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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충권 Oct 11. 2024

길에서 만난 사람들


  사자


  샘골에 사는 한 장정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숙명입니다. 우선 학교가 장정에 있었고, 교회가 장정에 있었고, 가게도 장정에 나와야 있었고, 대처로 가려고 버스를 탈래도 장정까지 내려가야 했습니다. 길에는 언제나 사건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습니다. 동네의 형들과 학교를 가려고 내려오는데, 남조의 갈림길을 내려와서, 큰 바위돌모랭이에 다다르기 전에, 산에는 내려오는 물이 적지만 끊이지 않고 길을 적시는 곳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사자가 나타났답니다. 지금도 사자가 서 있답니다. 6학년 용주 형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봤더니, 정말 갈기머리를 사방으로 늘어트린 사자가 숲 속에 앉아 있습니다. 갑자가 등골이 오싹해 졌습니다. 정말로 사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가을이 늦어 눈은 오지 않았지만 쌀쌀한 바람이 꽤나 부는 날이라서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온 산이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숲 사이에 사자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사자가 아니고 떡갈나무라면, 바람이 불 때 흔들리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입니다. 여기에 바람이 지나가면 사자는 가만히 있고, 우리가 서서 바라보는 길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자는 어슬렁거리듯이 움직입니다. 일단 사자가 달려 내려오기 전에 학교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다행히 누구하나 물려 가거나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올라갈 때가 문제입니다. 사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 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도 선뜻 길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느니, 그 무장공비가 이승복을 돌로 쳐 죽였다느니, 어느 구석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잠이 들기 전에 잠자리에서 그 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왔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장정 학교 마당에서 공짜 영화를 본 밤이면 공산군과 싸우는 국군의 용감했던 장면을 서로 이야기하며 단숨에 오를 때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혼자 길을 걷다가 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 그런 공산군을 만나지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면서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제야 사자를 그 길목에서 만난 것입니다. 동네 형들이 다 모일 때까지 우리는 집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지루하게 놀고 난 후에야 동네 아이들이 모여 한꺼번에 올라갔습니다.   


  잠자는 사자를 깨울까봐 소리내지 않고 살금살금 아침에 사자를 본 장소에까지 왔습니다. 함께 서서 사자를 찾아보았습니다. 짧은 해에 산그늘이 져서 그런지 그 자리에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날도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데 뛰는 것이 상수였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자가 있음을 확인한 이상, 나를 살릴 것은 내 발걸음뿐입니다. 사자를 깨울까봐 큰 소리도 못 지르고 발자국 소리까지 죽여가며 집을 향해 뛰었습니다. 동생이 있는 사람은 동생을 찾아 손을 잡고 뛰었습니다. 나는 아직 영구가 입학하기 전이라 나만 살면 됐습니다. 사촌 형들은 앞장서 뛰다가 멀찍이 가서는 헐레벌떡 뛰어오는 동생들을 뒤돌아보곤 했습니다. 남조와 갈림길쯤에서야 한숨을 돌렸습니다. 우선 사자의 눈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이튿날이었습니다. 겁을 잔뜩 먹고 학교길을 내려오는데, 형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사자가 보이는 곳에서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사자인가 해서 형들 중에 용감한 용주형과 가유형 둘이서 올라가 보았답니다. 가까이 가서 봤더니, 참나무였답니다. 가을이 늦어져서 낙엽이 들자 아직 떨어지지는 않은 잎들이 어우러져서 사자머리처럼 모였던 것입니다. 형들이 우리도 한번 올라가서 보라고 앞장을 섰습니다. 혹시나 진짜 사자가 아닐까, 아직은 의심을 하면서 살금살금 올라갔습니다. 코앞에까지 올라가 봤더니, 글쎄, 아니나 다를까 갈참나무 잎이었습니다. 넙죽넙죽한 잎들이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모여 사자의 형상을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허부렁하니 별로 야물어 보이지도 않는데, 길에서 보기에는 영락없는 사자였습니다. 그걸 보고 한 이틀 사자에게 쫓겨다녔던 것입니다. 내려오는 길은 돌도 집어 던지고, 갈대도 꺾어 들고 휘졌고, 하늘을 향해 웃기도하고, 다시 돌아보며 우스운 침도 한번 뱉었습니다. 그 후로 돌모랭이를 지날 때면 산을 쳐다보며 침을 뱉어 주었습니다.  





