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nothing Oct 11. 2023

참아버린 다정함

나는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어스름이 드리운 거실 바닥은 늪과 같았다. 하얀색 체육복 등판에 땀이 흥건했다. 흰 운동화를 벗고 거실 입구에 발을 살포시 올렸다.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탁자에 올려진 전화기로 달려갔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늦는 엄마가 미웠다. 그때의 집은 늪에 가라 않는 작은 섬 같았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날 끌어당겨 주기를 바랐다. 엄마의 기다리라는 한숨 섞인 말이 기다란 창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퇴근이 늦을 때면 반려에게 전화가 온다. 언제 오느냐는 애교 섞인 한 마디에 한숨이 토해진다. 금방 가. 바쁘니까 끊어. 건조한 한숨 속에는 당장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무력감과 미안함, 또는 내 힘듦을 알아주지 못하는 서운함이 뒤섞인다.


 엄마의 한숨이 귀찮음이나 거절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이따금 불 꺼진 집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누군가의 목소리는 날 외롭게 만든다.


 나의 대부분을 이룬 엄마와 엄마를 닮아가는 나를 생각한다. 사랑과 미안함이 섞인 한숨을 생각한다. 그때 엄마가 한숨 대신 뭐가 무섭냐며 웃음 지었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그때 내가 밉다는 말 대신 울음을 참았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이제는 울음도 웃음도 다정함도 참아버리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참은 사랑을 곱씹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바람이 부는 창문 아래에서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