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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충권 Oct 11. 2024

파리가 천적이었다.

  극성맞은 파리


  우리집은 물론 누구네 집이든 방문만 열면 바로 한데입니다. 겨울에 눈보라가 치면 봉당은 물론 마루 깊숙한 방문 앞까지 눈이 날려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방문 앞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습니다.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추위에도 창호지 한 장 차이로 방이고 한데가 나누어졌습니다. 창호지 문에 구멍이라도 뚫어졌으면 황소 바람도 넉넉히 들어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문은 발랐지만, 왈가닥 개구쟁이들이 많은 우리 집은 문에 구멍은 수시로 났습니다. 찬 겨울에 황소바람이 들어오니까 하룻밤도 그냥 넘기지 않고 밥 먹다가 밥풀로 바로 발랐습니다. 그래도 아침이면 위목에 먹다 둔 바가지에 물이 꽁꽁 얼어 있습니다. 겨울에 문을 열지 않고 문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문에 유리를 박아 놓았습니다. 유리는 방 안에 앉아서 볼 수 있는 낮은 위치에 달았습니다.


  문에 단 유리는 겨울에는 유용하지만, 봄이 되고 여름 거쳐 가을까지는 별로 통해 볼 일이 없습니다. 세 계절의 삶은 곧 바깥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밥도 방에서는 거의 먹지 않습니다. 한 데 부엌에서 밥을 해서는 봉당을 지나 마루에서 먹습니다. 방에 앓아 누운 환자라도 있으면 방으로 오기도 합니다. 마루에서 밥을 먹으면 한 두 사람은 신발을 벗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서 먹게 됩니다. 부엌에 가서 더 보충해야할 반찬을 가지러 간다든가, 밥을 다 먹으면 물을 뜨러 간다든다, 심부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루에서 밥을 먹으면 아주 귀찮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파리입니다. 봄에는 아직 파리 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먹을 만합니다. 여름 무더위가 시작되면 파리가 들끓어서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한창 무더울 때는 파리가 새까만 보리밥 숟가락에 앉아서 입으로 함께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하루 종일 칭얼대던 동생이 더위에 지쳐 잠이 들면 콧구멍으로, 입 가 물기 있는 곳으로, 눈가로, 파리가 떠메고 갈 것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때려서 잡을 수도 없고 손바람을 내서 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 때뿐이지, 손이 지나가면 금방 달라붙습니다. 장마라도 길어지면 파리도 굶주렸는지 더 악착같이 덤빕니다.


  그 파리가 뒷간에서 우글거리는 구더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는 모조리 없앨 방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하얀 가루 농약을 뿌려도 소용없고, 할미꽃 뿌리를 캐다가 넣으면 다 죽는 다고해서 괭이를 들고 양지말 묘등 가에서 종다리 바구니로 캐다가 넣어도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뒷간 아래에서 구더기 없었던 적을 본 때가 없습니다. 뒷간에 구더기가 가득하다고 해도 집과는 멀리 떨어져서, 거기서 생긴 파리가 집으로 다 날아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붕을 잇대고 있는 소집에서도 만만치 않게 생겨났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소는 곧 한식구라 미쳐 배설물을 쳐주지 못해 외양간 바닥이 질척질척해도 그러려니 하고 함께 삽니다. 소외양간 냄새는 별로 싫다고 느껴지지 않은 것은 신기합니다. 보기에는 얼마나 비위생적인지 모릅니다. 외양간은 살림집과 지붕을 잇대어 있지요, 외양간을 청소하느라고 쇠스랑으로 떠낸 소의 배설물은 멀리 옮기기도 힘들어 문 밖에 바로 쌓아 놓았지요, 우리 키를 훨씬 넘는 거름더미에서는 사시사철 검은 침출수가 흘러나오지요, 비라도 오늘 날이면 흘러서 마당도 적시고 담 틈으로 흘러 길로 스며들지요, 거기서 생기는 파리는 독파리가 아닌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름더미에서는 구더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서 있는 소에게는 파리와 소꼬리가 날마다 숨바꼭질을 합니다. 소에게 달라붙어 피를 빠는 벌만한 쇠파리를 꼬리를 흔들어 연신 쫓았습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양간에서 구더기가 끓으면 엄청나게 버글버글할텐데, 쇠스랑질을 하면서도 구더기를 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겨울이면 거름더미도 높은 곳이라고 올라가서 연을 날리기도 했는데, 거름더미에서 매미가 되는 굼뱅이는 나와도 파리가 되는 구더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것이, 그러니까 집 가까이 두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도 파리를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방물장수는 파리채는 꼭 가지고 다녔습니다. 파리채로는 감당이 안 되면 파리약을 놓기도 합니다. 파리가 좋아하는 밥에다가 약을 섞어 마루나 부엌 부뚜막에 올려놓습니다. 밤에 켜는 등잔받침에도 놓습니다. 거기 앉는 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뒤로 나자빠져 팽그르르 돌다가 조용히 멈춥니다. 그나마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파리약도 놓지 못합니다. 아이가 집어 먹으면 큰일나니까요.


