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토요일 저녁, 남편이 알고 지내는 같은 아파트 형님 가족을 초대했다. 이미 남편이 두어 번 아이와 함께 그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아이는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언니랑 재밌게 놀고, 남편도 술과 안주를 얻어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었다. 한 번은 초대해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드디어 그날을 맞이했다. 안주는 배달 음식으로 때우기로 했다. 주전부리도 필요하니 종종 배달 주문하는 동네 과일가게에 손질 과일과 초당옥수수를 주문했다. 형님이라는 분은 저녁마다 반주로 소주를 드시는 애주가라 하고, 아내분은 가볍게 맥주 한 두잔 정도 드신다고 하길래 퇴근하는 길에 <고래맥주창고>에 들렀다.
유치원에서 아이를 하원시켜 차에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세계맥주가게인 <고래맥주창고>에 처음 발을 디딘 건 순전히 4캔 10,000원짜리 편의점 맥주보다 조금은 싸겠지,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늘 차로 지나가는 곳인데다 맥주가 쉽게 상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갈 때 왕창 사서 김치냉장고에 쟁여 두면 될 것이었다. 역시 4캔에 8천원부터 1병에 5천원까지 시중 마트나 편의점보다 1~2천원 저렴했다.
그러나 편의점이나 마트에 갈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출하고 말았는데, 낱개로 파는 병맥주를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볍고 부드러운 빅웨이브, 가볍지 않지만 상쾌하게 톡 쏘는 풍미가 일품인 인디카, 20대를 함께 보냈던 기린/아사히/삿뽀로(매국노가 될 수 없지만 가끔 땡기는)를 무거운 줄도 모르고 각 4병씩 담아 총 12병씩 사 오니 거진 4만원 가까운 금액을 결재해야 했다. 마음도 무겁고 비닐 봉지도 무겁고 한 병 두 병 홀짝거릴 때마다 내 몸도 무겁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도 무거웠다. 그러나 무거운 대가를 치른 행복은 매우 컸다.
날도 본격적으로 더워지니 오늘은 캔맥주를 한 번 사볼까? 곰표 밀맥주나 칠성사이다맥주 같은 것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와 마찬가지로 스며들듯 맥주 전문가가 된 내 친구 A도 돌고 돌아 결국 곰돌이 그려진 오비라거 330ml 캔맥주만 사서 두 캔씩 딴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귀여운 곰돌이 오비라거 대신 한맥, 테라를 만만하게 취급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이 가게에는 없기도 하고.
초록색이 아닌 칭따오도 보이지만 일단 제친다. 지난번에 사장님이 맥주컵 대신 서비스로 주셨던 벨기에 빨간 라거(이름을 모르겠다. 맛있었는데 다음에 가면 물어봐야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라오 맥주를 담았다. 남편은 총각 시절 남자들끼리 10박 11일로 다녀왔던 라오스 특유의 느긋하고 순박한 분위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가끔 이야기를 꺼낸다. 나른하고 한가로운 동남아의 맥주들은 대체로 가볍고 시원하고 순박한 낫이 날 것이다. 기대되는 마음으로 네 캔을 담는다. 아마 이 라오 맥주보다 조금 더 진한 게 타이의 싱하 맥주, 조금 더더더 진한 게 산미구엘(내 취향 아님)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타이완 맥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이 가게엔 안 보인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식도락 천국이었던 타이완 여행을 떠올려 본다. 망고 맛이었나 파인애플 맛이었나 하는 타이완 맥주도 맛있지만 역시 레몬생맥주나 자몽생맥주나 쏘니니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순정만큼 멋있는 게 없는 법이다. 그냥 초록색 타이완 맥주를 잠시 그리워한다.
편의점에 갈 때마다 항상 가져왔던 에델바이스 대신 스텔라 아르투아 병맥주가 보이니 반갑다. 그것도 담는다. 마찬가지로 편의점에서 갈 때마다 에델바이스와 함께 사 오던 제주페일에일로 시선을 돌리다 사장님 추천 메뉴라는 아저씨 손글씨로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에페스가 보인다. 터키에서 마셨던 파란 에페스가 아니라 잠시 고개를 갸웃했는데 생맥주 맛이 난다고 한다. 일단 4병을 담는다. 남편과 윗집 형님은 소주를 마실 텐데 이 가게의 납품 라인 때문이겠지만 다이아몬드(=부산에서 온 대선소주) 소주만 있어서 그것도 4병 담는다. 일단 열 병은 넘는다. 사장님이 슬쩍 날 보더니 차 가져 왔냐고 물어보신다. 그렇다고 하자 박스에 12캔을 담아주시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한 병 한 병 꽂을 수 있도록 칸이 나뉘어져 있다! 세상에 이거 너무 좋잖아. 다음엔 스무 병을 사서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끙차끙차 카시트 옆에 박스를 실었ㅎ다. 무겁거나 말거나 콧노래가 나온다.
남편은 고든 램지의 팬은 아니지만 카스를 좋아하는데, 나는 도무지 그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 소주 태워 마실 것도 아닌데 카스라니. 그런데 초대받고 온 윗집 언니도 카스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공들여 골라온 나의 맥주 컬렉션이 살짝 아쉬울 지경이었지만 한 병 한 병 친절하게 맥주를 내 드렸다. 집에 상시 쟁여두는 인디카와 빅웨이브를 시작으로 스텔라, 에페스, 라오맥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순서였다. 알콜이 조금 느껴지면서도 맛있는 인디카, 그 바로 뒤에 마셔서 탄산수 느낌이 나면서도 가볍고 부드러운 빅웨이브, 유럽 맥주 특유의 풍성함이 있는 스텔라, 사장님이 추천할 만했던 생맥주st 에페스, 취기가 한창 올랐을 때 가볍게 마무리할 수 있는 라오 맥주까지.
그날의 가족 모임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만취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성공적으로 마쳤다. 다시 주중의 일상으로 돌아가자마자 남편이 퇴근길에 한 잔 하고 싶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아이까지 셋이서 집 앞 통닭집으로 향했다. 옛날통닭과 테라 생맥주를 시켰다. 생맥주면 무조건 맛있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마셔 왔더니 영 만족스럽지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역전할머니맥주가게에 가서 시원함만 즐기다 올 걸 그랬나? 그래도 여름밤 외식이 주는 그 특유의 나른함만은 만족스럽다. 조만간 오비라거 마시는 친구를 소환해 밖으로 나가야겠다. 트렁크에 실어둔 캠핑용 미니 테이블과 의자들이 울기 직전이다.
울고 있는 것이 미니 테이블과 의자 뿐만이 아니다. 텅 빈 김치냉장고도 울기 직전이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을 다독이며 오늘도 방앗간에 들르는 참새처럼 퇴근길에 <고래맥주창고>에 들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