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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잘러'를 만나야 하는 이유

by 김혜정

왜 요즘 '일잘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가.

단지 업무의 성과와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

수익 향상과 그에 대한 보상 같은 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서?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중요한 결과다.

특히 조직 안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조직이 품고 있는 최대한의 특혜다.

그러니, 직원을 뽑을 때 '일잘러'들을 '제대로' 선택하는 능력은 인사관리팀의 첫 번째 요건일 것이다.


이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일잘러'라는 개념이 조직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잘러'는 조직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관계 안에도 있어야 한다.



'일못러'의 말못할 고민들


일을 못하는 사람들, 이들은 어떤 일을 못하길래 '일못러'라고 불릴까? 사실 나는 평소에 누군가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누가 성과가 좋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그만의 노하우가 있나 보구나, 나에게 없는 장점이나 스펙을 그는 많이 가지고 있겠구나 하고 넘겨짚기만 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외적인 조건이나 경제적 환경, 좋은 성격 같은 것이 성과를 좌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을 갖추었든 갖추지 못했든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못러'들이다.


'일못러'들은 일단 고민이 너무 많다. 고민이 세세하고 그 수가 차고 넘친다. 자신이 목표한 일이 있어도 자신감 있게 추진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건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잘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노력은 해볼 수 있겠지만, 그 결과가 생각보다 처참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이 자신감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자신감은 뒤로 숨어 버리고 만다. 두려움에 압도된다. 그러니까 일못러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의사결정력은 일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고 또 타이밍도 중요하다. 만약, 시간이 지체되어서 일이 꼬이거나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면 피해는 본인만 보지 않는다. 그 피해는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넘겨진다. 함께 짊어져야 하는 짐이 된다.


'일못러'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계획을 눈에 보이게 작성하지 않는다. 두리뭉실하게 허공에 띄워 놓는다. 구체적인 목록을 가시화하지 않으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그만큼 판단력이 떨어지게 되고 일처리도 흐지부지하게 하고 만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더 적극적으로 할 것을 종용한다. 본인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잘 되겠지, 아니면 잘 안 되든가, 하면서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면서 뒷전에 빠져서 그 결과에 대한 승부를 보려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승부욕이 없다. 밑지기도 싫어한다.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일못러'들은 자신의 이런 점들을 알고 있을까? 자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잘하고, 목록을 가시화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일잘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런 일상이 습관이 되면 태도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허나, 어쩌면 이런 거 다 알고 있는데도 나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잘러'를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


'일못러'는 조직 사회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관계 안에도 있다.

일하는 영역에서만 '일잘러, 일못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못러'는 '일못러'를 만난다.

사람은 자기 성향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자석처럼 끌린다. 그 넓은 바닷속 조개들 안에서 진주를 찾듯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쩜 그렇게 자기랑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는지 아주 기똥차다. 그렇게 끌리고 끌려서 만난 사람들, 그들을 만나다 보면 겉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익숙한 점들이 발견된다. 물론 좋은 점들도 비슷할 수 있지만 스스로 꺼려하는 부분도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그냥 끌어안는다. 자신의 문제를 포용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그게 배우자든 친구든 지인이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지내다 보면 불편한 점들이 송곳처럼 튀어나오고 그 작고 날카로운 송곳에 툭하고 찔리는 일이 생긴다. 의도했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주 사소한 스트레스가 머릿속에서 자리 잡는다. 아무리 지워버리려 해도 사라지지 않고, 자꾸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진다. 그 사람의 문제일까, 아니면 나 스스로의 문제일까. 이 일의 원흉은 그 사람에게 있을까,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내 습관과 내 성격적 결함에 있을까. 고민을 하다 보면 더 복잡해진다.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고, 다 똑같다는 말, 자기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말,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야 자기 마음이 편한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 자기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다시 시작이다. 비슷한 사람을 만날 때, 문제는 새롭게 시작되고, 자신의 고민은 더 깊어진다. 굴레가 된다. 그래서 그 굴레를 끊어야 한다.



굴레를 끊는 방법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자석처럼 나와 같은 사람을 끌어당기게 되는데? 고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만나도 고민, 안 만나도 고민이다.

하지만 굴레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답은 있다. 자기 자신을 '일잘러'로 만들면 된다.

사회 어디에나, 큰 사회나 작은 사회나 '일잘러, 일못러'는 있다. 인간을 이분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일잘러가 되면 다른 일잘러는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길 것이고, 나 또한 일잘러를 끌어당길 것이다. 반대로 내가 일못러에 머물러 있으면, 언제까지나 나는 일못러의 굴레 안에서 반복되는 고민을 지겹게 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의 주체는 바로 나다. 일잘러가 될지, 일못러가 될지 결정하는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다.


오래전에,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건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청사진을 많이 그릴수록 그 일은 현실화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던 글일 것이다. 지금 써 내려간 이 글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먼저 일잘러가 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오늘 좀 더 명확하게 이해했다.


나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일못러' 쪽에 가깝다. 그래서 안타깝다. 늘 계획은 많이 하고 행동으로 실천도 많이 했지만, 내 옆에는 '일못러'가 있었다. 내 주변의 '일못러'들을 보면서 나 또한 '일못러'에 머물러 있음을 오늘 느꼈다. 그래서 나 스스로 '일잘러'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일잘러'가 된 이후에 내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일잘러'로 물들이려고 한다. 그게 오늘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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