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퇴근 이후의 저녁 시간이 부쩍 짧아진 와중에도, 그나마 영업시간 제한이 10시로 완화되면서 오랜만에 선후배끼리 술자리가 열렸다. 사람이 많이 모일 때는 흡연자끼리 특유의 공명(共鳴) 현상을 이용하여 다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만, 이번 여섯 명의 술자리에서 흡연자는 선배 한 명뿐이었다. 그는 그나마 불러내기 편하고 담배에 거부감이 없어 보이는 나에게 구조 요청을 보낸 거다.
"안 피우긴 하는데... 바람도 쐴 겸 잠깐 나갔다 오죠 뭐."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선배와 단둘이 나가 있는 게 불편하거나 간접흡연이 싫어서 변명한 건 아니었다. 정말로 담배를 입에 대어 본 적도 없었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그 구도 자체가 심란함을 불러오기 때문이었다. 그게 왜 그리 불편한 걸까? 선배와 마주 본 채, 들숨에 빨갛게 불타는 담배와 날숨에 어지럽게 퍼지는 연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두 가지의 기억이, 시커먼 겨울밤의 하얀 연기처럼 떠올랐다.
1.
살면서 가장 갑갑했던 시절이 언제냐 묻는다면 주저 없이 중학교 시절 3년이라 답할 거다. 싸이월드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긴, 허세와 중2병에 잠식당했던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애늙은이였던 내 눈에 중학교는 10년 넘게 이어질 피비린내 나는 경쟁의 서막이 올라가는 무대였고, 싹트기 시작한 모두의 자아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공간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히 권력이나 계급 비슷한 게 형성되는 하나의 생태계였다.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 속에서, 각자 조악하게나마 생존을 위한 '노선'을 정하게 된다. 누군가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학교에 다니는 편을 택하고, 누군가는 공부, 운동, 게임 같은 능력을 살려서 평판을 유지하고, 누군가는 힘을 과시하고 무리를 지어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열네 살 때만 해도 왜소한 데다 운동이나 게임에도 젬병이었던 나에게는 다행히 공부라는 대안이 있어, 선생님들의 관심과 비호 하에서 소위 '일진'들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Y와는 그렇게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이자 경쟁 상대로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때 나는 Y를 동경했다.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여학생을 '성+이름'이 아닌 '이름'만으로 부를 수 있는 당당함을 갖춘 친구였다(열네 살에는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집안도 유복해서, Y의 집에 처음 놀러 간 날 현관을 열자마자 부러움에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숫기 없는 내가 그저 막연히 좋아하며 바라만 보던 여학생은 Y와 즐겁게 얘기하며 귀 뒤로 머리를 쓸어 올리곤 했다.
그런 동경이 질투로 변한 걸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동경이란 질투의 다른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웬만한 건 다 갖춘 열네 살의 Y는 선택권이 참 많았고, 다른 길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같은 길 위에서 저만치 앞서가던 Y가 멈칫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심 안도했나 보다. Y의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살짝 빠져나온 담배꽁초나, 그 담배꽁초를 뒤적이며 '일진'들과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도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Y 사이의 대화 주제에는 열네 살짜리들이 으레 그러하듯 술, 담배, 일탈에 대한 허세 섞인 상상도 포함돼 있었다. 1학년이 끝나갈 즈음에는 그 모든 게 Y의 경험담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겁이 많은 나는 그런 걸 시도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Y를 잃기 싫은 마음에 그의 영웅담에 짐짓 감탄하거나 부러워하는 척을 하며 위태로운 친구 관계를 유지해 왔다.
2학년 때도 나와 Y는 같은 반이 되었다. 반 배정 결과를 듣고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하기는 했지만, 이미 우리 사이에는 떨떠름한 척력(斥力)이 흐르고 있음을 나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대로, Y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친구들과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지만, 가끔 함께 놀러 갈 때도 Y가 구석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나는 이제 완전한 외부인이 되어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그를 관찰할 뿐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다른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얄궂게도, Y는 이제 '일진' 무리에 섞여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으로 건너오곤 했다. 교과서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손으로 쳐서 전부 뒤집은 사람이 가져가는, 일종의 도박이 하필 우리 반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호스트'라고 할까, 그 도박판을 주도하는 건 유도 선수가 되겠다며 매번 힘자랑을 하던 녀석이었다. 사람 몸을 넘기다 보면 동전 정도 넘기는 건 일도 아닌지, 신기할 정도로 동전을 잘 뒤집었다. 보통 교과서 위에 4행 2열로 100원짜리 동전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그러니까 800원을 걸고 하는데, 그날 Y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500원짜리로 판돈을 다섯 배 올렸다. 큰 판돈만큼 큰 희비가 교차하는 그 장면을 보러 인파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고, 두 판인가 세 판인가, Y는 그 녀석에게 연속으로 지고 말았다. Y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무언가 가는 끈 같은 게 툭 끊어지고 그로 인해 수많은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느낌, 그 불안감 역시 현실이 되었다. Y는 승리를 만끽하며 일어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으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판 더 해."
