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시어머니께서 내가 죽거든 산에 뿌려달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자식들에게도 후세에게도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은 깊은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지난주 같은 말씀을 하시길래 이렇게 말씀드렸다.
“어머니, 이건 저 혼자 해본 생각인데요. 저희가 마침 집을 지었으니 부모님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나무 아래 모시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어요. 물을 주고 가지를 쳐주며 인사도 드리고 지금처럼 사는 얘기, 푸념을 늘어놓고 싶어요. ‘벌써 봄이네요.’, ‘요즘 선중 씨는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오늘 이래서 속상했는데 어머니 이럴 때 어떻게 하셨어요?’ 이런 얘기들요. “ 어머님과 연명 치료와 자발적 안락사에 대한 얘기도 종종 나누는데 태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죽는 방식과 추모의 방식은 좀 더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때론 생의 유지보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추모의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부모님뿐 아니라 필연적인 죽음 앞에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