  요강같이 생긴 파리통도 있었습니다. 크기는 요강만하고, 유리로 투명했는데, 더러 꽃무늬도 그려져 있습니다. 세 개의 발이 있어서 세워 놓았는데, 가운데는 비어있고 중간쯤에 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가운데 바닥에 파리가 좋아하는 먹이를 놓아두면, 파리가 먹으러 들어갔다가, 날아 나오다가 투명한데 부딪혀 물에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물에 빠진 파리는 날개가 젖어서 날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하루가 지나면 파리통에 파리가 까만 띠를 이루곤 합니다. 그래도 파리는 불을 끄면 꼼짝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을 컸는데도 낮에만큼 파리가 덤빈다면 아마 살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신기한 것이 파리는 귀찮지만 불을 끄면 견딜 수 있고, 모기는 손바닥으로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불을 꺼도 덤빔니다.  





귀에 파리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샘골의 정자나무인 동네 한 가운데 밤나무 밑에서 놀던 때였습니다. 유치원라는 것이 있는 것도 몰랐으니 밤나무 둥치가 만든 그늘이 동네 유치원이었던 셈입니다. 아름드리나무에 두꺼운 밤나무 껍질 사이로 크고 작은 개미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손으로 잡다가 놓았다가, 골을 따라 올라갔다가 껍질을 따라 내려왔다가, 그늘에 앉아 한여름 낮을 보내는 동네 할머니들 틈에 놀고 있었습니다. 파리도 머리에 앉았다가 다리에 앉았다가, 내 몸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팔굽에나 무릎에나 어떤 때는 머리에까지 헌데를 달고 살았는데, 파리가 헌데를 노리느라고 내 몸을 좀처럼 떠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파리에게는 맛있는 고름이 유혹입니다. 그렇게 파리가 내 몸뚱이를 위성처럼 돌다가 그만 귀속으로 한마리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파리도 실수를 한 것입니다. 다시 돌아 나와야 하는 막다른 골목을 들어가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파리가 나오려면 들어간 길을 발로 기어 나오면 될텐데, 파리도 위급했던지 날아서 도망을 가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잠시 조용했다가 '윙-' 날고, 날개짓이 잘 되지 않으니까 잠시 조용했다가 다시 '윙-' 하고, 자세를 바로 잡는지 또 잠시 부스럭거렸다가 다시 날아오르는지 '윙-' 했습니다. 부스럭거릴 때야 견딜만 했는데, 날개짓을 할 때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뇌속에 폭탄이 터지듯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들에게 귀에 뭐가 들어갔다고 해도 들어가면 나오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파리가 나오려고 의 날개짓을 할 때마다 온 몸이 오그라들고, 머릿속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같습니다. 엄마를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가 있는 집으로 달려오다가도 파리가 날개를 치면 달리던 발걸음도 옮길 수 없습니다. 뛰다가 쪼그려 앉아 날개짓이 멈출 때까지 귀를 감싸쥐고 나도 쉬어야 합니다. 동네 가운데서 집에까지 오는 동안 네댓 번은 쪼그려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멈춰야했습니다. 마침 엄마가 집에 계셨습니다.