돈을 따서 기분이 좋았던 건지, 그저 장난인 줄 알았던 건지, 녀석은 그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XX, 한 판 더 하라고!"
Y의 입에서 나온 큰 소리에 놀랄 뻔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퍽'과 '짝'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날카롭게 귀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고, 처절할 정도로 힘없이 돌아간 Y의 머리, 그러니까 귀와 뒤통수만이 보였다. 귀로 들은 소리와 눈으로 본 광경은 분명 같은 시점에 발생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서로 시차를 두고 일어난 별개의 사건인 양 느껴졌다.
Y는 다시, 고개를 서서히 돌렸다. 마치 무슨 동물의 박제처럼 눈동자는 탁하고 공허했으며 입술은 덜덜 떨리는 채 벌어져 있었다. Y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광대뼈를 타고 턱까지 흘러내리다 그대로 멈췄다. Y의 얼굴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나 역시 온몸이 굳은 채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의 눈물을 닦아 준 건 다른 친구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무언가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었다. 힘센 녀석들이 주먹을 쓰는 일은 예사였기에 이 사건도 그저 예삿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Y의 내면에서는, 와르르 무너진 수많은 것들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널브러져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반으로 갈라진 와중에도 나와 Y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함께 특목고를 준비한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는데, Y는 이제 그마저도 포기한 듯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남은 몇 개월을 보냈다. 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Y의 모습은 이어폰을 꽂은 채 생각에 잠겨 있거나, 등나무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둘 중 하나였다.
Y와의 마지막 추억은 2007년이 저물어가던 때였다. 나와 Y 모두 특목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둘만이라도 시험 끝난 기분을 내자며 영화를 보러 갔다. 어떤 영화를 볼 지 고민하는 나를 뒤로 하고 Y는 자신만만하게 매표소로 걸어가,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 티켓 두 장을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알 수 있는 그 특유의 풋내는 어쩔 수 없었는지,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영화관을 나오니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Y는 이제 익숙해진 모습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고, 나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인적이 드문 담벼락으로 그를 따라갔다. 이제 두 개비를 연달아 피우게 된 Y는 꽁초 하나를 버리고 또 다른 개비에 불을 지피더니, 쓴 숨을 내쉬며 말했다.
"XX, 되는 일이 없네."
"물이나 빼고 가자."
Y는 담배를 문 채로 한쪽 입술만 움직이며 잔뜩 찡그린 채, 바지 지퍼를 내리고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다 이유모를 실소(失笑)가 흘러나왔다. 3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동경하던 Y의 모습은 서서히 그러나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의 나는 Y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옆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고 나는 그가 택한 길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뒤집혀버린 거북이처럼 공허한 눈빛으로 모든 걸 체념한 모습이, 수학을 못 하던 내게 공식을 설명해 주던 그 모습과 슬플 정도로 대비되어 안타까웠을 뿐이다.
Y는 그날 이후 담배 연기처럼 사라져,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소식만 전해 왔다. Y가 없는 중학교 졸업식 날 나는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 두세 명과 사진을 찍고 강당을 빠져나왔다. 담배를 꺼내 무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꾸만 Y의 그 마지막 모습과 겹쳐 보여서, 그때의 상실감이 떠올라서, 그래서 도저히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
2.
살면서 가장 답답했던 시절로 중학교 시절을 꼽은 건 아무래도 실수였던 것 같다. 신림동 고시촌에서의 3년을 깜빡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좋으니 과정도 어느 정도 미화되었지만, 항상 햇볕이 잘 들지 않던 그 동네에서의 삼 년 중 첫 일 년, 그때의 나태와 무기력은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럽다. Y를 동정해 왔지만 그때의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태와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노력은 '출석체크 모임'이었다. 주말을 제외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출석체크를 하고, 출석을 못 하면 다음날 벌금을 내고, 벌금이 모이면 주말에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게 기본적인 운영 방향이었다. 구성원이 총 네 명이었던가 다섯 명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기억나는 건 단 한 사람이고, 그 당시에 아침마다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것도 단 한 사람이었다. 매일 출석체크 때마다 나누는 말은 '안녕하세요'와 '수고하세요' 두 마디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날과 못 들은 날의 차이는 대단히 컸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기 위해 몰려드는' 그곳에서, 그녀가 아침에 나오지 않으면 마치 내일도 없을 것 같아 덜컥 겁이 나곤 했었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었기에 나는 거의 지각을 하지 않았고, 다행히 그녀도 거의 매일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만나서는 두 마디, 그러나 공부에 관한 질문을 앞세워 문자로 연락하는 일이 조금씩 늘어갔다. 다른 이들이 지각을 자주 한 덕에 하루에 천 원씩만 걷었는데도 금세 맛있는 식사를 할 돈이 모였다. 매일 똑같은 트레이닝복만 입던 나였지만 이 날은 딱 한 벌 있었던 코트에 머플러까지 두르고 서울대입구역으로 나갔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모두가 모이자마자, 그녀는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내 머플러 자락을 잡아당기며 살짝 웃었다.
