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 소녀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시절, 작가를 꿈꾸던 학생 한 명이 종종 자신이 쓴 소설을 출력해서 교무실로 들고 왔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쓰는 일에는 도전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서사가 있는 소설을 직접 쓰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내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또 까르르 웃어대던 그 소녀가 세상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들을 조합하여 쏙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읽어보라고 전해주는 용기, 그 모든 것이 신기하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십 년 남짓 가르침의 현장에 있었으나 그렇게 독특한 설렘을 주는 녀석은 유일했다.
그 학생은 이름난 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출판사의 출간 시집 목록에는 내가 가르치던 시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줄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북 토크의 주인공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빛을 내고 있다. 내가 느꼈던 그 설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겠지. 그곳에 찾아간 사람들도 이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사람이 이렇게 밝고 따뜻하다니 하고 감탄하겠지 싶다.
"이 생활에서 슬럼프를 느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요?"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닐 때 받은 질문이다. (결국 슬럼프를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안 줄 거면서 그런 건 왜 물었담!!) 그때 이미 몇 년의 근무로 졸업한 제자들을 둔 상태였기에,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제자들을 만나며, 그들을 사랑하던 시절의 열정을 되찾을 것입니다."라고 고민 없이 대답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여 년의 시간, 평생을 꿈꾸던 선생님의 삶을 살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났던 제자들의 삶을 SNS나 메신저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지켜볼 수 있어 감사하다. 사실 아직 먼저 말을 걸어서 소식을 물을 용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만에 연락해오는 학생들이 있는데, 열에 아홉은 시작 문구가 같다.
"혹시 저 000인데 기억하시나요?"
대부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너의 목소리까지 들린다고. (내 평생 기억의 용량을 그때 다 써버린 듯하다.) 엉덩이를 뒤로 쭈욱 빼고 손만 내밀어 똑똑 두드린 듯한 질문에 세상 더없이 격한 반응으로 화답해주곤 한다. 느낌표를 가득 찍어 이름을 부르며 잘 지냈냐고, 기억하고 연락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반가운 감정이 딱딱한 문자에 혹시 가려질까 더 최선을 다해 소리치듯 반응한다.분명 그들의 존재, 그리고 그 인사는 열정의 날들을 살아가던 나를 일깨워준다.
치열한 20대, 혹은 30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이 어디에선가 귀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길 바라지만, 혹시 살다가 지치거나 말할 곳이 필요할 때 나를 떠올려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조차 여기에 말하고 있으니 그들이 알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내 마음은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은.
비록 눈 딱 감고 꿔줄 만큼의 돈은 없지만 따뜻한 밥 한 끼, 열 번 정도는 사줄 수 있다. 생각난다면 언제든 두드리길. After school 이거나 After service이거나 둘 중 하나로 여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