  “엄마, 귀속에 파리가 들어갔어요. 지금 귀에서 날고 있는데 소리가 엄청 커요. 아무리 쾅쾅 뛰어서 빼내려고 해도 안 나오고, 손가락을 넣어서 꺼내려고 해도 안 나와요. 엄마, 얼른 꺼내 줘요.”

귀를 잡아당기면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엄마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지?'하고 한 번도 고민을 하지 않으시고, 부엌에서 기름병을 들고 나오시더니, 마루로 올라와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우랍니다. 귀구멍을 당겨서 열고는 젓가락으로 기름을 한 방울 찍어서 귀속으로 흘려 넣었습니다. 파리가 또 날아서 나오려고 날개짓을 하더니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기름이 날개에 묻어서 몸에 달라붙었는지 무거워서였는지 날개짓을 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제서야 파리는 제 발로 걸어서 귀구멍을 나왔습니다. 엄마의 기지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엄마는 역시 엄마였습니다. 그 후로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귀에 뭐가 들어가서 괴로웠던 적은 없습니다.


  귀에 뭐가 들어가서 괴로운 때는 목욕을 할 때 가끔 생깁니다. 다른 개울은 한길이 되는 소는 없습니다. 그러나 둥둥소는 다릅니다. 둥둥소는 장정에서 사동계곡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바위 아래 생긴 소입니다. 딱히 길도 나 있지 않아서, 사동이나 안뜰에서 오는 사람은 논둑길로 가고, 장정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이미 물에 빠져서 바위를 타고 넘어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전에는 거의 목욕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이 찰뿐만 아니라, 해가 뜨는 동쪽은 물이 내려 떨어지는 곳이라 해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낮에는 너른 바위가 따뜻하고, 다이빙을 할 수 있는 바위가 3단으로 돋아 있어서, 물에 풍덩풍덩 뛰어 들기 좋았습니다. 사동 사는 종남이는 어느 위치에서건 다이빙의 묘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발만으로도 헤엄을 친다고 총쏘는 흉내도 내 보였습니다. 둥둥소는 긴긴 뜨거운 여름 중에 오후 늦게 찾아가면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6학년이 되면 다른 동네를 다녀도 그리 무섭지 않은 때입니다. 그날은 너무 더워 학교가 끝나고 곧바로 남천으로 가지 않고 둥둥소에서 목욕을 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한낮을 지나기만 하면 기우는 해가 둥둥소를 더 운치있게 합니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둥둥소 속까지 비춰 보석이 흐르는 영롱한 물속을, 물안경을 쓰지 않고도 물고기와 함께 헤엄칠 수 있습니다. 한 길도 넘는 바닥에 물벌레도 보이고, 무지개 타고 물살을 가르는 피라미가 도망도 치지 않고, 바위벽에 붙어있는 우렁은 고깔을 쓰고 여행을 합니다. 종일 놀아도 눈에는 아무 자극이 없습니다. 옆 친구가 보기에 흰동자가 빨게졌다고만 할 뿐입니다. 물속이 엄마 뱃속인양 싫컷 놀고 나서야 물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귀에 물이 들어갔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귀에 물을 빼려고 그동안 물 밖에서 햇볕에 달궈져 따끈따끈해 진 돌에서 발 동동 들면서 동그란 돌을 찾습니다. 너른 바위로 올라가 귀에 대고 콩콩이 타듯 콩콩 뛰어 오릅니다.


  이렇게 귀에 들어간 물을 빼내는 모습은 보았어도, 귀에 뭐가 들어가 죽겠다고 찾아 온 적은 없었습니다. 작은 파리의 날개짓도 가까이 들으면 폭탄 터지는 소리처럼 크게도 들을 수 있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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