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쓸 때는 사내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정치보다는 실무에 집중하는 스타일이었고, 정치를 잘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부서를 옮기면서 겪은 경험들을 통해, 실무능력 외에도 조직 내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경력 관리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이 글은 그동안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를 후배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2010년 입사 당시를 돌이켜보면, 지연은 많이 약해졌지만 학연의 영향력은 여전히 존재했다. 특히 SKY 출신이나 주요 공대 출신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학연이 작용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것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일연'이었다.
한 상무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정부장하고 나하고는 진짜 오래됐지, 나 대리때 사원으로 와서 같이 일했으니까." 실제로 이 상무님 밑의 부장들은 모두 외부 영입이 아닌, 과거 팀장 시절 함께 일했던 후배들이었다. 이들은 강력한 라인을 형성했고,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인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리더가 라인을 형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가 자신의 업무 스타일과 가치관을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상무나 전무급 임원들은 실무를 직접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부하 직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조직행동 이론들로 설명된다:
1. 사회적 정체성 이론 (Social Identity Theory)
- 리더들은 장기간 함께 일한 구성원들과 강한 내집단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 이는 단순한 친분 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조직 내 생존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 내집단 구성원들은 서로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2. 불확실성 감소 이론 (Uncertainty Reduction Theory)
- 새로운 인재가 아무리 뛰어나도, 실제 업무 현장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불확실하다
- 장기간의 업무 관계를 통해 상대방의 강점, 약점, 행동 패턴, 가치관, 업무 스타일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 이러한 예측 가능성은 조직 운영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높인다
3. LMX 이론 (Leader-Member Exchange Theory)
- 리더는 모든 부하직원과 동일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일부와 더 질 높은 교환관계를 형성한다
- 높은 LMX 관계에 있는 구성원들은 더 많은 정보, 자원, 기회를 얻게 된다
- 이러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며,
승진이나 중요 업무 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4. 조직 정치학적 관점
- 리더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충성심 있는 '라인'이 필요하다
- 이는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지 확보와 반대 세력 견제에 매우 중요하다
- 특히 조직 변화나 혁신을 추진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지지 세력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내 14년의 경력 중 처음 12년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팀장님 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했고, 미국으로 발령났을 때는 나를 발탁해준 팀장에 대한 의리로 다른 팀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최근 2년간의 경험을 통해, 리더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리더 선택에 있어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최상위 리더십과의 관계
- 최상위 리더십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시야와 능력을 갖춘 리더인가?
- 단순히 보고라인이 아닌,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가?
- 조직의 큰 그림을 이해하고 전략적 사고가 가능한가?
2. 조직 내 포지션
- 현재 맡고 있는 역할이 조직의 핵심 기능인가?
- 앞으로 조직이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분야인가?
- 예산과 인력 운용에 있어 자율성이 있는가?
이전 부서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면, 우리 부문은 신입사원들의 첫 관문 정도로 여겨졌고, 대부분 3년 후면 떠나갔다. 심지어 우리가 수행하던 하드웨어 시험도 3년 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반면 현재 부서는 전체 차량 가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핵심 분야를 담당하고 있어, 최상위 리더십이 우리 리더에 수시로 직접 연락하며 관심을 보인다.
단순한 충성심이나 뛰어난 업무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차장에서 부장으로 가는 과정에서는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한것같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팀장이 상급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성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업회사의 비유를 들어보면:
- 각 부장이 배 한 대씩을 책임지고, 팀원들은 각자의 역할(엔진공, 조타수 등)을 맡고 있다고 하자
- 엔진공으로서 "고장이 70% 줄었다" "수리 속도가 50% 향상됐다"는 식의 성과는 시야가 좁다
- 만약 팀장의 핵심 성과지표가 '연간 조업량'이라면, 엔진공은 '엔진 출력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
- 이는 조업지까지의 이동 시간을 단축시켜 직접적으로 조업량 증가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지난 12년간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빠른 승진이나 성과에 대한 강박도 없다. 하지만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대해 적절한 평가와 격려를 받는 것이 동기부여와 직장 생활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글이 단순히 정치적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경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조직의 목표와 자신의 성장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