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양치하는 시간의 멍함이 싫어서 스쿼트를 30개 하는 사람. 3개월째 내 모습이다.
쉬는 것에 능하지 않다. 어느 순간에도 무슨 일인가를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느낌에 불안감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꼭 의미 있거나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만히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요즘 들어 둘째는 매일 밤 자신의 기도 순서가 되면 가족들의 내일의 생활과 안위를 당부하는 기도를 하는데, 나를 지명하며
"엄마가 내일 우리가 없을 때 심심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한다. 첫날은 듣고 어이없어서 웃었는데, 그 후로는 들으면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집에서 심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정 엄마는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다가 마음 한 구석을 푹 찌르곤 해서 아팠다. 실제로 심심하지 않으며, 집안일과 각종 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심심할 틈이 없다. 그렇게 일하다가 잠시 멍하게 앉아있으면 또 스스로 나는 심심한가? 하고 되묻게 된다. 한 달은 그런 생각의 굴레 안에서 부정했다가 또 약간 인정했다가의 반복이었다.
청소년기에는 학업과 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작은 세상 속의 고민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구체적 해결이 눈앞에 과제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쉴 수 없었다. 당시 대학 강의 노트를 보면 노트 귀퉁이에 빼곡하게 그날의 일정이 시간별로 적혀있었다. 학과 모임, 동기모임, 그 사이사이 교수님 방 청소, 과외, 카페 알바. 나는 놀기 위해 일해야 했고, 일하기 위해 놀아야 했다. 청춘의 달콤함만을 만끽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환경이 척박했다. (그 척박한 환경마저도 부모님의 온전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늘 감사드린다.)
그렇게 한없이 달리며 살았던 내게 '아이들이 기관에 가고 난 후의 전업주부'의 생활은 익숙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잠깐씩이지만 혼자만의 여유가 주어지기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 되면 나를 잃는 것 같기도 하고,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의무감에 육아서적을 읽고, 영어강의를 짧게라도 들으려고 했다. 짧게 듣는 것에서 만족하니 발전이 없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 아이들 등교 후, 재빠르게 거실과 방청소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서 아이들의 겨울 내복을 구입하기 위해 쇼핑몰을 살펴보고 비교하며 시간을 보냈다. 몸이 멈춰있으니 또 엄마를 위한 기도가 떠올랐다. 집에 가만히 앉아있긴 하지만 적당한 가격선에서 예쁘게 입힐만한 내의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는 나는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걸 바쁘다고 표현하기는 세상 바쁘게 사는 사람들 앞에서 , 또 과거의 나에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때 문득 떠오른 단어, '평안'. 평안함을 누리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 나는 '평안'을 누리고 있다. 오늘 아이들을 돌보며 힘들었다고, 화가 났다고 또 혹은 이렇게 귀엽고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신랑에게 늘어놓는 나의 하루. 흘러넘치지는 않지만 적당히 먹고 싶은 것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살림을 꾸리는 주부. 그런 나를 보며 나의 딸들이 지금은 엄마가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언젠가는 이것이 평안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길 바란다.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라며 눈물짓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