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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Mar 16. 2023

누군가의 믿음

딸의 첫 회장선거

큰 아이가 4살 때 다닌 어린이집 담임선생님은 20대 중반의 젊은 분이셨다. 선생님은 우리 아이를 유독 아껴주셨고, 해당 기관을 떠난 후에도 연락이 닿아 초등입학 때 축하 케이크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 선생님과 2학기 면담을 할 때, 마무리할 때쯤 우리 딸은 크면 여자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반장이 될 것 같다고 하며 웃으셨다. 그런데 왜 여자친구들이냐고, 남자친구들은 왜 빼셨냐고 내가 물으며 함께 웃음으로 상담을 마쳤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아이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동안 만났던 반장들을 떠올리며 그런 장점들을 갖춘 녀석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올해 큰 아이가 3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학급회장선거를 했다. 본인이 입학하면서부터 그날만을 기다려왔던 터라 새 학기 첫날부터 친구들에게 출마여부를 물어보며 자신의 출마를 알렸다고 한다. 이런 걸 용의주도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무튼 자식이 하고 싶다고 하는데 모르는 척할 수야 없지 싶어서 카페에 마주 앉아서 공약을 고민하고 함께 출마의 변에 들어갈 내용을 고민했다. 아이가 초안을 작성하면 어색한 부분을 잡아주고, 공약의 현실성을 짚어주었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이 되라는 뜻을 담았던지라 그 내용을 연설문에 녹여냈는데, 아이가 소금봉지를 소품으로 사용하고 싶어 했다. 인터넷으로 꽃소금이라고 크게 쓰인 소금 한 봉지를 샀는데 3kg이 그렇게 클 줄이야. 아이에게 빈 봉지를 주기 위해 소금을 옮겨 담으며 보니 김장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소금은 향후 10년은 우리 집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연 이틀 동안 연설문을 외우고, 소품을 만들고, 연습장면을 핸드폰으로 촬영하며 수정하기를 여러 번, 결국 나도 아이도 흡족한 상태로 준비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선거 당일이 되었다. 매일 아침 아이를 깨우면서 일어나야만 하는 기쁜 이유를 말해주고는 하는데, 그날은 마침 머릿속에 "엄마, 회장엄마하게 해 줄 거야?"라는 말이 맴돌아 순간 내뱉을 뻔했다. 그리고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거 막장 드라마에서 득실득실 욕심 많은 엄마들이 자주 하는 표현 아니었나? 나 그런 정도의 인간이었던 건가? 애가 떨어지고 오면 내가 더 실망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혹시 내 마음이 아이에게 전해져 부담이 될까 봐 당선이 될 수도, 혹은  떨어질 수도 있으나 열심히 준비했으니 된 거라는 말을 해줬다. 아이에게 한 말이지만, 나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번 꼭 안아주며 교문으로 들여보냈다.


하교 후 아이가 전해줄 소식이 무엇 일지에 따라 적절하게 할 말과 반응을 고민하며 오전을 보냈다. 갓 입학한 둘째가 먼저 하교하는 날이라 데리러 갔는데,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엄마! 언니 회장되었대!"라고 소리 지르며 신이 나서 달려왔다. 그 말을 들은 둘째의 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손을 잡고 "우와, 언니가 회장이다!"라고 폴짝폴짝 뛰었다. 언니가 회장인데 동생친구들까지 왜 그렇게 덩달아 기쁜지 잘 모르겠지만, 둘째는 엄청 신이 나서 여기저기 자랑을 해댔다. 어느 엄마가 언니 반장된 거 축하한다고 하니 정색하는 표정으로 "회! 장!이에요." 했다. 둘째를 학원으로 보내고 나니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당분간 마음에서 날려버려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없이 가벼워졌다.  


마음의 큰 짐을 내려놓은 상태로 큰 아이를 데리러 가니 아이가 건물에서 교문까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 나와 안기며 회장이 되었다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둘째가 미리 말한 것은 비밀로 하고(알면 둘째를 또 엄청 구박할 것이기에) 최대한 놀란 표정으로 축하해 주고 저녁파티를 약속하며 학원에 데려다주었다.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온전히 내 숙제로 남았음에도 귀찮지 않았다. 예상했지만 회장의 엄마가 되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드라마의 악역인 엄마들이 다 그렇게 자식들을 '~장'으로 만들고 싶어서 난리인가 보다 싶었다. 별일 아닌 척하던 남편은 그날 회식으로 아이가 잠든 후에야 집에 왔다. 거나하게 취해서는 며칠 전에 빵집에서 아이가 갖고 싶어 하던 병에 든 사탕을 가장 큰 사이즈로 사들고 왔다. 그리고는 늦은 밤 스포츠뉴스에 나온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 선수(야구광인 그가 늘 감탄하는 선수다.)를 보다가 갑자기 TV에 대고 "내 딸은 회장이다!"라고 외쳤다. 이 사람도 좋긴 좋구나.


설렘과 초조함, 기쁨, 뿌듯함, 만감이 교차한 하루가 지나가고 나니 4살 때 그 선생님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육아로 버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제자들이 인생의 소소한 소식을 전해오면 과거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차던 기억이 났다. 선생님께서 4살 때 아이를 보며 해주셨던 그 말씀이 아이에게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되어 오늘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그 믿음과 사랑에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한 답신에는 그때도 우리 아이는 그 반의 반장과 같은 존재로 선생님 곁에 있어준 존재였다고. 앞으로 더 멋지게 성장할 모습에 대한 기대와 응원이 담겨있었다.



누군가의 믿음과 기대와 응원이 아이를 자라게 하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가 쌓여 아이의 인생에 든든한 발판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그러한 만남이 아이의 하루하루에 이어지기를. 나의 욕심이 아이의 삶 어디에도 드리워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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