고시생들끼리의 한탄을 담은 저녁식사를 하고, 공교롭게도 나머지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간 덕분에 나와 그녀만 남아 같은 버스를 탔다. 고시촌 정류장에 내려 어색하게 걷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꺼냈다.
"괜찮으시면 커피 드실래요?"
한 쌍의 큰 눈과 알 듯 말 듯한 미소, 전에 우연히 본 이후로 꼭 다시 보고 싶었던 그 표정을 그녀가 지었다.
"저, 오늘은 술 땡기는데요."
짙은 사투리 억양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얼떨떨해서 굳은 채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그녀가 웃으며 앞장섰다. 나태와 무기력에 가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심장박동이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맥주잔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말과 웃음이 오고 갔다. 경계심과 망설임은 거품처럼 점점 사라지고,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유리잔을 부딪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는 듯했다. 열한 시 즈음 소란스럽던 가게 안이 점점 한산해지고, 우리도 초가을 밤의 추위에 입김을 뿜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저기요..."
순간 그녀에게서 어떤 제안이나 선언이 나올 거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모든 신경이 그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입술에 집중되었다.
"혹시 담배 피워요?"
짧은 순간 예측했던 수많은 가능성을 벗어나는 한 마디였다. 그녀는 내가 그걸 탐탁지 않아한다고 생각했는지, 원래는 피우지 않는데 술을 마시면 생각이 나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며칠 전 선배에게 했던 한 마디와 비슷한 말을, 그러나 훨씬 부드러운 톤으로 했다. 6년 전의 그 모습처럼, 인적이 거의 끊긴 원룸촌에 담배를 문 그녀와 쭈뼛쭈뼛한 내가 서 있었다. 두 번의 들숨과 날숨 이후에 그녀는 아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덤덤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앓은 지는 몇 년째인데 병원에 처음 가본 건 불과 몇 달 전, 공부를 시작한 직후란다. 한 번은 책을 읽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5층짜리 독서실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혹시 한 번에 죽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다시 내려왔단다. 언젠가 한 번 아침에 나오지 못한 날은, 전날 밤에 과호흡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었다는 얘기를, 마치 외운 듯이 하늘을 보며, 가을 하늘만큼이나 건조하게 전했다. 나는 취기에 당황스러움까지 겹쳐 순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귀에 들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고, 식은땀이 났다.
그 순간 그녀가 연기를 뱉으며 나를 보았다. 가로등 빛을 받은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연기는, 마치 방금까지 생명이 붙어 있던 어느 장기에서 빠져나오는 생명의 정수(精髓) 같았다. 그리고 그 찌푸린 미간과 가늘게 뜬 눈에서 내가 헤아릴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쓸쓸함이 날아와 박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괜찮아요?"
당황해 버린 내 모습을 들킨 게 부끄러워, 나는 멋쩍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진의(眞意)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도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걸 눈치챘는지 재차 물었다.
"내가 이래도... 괜찮아요?"
그녀의 말끝은 울음 섞인 목소리에 흐려졌다. 몇 년 만에 나는 또다시 공허한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고, 이번에도 그 눈물을 내가 닦아줄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눈물은 두 방울, 세 방울로 늘어났고 어깨의 들썩임은 점차 커졌다. 들썩이는 어깨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보다 한참 작은 어깨였지만 마치 먼바다에서 몰려오는 해일(海溢)처럼, 점점 거대하고 무거운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본 채 얘기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저 가 볼게요."
위기에 처한 동물이 본능적으로 맞이하는,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Fight or Flight)'의 문제. 나약한 나에게는 도망친다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속도로 멀어지는 내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보듬을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하면 곧바로 도망치는 것.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하고도 비겁한 생존 전략이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차단하지도 않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해가 넘어가도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회비를 다 썼으니 더 이상 서로에게 빚진 것도 없었다. 2년 후에 나는 고시촌을 떠났고, 핸드폰을 잃어버리면서 연락처도 잃어버렸고, 가끔 떠오를 때마다 직원 통합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해 봤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미간을 찌푸리며 연기를 뿜는 표정을 볼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마저 드리운 그녀의 쓰디쓴 고독이 떠올라 침샘 언저리 턱이 얼얼해진다.
여기까지가 담배에 대해 갖는 내 떨떠름한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론이다. Y의 교복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담배를 보았을 때, 비록 부질없더라도 그를 말렸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곳에 따라가지 않고, 다음 주 월요일에 만나자며 살갑게 인사하고 헤어졌다면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을까?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때마다 그곳에는 담배가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나는 그때의 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할 논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 모든 죄를 담배에 덮어 씌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관지가 약하고 겁이 많은 나는 아마도 평생 담배를 입에 댈 일이 없을 거다. 그러나 Y를,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이나 돌아서는 뒷모습 대신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고 싶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