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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Mar 26. 2024

조사의 계절

  추운 겨울 날, 같이 점을 보러 가기로 한 민정이의 차가 길을 잃어 버렸다.내비게이션 화면의 선을 어긋나버린 그 차는 한참을 돌아와서 내 앞에 섰다. 차를 사야 겠다고 생각한 건 그날이었다. 각종 배차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자, 추위에 벌벌 떨며 기다리는 내 자신에게 주체성을 주고자 했던 결정은 지금까지도 손에 꼽는 잘한 일이 되었다. 특히 손해사정 조사자로서 떠돌아다니는 도로가 즐거운걸 보니 나는 운전과 조사가 천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운전하면서 마주하는 계절은 뚜벅이 시절의 계절과 다르다. 매일 같은 길만 오가는 사무직의 차와 무작위로 경북 전체를 도는 조사자가 탄 차가 보는 풍경도 다르다. 주말이 아닌 그냥 보통날에 보통의 곳을 지나치는 길이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지나가는게 목적인 길인데도 멈춰서 머물러 버리고 싶은 낯선 풍경들이다.


  이른 초봄에 대구 근처 고속도로의 회전램프를 돌다가 모여있는 목련나무를 발견했다. 몽글몽글한 큰 꽃송이가 가느다란 가지 끝에서 흔들거렸다. 대구 시화가 목련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것 같다. 그래서 대구 고속도로 초입에 심어져 있었나보다. 아기 목련을 감싸는 회전램프에서 뜻밖의 계절을 느꼈다. 언제 질지 모르는 꽃이기에 눈에 꼭꼭 담아두고 그 기억으로 다른 계절을 버틴다. 앞산순환도로의 왼쪽이 벚꽃으로 만발했다가 지금은 이팝나무의 흰 제기같은 꽃들이 오른쪽에 만발했다. 남구에는 이팝나무 가로수가 많아서 가는 길마다 눈이 부시고, 라이온즈파크 옆산에는 번식에 성공한 아카시아가 점령했다. 계절에 맞는 색을 두른 향운(香雲)의 길을 기억해 둔다. 계절의 가장 예쁜 순간을 회상하는것도 하나의 재미니까.


  조사하기 힘든 계절은 여름이다. 장마철에는 두꺼운 빗방울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운전하게 된다. 그런 날은 부러 비를 몇방울 묻히고는 고객에게 생색을 내기도 하고, 앞이 안보이는 비를 핑계삼아 졸음쉼터에서 후두두둑 빗소리를 들으면서 서늘하게 선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다 비가 그치면 드러나는 선명한 여름의 하늘색을 올려다 본다. 뜨거움을 머금고 사라지는 태양 곁에 피어나는 더 붉은 노을을 보면 여름이 좋은 순간도 있다.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예천과 슬로우시티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청송이 산소카페로 불리고 싶어한다는것과 9월의 사과나무가 장미꽃처럼 예쁘다는건 몰랐겠지. 계절의 길을 지나가기 바쁘지만 찰나로 보기에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희소한 찰나지만 돌아오는 계절에 또 볼 수 있다는 당연함은 설레임을 준다. 사람에게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설레임을 계절이 매년 채워준다. 직업의 재미가 계절의 목격이라니 아이러니하지만 무료인 자연을 사랑하는 무료하지 않은 조사자가 되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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