... 염통꼬치를 발견했다! 얼리지 않은 염통꼬치를 철판에 토치까지 동원해 구워서 소금을 살살 뿌려 준단다. 우리 엄마 입맛은 모르겠고 일단 저기로 정했다. 일곱 개 3천원. 엄마 앞에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차마 혼자 3천원치를 다 먹고 싶다는 말도 못하고 염통꼬치 일곱 개를 3대 4로 나눠 먹은 후 추가 단독 주문이 가능한 구운 치즈도 주문해 냠냠 해치웠다.
철판에 지글지글 구워 토치 불맛을 쉭쉭 입히고 소금까지 솔솔 뿌린 고기가 뭔들 안 맛있겠냐먄, 그 소박한 한입거리를 차마 일곱 개 다 혼자 먹지 못하는 소심한 내 마음 때문에 매번 갈 수도 없는 곳에서 정말 오랜만에 엄마랑 단둘이, 한 손에 터질 듯 무거운 비닐 봉지를 들고서 아껴 아껴 먹는 세상 소중한 염통 꼬치는 참 맛있었다. 좀 더 어른의 품격이 느껴질 마흔이 되면 이번엔 혼자 서문시장에 가서 3천원치를 다 먹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그 염통꼬치 가게가 부디 번성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