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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Nov 15. 2022

금요일 밤의 회동

영롱하고 우아한 우리들의 교집합

금요일 오후가 되면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거나 이미 카톡이 도착해 있다. 오늘 저녁, 정확하게는 야식으로 먹을 메뉴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재우러 갈 때쯤 배달 어플로 주문을 하면 시간이 얼추 맞다. 마침내 아이가 잠들고 조심조심 거실로 나올 때쯤 음식이 도착한다. 우리의 금요일 야식 메뉴는 주로 치맥이었다. 맥주를 좋아하는 나와 치킨을 좋아하는 남편의 교집합이 바로 치맥이었기 때문이다. 후라이드, 핫후라이드, 양념, 간장, 반반, 새로 나온 메뉴까지 질릴세라 참 다양하게도 시켜 먹었다. 다앙한 건 맥주도 마찬가지여서 그때그때 세계맥주가게, 편의점, 마트, 집 앞 슈퍼에서 사온 캔맥주들을 한 달 가까이 김치냉장고에 식혀 맛깔나게 곁들일 수 있었다.



2년 전 이 집으로 이사를 올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전망이었다. 우리는 이 동네 아파트 중 드물게도 앞이 탁 트여 도로와 건물과 산과 하늘을 모두 볼 수 있는 이 집을 선택했다. 식구라고 해봐야 딸랑 셋 뿐인데 굳이 6인용 식탁을 사서 거실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놓고 예쁜 스탠드와 꽃병을 두었다. 커피를 한 잔 하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남편과 나란히 앉아 술 한 잔 하기에도 딱 좋았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소파 앞에 앉은뱅이 탁자를 펴고 알집매트 위에 앉아 유튜브를 시청하며 닭다리를 뜯고 맥주를 마셨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나 무릎이 나온 바지가 이 때와 곳에 가장 맞는 옷차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인간미를 풍기며 한 주 동안 공먼지처럼 뭉친 스트레스를 날리고 안락하게 불금을 즐겼다. 지극히 말초적인 시간이었으며 둘 사이의 대화는 없었다.



남편은 토요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소화불량을 호소했고 나는 남편과의 대화 부재로 우울함에 빠졌다. 그러다 친구들과의 단체카톡방에서 누군가 오늘 이걸 먹었다며 올린 회 사진을 봤다. 날것 특유의 싱싱함과 깔끔함이 생각나는 사진이었다. 나는 흰색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남편은 유별나게 회를 좋아하는 시아버지의 입맛 덕분에 회에 질려 있었으나, 우리는 이미 치맥에 질릴 대로 질려 있었으므로 이번엔 치킨 대신 회를 주문하기로 했다. 다만 우리에게 영감을 준 흰색 회 대신 붉은 회를 주문하기로 했는데, 이것 또한 흰색 회를 좋아하지 않는 나와 흰색 회에 질린 남편의 교집합이 들어맞은 탓이었다. 금요일 오후 각자 업무는 제쳐두고 카톡에서 만나 어디에서 어떤 세트를 조합해 시켜야 하나 머리를 맞댄 끝에 우리는 <OOO참치>의 연어+참치 반반 스페셜 세트를 주문하기로 했다. 붉은 회에 맥주를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맥주의 풍만함(과 더부룩함)에도 어느 정도 질려 있었으므로 다른 술을 고르기로 했다. 여기에서 우리의 취향이 완전히 갈려 교집합 찾기에 실패했다. 남편은 좋아하는 소주보다는 편안하게 마실 수 있다며 백세주를 선택했고 나는 도수가 높은 술 특유의 알콜 냄새를 싫어해 달짝지근한 매화수를 선택했다.



오늘도 무사히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살그머니 나온 남편과,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관문 앞에서 배달기사를 기다려 연어+참치 반반 스페셜 세트 비닐봉지를 받아온 나는 이 비닐봉지를 어디에 풀 것인지를 잠시 고민하다 오늘도 역시나 유튜브를 곁들이기 위해 소파 앞 탁자를 택했다. 우중캠핑 유튜브 영상이 흐르는 텔레비전의 빛을 조명삼아 우리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지 않고 각자 술을 따라 마셨다. 뜻밖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회를 한 점 넣으려면 김도 깔아야 하고 무순이나 양파채도 깔아야 하고 와사비도 조금만 떼서 얹어야 하며 미끄덩거리는 회가 빠지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잘 잡아 들어 올려야 한다. 백세주건 매화수건 술잔이 작으니 부지런히 잔도 채워야 한다. 속도가 나지 않으니 입 안에 빈 공간이 생기고 우리는 그제서야 조금씩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 딸, 회사, 학교, 중학교 아이들, 거래처 사람들, 부모님과 집안 행사, 그리고 다시 우리 딸 이야기를 나누며 취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바쁘기만 한 하루를 실감했지만 스스로가 우울하거나 피로하거나 불쌍하지는 않았다.



닭고기의 기름기와 맥주의 탄산에만 흠뻑 젖어 살다가 비리고 기름지고 톡 쏘고 맛에 취기를 조금씩 끼얹으며 금요일 밤을 보내니 그 나름대로 복합적인 재미가 붙었다. 그 다음 주 금요일 밤에는 무엇을 시켜 먹을 것인지, 우리의 고민은 조금씩 다양함을 더하기 시작했다. 타코나 피자에 와인을 곁들이기도 하고, 초밥으로 배를 채우며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와인은 아무래도 소파 바닥에 등을 기대 마시기 좀 그렇다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식탁으로 옮겼다. 반짝반짝 빛나는 야경을 바라보며 우리가 왜 이 집으로 이사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조명 겸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 재즈를 틀고 디캔딩도 맛도 모르지만 와인잔을 돌려 가며 함께하는 금요일 밤은 우리가 봐도 썩 우아하고 멋진 시간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식탁 의자에서도 반은 양반다리로 앉아 있는 주제에 괜스레 목소리 톤이 낮아지고 작고 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숙취도 소화불량도 한결 덜한 것 같았다. 



청소나 빨래 등의 집안일은 잘 하지만 요리엔 젬병인 남편이 왠일로 퇴근길에 마트와 과일 가게에 들렀다 오겠다더니 내가 아이를 재우는 동안 주방에서 뭔가를 뚱땅거린다. 드디어 배달 음식에서 벗어나나 했으나 벨이 울리는 걸 보니 오늘도 뭔가를 시킨 모양이다. 겨우 아이가 잠들고 조심스레 거실에 나오니 오늘은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단다. 살짝 서늘한 공기는 미리 틀어뒀을 재즈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식탁 위에 이미 향수병을 닮은 양주 두 병이 나란히 줄을 서 있다. 그냥 서 있는 주제에 가을국화를 꽂은 꽃병과 블루투스 스피커 스탠드와 식탁 스탠드와 함께 넓고 휑한 식탁을 그럴듯하게 꾸며준다. 남편이 시나몬스틱과 자몽 한 조각을 넣은 온더록스 두 잔을 내 온다. 손목을 돌려 가며 유리잔 속에 얼음이 녹는 소리가 우아하다. 우리 둘 뿐이라 조용하고 방 안에서 우리의 아이가 새근새근 잠자고 있을 테니 더 좋은 금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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