  문둥병자들


  과수원 아래는 넓은 개울이 흐릅니다. 장마철이면 그 넓은 개울에 물이 가득 차지만, 장마철이 지나도 물의 높이만 낮아질 뿐 넓이는 비슷합니다. 장마가 벌써 지나고 땡볕이 수구러지던 어느 늦은 여름에 이 개울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우리가 복숭아를 서리해다가 복숭아도 씻고 몸도 씻으면서, 길 바로 아래에 숨으면 길을 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그 개울입니다. 길 바로 아래서 장정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경사가 급해 물길이 휘몰아치지만, 여기만큼은 개울이 넓어 물살도 그리 세지 않은 곳입니다. 또 큰물이 휩쓸고 간 후에 큰 돌이 듬성듬성 솟아 있어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물볼일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문둥이들이랍니다.


  문둥병자들은 눈썹도 없고, 손가락도 떨어져 나가고, 다리도 잘라져 없는 사람도 있답니다. 이들이 앓는 병이야 가까이 가지 않아서 옮지만 않으면 된다고 쳐도, 이 병에서 나으려면 사람의 간을 꺼내 먹어야 한답니다. 그게 무서웠습니다. 어른들은 잡을 수가 없으니까,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아다가 간을 빼 먹으려고 노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여럿이 달려들어서 꼼짝도 못하고 죽는답니다. 닭을 잡아서 털을 뽑고 배를 갈라 토막을 내는 모습에, 내가 이 사람들에게 잡혀서 배가 갈리고 간을 떼이는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돼지를 잡아서 배를 갈라 간을 떼고, 피묻은 칼로 간을 잘라 소금에 찍어 너도 나도 한 절음씩 먹듯이, 내가 잡혀서 배가 갈리는 듯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이 사람들이 생활하는 개울가를 지나가야하는 것이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누가 먼저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사람들이 장정까지 왔을 때는 전염이 되지 않는 음성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소록도가 세워지고 환자를 격리한지도 그 당시 벌써 수십년은 되었을 때였습니다. 격리하지 않은 환자들도 이미 개발된 치료약으로 전염은 되지 않게 치료된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간을 빼먹는다는 말은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진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벌써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깊어 가는데 집도 없이 개울에서 사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우리 간을 노린 것이 분명합니다. 개중에는 아이도 보입니다. 멀리서 키로 짐작을 하면 내 또래 아이도 있습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우리를 잡아먹어 병을 낫고 싶은 모양입니다. 우리는 멀리서 문둥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살금살금 내려왔다가, 지나쳤다 싶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어쩌다가 꼴지로 달린다 싶으면 과수원 가시나무쪽으로 바짝 붙어서 뛰었습니다. 언덕 아래 웅크리고 숨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울에 있는 문둥이들은 우리가 지나가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듯했습니다. 이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사정거리에 들면 사정없이 잡아가려는 꿍꿍이 속일지 모릅니다.


  일요일이면 교회를 가야 하는데, 나는 영구와 종구만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함께 학교에 갈 때에야 의지가 되었는데, 아직 뛰지도 못하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날은 다행히 아버지가 함께 가 주었습니다. 문둥이가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떼를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서워서 아버지를 방패삼아 숨어서 과수원 가시울타리 곁으로 바짝 다가가 내려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이들에 대하여 한마디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묵묵히 내려 오셨습니다. 뛰지도 않았고, 발걸음이 빨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잡아먹지는 않는다고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른들도 우리가 이 사람들과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꺼려하셨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람을 잡아다가 간을 빼 먹는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문둥병이 옮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날이 더 추워지자 문둥이들도 더 이상 개울에서 살지 않고 옮겨 갔습니다. 한참은 이들이 살던 개울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듬해 여름에 개울을 내려갔을 때는 밥을 해 먹은 불 땐 흔적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옷은 그렇게 남루하게 입고 다녀도 살던 장소는 깨끗하게 치워 놓았습니다. 개울물은 여전히 수정같이 맑게 돌들 사이를 지나가며 노래를 했습니다.





  노스페이스


  마을 아이들은 나름대로 텃새를 부리기 마련입니다. 그 중에 장정에 사는 형들은 은근히 산에서 내려오는 아이들에게 텃새를 부렸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산골 아이들을 골탕먹입니다. 텃새는 주로 학교를 졸업한 형들이 부립니다. 중학교에 갔으면 장정에 남아 있지도 않지만, 중학교를 가지 않은 장정의 형들은 심심하면 어른들의 눈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야 집을 갈 수 있는 아이들을 괴롭혔습니다.


  남천에는 나와 한 학년은 원각이와 둘이고, 5학년은 용심이와 인수고, 4학년은 덕호와 상인이입니다. 나는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으니 5학년 용심이와 인수와 나이가 같은 셈입니다. 학교가 끝나고 4,5,6학년 남자들만 모여서 집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교회 담벼락 아래를 지나, 낙엽송 서너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모랭이를 돌아서면, 과수원을 가기 전에 장정에서는 시야를 가리는 외진 곳이 나옵니다. 일단 장정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남천은 아직 산위로 보이는 까맣게 먼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정 형들 세 명이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모랭이를 돌아서기 전에 봤다면 장정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할텐데, 모랭이를 다 돌아서야 보여서 도망도 갈 수 없는 곳에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한참은 형들이었습니다.

  “야, 너희들, 여기는 장정땅이니까, 장정사람 허락을 받고 가.”  


  우리는 명 수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형들을 만만히 볼 수는 없습니다. 일단 우리보다 덩치가 컸고, 지금 덤벼서 벗어난다고 해도, 여기서 싸움을 해서는 다시는 장정 땅을 밟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형들은 일단 땅에다 금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큰 걸음으로 서너 발은 되도록 나아가 다른 금을 그었습니다. 금 사이를 밟지 말고 건너 뛰어 가랍니다.

  “금을 조금이라도 밟으면 죽는다.”

죽는다느니 산다느니, 맞을 거라느니 때릴 거리느니 하는 말은 아주 극단적인 지경의 일이라서, 큰 소리를 친다거나 과격하게 행동을 한다거나 욕을 한다거나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들은 말을 아주 작게 해서 더 무섭습니다. 몰려다니며 땅에 침을 찍찍 뱉으며 말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욕도 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일어서서 폼을 잡고 막대기를 휘두르지도 않고, 금 앞에 쪼그려 앉아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면서 말하는 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정말로 사람을 조용히 죽이기도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서 더 무서웠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미처 몰랐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짜영화를 볼 때, 숨어있던 공산군을 만나면 총이라도 쏘던데, 우리는 반항 한번 못하고 꼼짝없이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사자를 만나면 도망이라도 갈텐데, 바로 코앞에서 만났으니 꼼짝없이 잡혔습니다. 어른들이라도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이 시간에 와 줄 것을 바라는 것은, 과수원에서 사과가 떨어져 비탈을 굴러와 길 가에 멈추어 있는 것을 줍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형들에게 사정을 해서 놓여나기가 이미 그른 것은, 형들의 목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를 내면서 설득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큰 소리를 친다면이야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어찌 해보겠는데, 이미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줄 다 안다'는 식으로 겨우 알아듣도록 작게작게 말하는 데야, 우리는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습니다. 문둥이들에게 잡혀 간을 내어주듯 내 몸을 형들의 처분에 맡겨야 하나 봅니다. 우리는 얼굴은 마주 보았지만 한없이 슬펐습니다.


  아무도 뛰어서 금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아니 시도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마나 그 먼 거리를 넘을 수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항변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눈치만 볼 뿐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 내가 그 형들과 말 할 수 있는 끄나풀이 있습니다. 외갓집이 장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큰집도 작년에 장정에 이사와 살고 있습니다. 큰집의 형이야 지금 이 형들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외갓집의 외삼촌은 이 형들보다 위였습니다. 외삼촌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분위기에 눌려 말은 할 수 없고, 얼굴이라도 봐야 눈으로 말할텐데, 이 형들은 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땅만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외삼촌은 없고, 이 형들 뿐이기 때문에 잘 못 말했다가는 더 큰 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발끝으로 돌맹이를 문지르면서 속으로만 말했습니다. ‘내가 현주 삼촌 조카야’, ‘현주가 우리 삼촌이야’ 라고, 형들이 내려다보는 발끝으로 말했습니다.  


  한참을 지났습니다. 그 소리가 들렸나 봅니다. 자기들끼리 의논을 했습니다.

  "청구는 봐주자. 현주 형이 있잖아."

아, 그래서 나는 일단 벗어났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이 형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남천 친구들에게서 떨어진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 하나도 맞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형들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지금 현주 아제는 어디 있어요?”

중학교에 다니느라고 장정을 떠나 있는 것을 알면서도, 현주 아제를 생각한다면 나는 물론 내 친구들에게도 이러지 말라고, 현주 아제를 더 분명하게 각인시키려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형이 외쳤습니다.

  “우리 그만 가자.”

들고 있던 작대기를 내던지면서 일어섰습니다.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김 샜다는 듯이 일어들 나, 모랭이를 돌아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가라는 말도 있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집으로 갔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사자보다 무서웠고, 간을 빼 먹겠다는 문둥이들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 후 남천 아이들끼리는 더 친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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