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았으니 먹는 것은 무엇보다 귀합니다. 겨울에는 집에 거두어 쌓아 놓은 것을 먹습니다. 감자는 광에서 꺼내다 먹고, 고구마는 사랑방 위목에 둥우리를 만들어 쟁여 놓은 것을 먹고, 옥수수는 겨우내 때껴서 쌀대신 밥으로 해 먹습니다. 그것도 겨우내 질리지도 않게 파먹어서 봄이 되어 먹을 거리가 다시 생기기 전에 떨어집니다. 봄에 버들강아지가 나오고도 한참을 있어야 우리 입에 넣을 것이 나옵니다. 참꽃을 비롯해서 찔레에, 송구에, 조금 더 지나면 딸기와 오디가 익어서 우리의 군입을 달래 줍니다.
찔레는 참꽃, 그러니까 진달래가 피고 나면, 가시나무에 돋는 새순입니다. 젓가락처럼 하늘을 향해 똑바로 솟아오르는 연한 찔레순을 잎사귀를 떼어내고 그냥 씹어 먹으면 됩니다. 그냥 순한 맛 그대로지 단맛도 없고, 신맛도 없고, 물맛입니다. 조금 더 지나서 찔레 대궁이 딱딱해지기 시작하면 밑동은 잘라내고 순내기를 꺾어 껍질을 벗겨 먹으면 됩니다. 찔레 껍질은 손톱으로 잡고 올리면 착하게도 끝까지 잘 벗겨집니다. 껍질보다 더 연한 색으로 촉촉한 속살이 깨물 때마다 입속에서 똑똑 떠집니다.
찔레는 학교 가는 길이나 들에 갈 때는 길가에서 흔히 먹을 수 있습니다. 아무데서나 납니다. 그래서 영구든지 종구든지 쉽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송구는 산에나 가야 먹을 수 있습니다. 송구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 먹을 수 있습니다. 아직 골짜기에 잔설이 남아 있을 때에도, 소나무에는 물이 올라 솔잎 색깔이 밝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송구 먹을 수 있는 시기의 시작입니다. 물론 봄이 무르익을 때가 송구맛이 가장 좋은 때이긴 합니다. 6.25를 지나면서 헐벗은 산에 소나무를 심어 조림을 해 놓았는데, 7,8년을 컸으니 어른 키보다 조금 더 자랐을 만합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든지, 아니면 곁가지를 잡아당겨 꼭대기 가지까지 올라잡든지 해서, 소나무의 가장 위에 똑바로 선 가운데 줄기를 낫으로 찍어 내립니다. 이 가운데 가지가 가장 굵고 똑바라서 가장 먹음직스럽기 때문입니다. 낫으로 겉껍질을 얇게 벗겨내면 속껍질에서는 이미 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한입 물고 하모니카 불듯이 쓱쓱 문지르면 달콤한 물이 한입 가득합니다.
딸기도 가고, 오디도 무르고, 봄꽃이 시들 때 쯤 가장 먼저 익는 과일은 살구입니다. 앵두가 있긴 한데, 앵두는 나무도 작고 열매도 작아, 봄이 지나도 입맛한번 못보고 계절을 지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살구는 어찌 됐든지 한두 번은 먹어야하는 양식입니다. 살구나무로 치면 원각이네 살구가 으뜸입니다. 나무도 컸고, 작년에는 살구알도 또 엄청 컸습니다. 동네 초입에 있어서 살구 익는 일정이 친구들은 물론 동생들과 나누는 매일의 중요 점검사항이었습니다.
살구는 파래서 잎과 구분이 안 되다가 익으면서 노랗게 변합니다. 노랗다 못해 햇살을 많이 받는 쪽이 붉은 점이 돋다가, 그 점이 많아지면 아주 화장을 한 것처럼 빨갛게 무르익어갑니다. 살구를 입에 넣다말고 붉은 점을 손으로 문질러 닦다가 보면 봉순이 볼에 난 주근깨가 생각납니다. 볼그레한 빛에 붉은 점이 다닥다닥붙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살구를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입에 돈 군침이 발바닥에서는 자석으로 변해 땅에 붙었나 봅니다. 혹시 땅에 떨어진 것이라도 없는지 보려고, 살구나무 밑으로 발이 저절로 갑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그런 마음을 벌써 압니다. 떨어진 것을 주어 두었다가도 몇 알 건네주고, 손닿는 가지에서 두어 개 따 주기도 합니다. 살구를 터는 날은 잔치날 비슷합니다. 긴 밤나무 장대를 가져다가 꼭대기부터 모조리 털어서 한꺼번에 처분을 했습니다. 몰려 온 아이들에게 안겨 주고, 이웃집에도 바구니로 돌리고, 동네가 한번 먹고 지나가는 별미입니다.
배
우리집 아래는 세 집이 있습니다. 집에서 내려다 보면 왼쪽으로는 현종이네 집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인수네 집이 있었고, 가운데는 종하네 집입니다. 종하네 돌담에는 아름드리 배나무가 있습니다. 이 배나무는 돌배도 아닌 것이 고목이라서 배도 많이 달립니다. 지나다가 어쩌다가 배가 먹고 싶어 하나 따서 이빨로 깨물어 보면 어리지만 날카로운 이빨도 안 들어갔습니다. 마루에서 지켜보았든지, 지나가면서 배를 들고 있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청구는 익지도 않은 배를 따먹었다'고, '남의 배를 함부로 따먹었다'고, 동네가 다 시끄러워집니다. 종하네 배는 언제나 우리의 선악과였습니다. 배가 다 익기 전에, 나무에 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허기진 배는 나무의 배에 번번이 굴복했습니다. 안 따먹고 지나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날이 더워서 그늘에서 쉬어가려고 해도, 이 배나무 밑에서는 쉬지도 않습니다. 빨리 지나치는 것이 그나마 유혹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집 마당이 높아서 바로 바라보면 종하네 배나무 위부분에 달린 배도 한눈에 보입니다. 배가 다 익으면 파란 색이 좀 여려지기는 하지만, 크기는 어른 주먹만한 것이 제법 살점이 있습니다. 지나다가 어쩌다가 배가 떨어져 깨진 것을 발견할 때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 줍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막대기를 들면 이미 알테고, 한발로 찍어 올릴 수도 없고, 안 보이는 손이라도 달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도깨비감투라도 쓰면 좋겠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더니, 까마귀도 야속할 때가 있습니다. 참외밭에서는 신발끈도 고쳐 매지 말고 배나무 아래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더니, 도깨비감투라도 쓰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살구를 털듯이 이 배도 날을 잡아 털 것입니다. 종하 아버지가 밤 터는 긴 장대를 들고 올라가, 한꺼번에 털어서 가까운 이웃에 몇 개라도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나 올지 올해는 기약도 없습니다.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배가 정 먹고 싶으면 꼴지게를 지고 뱀재로 갑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풍기 장으로 가는 길, 꼬불꼬불 산을 돌고 내를 둘러가 뱀 닮았다는 길, 가도가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먼 길, 뱀재길 좁은 길을 한 줄로 앞사람 달은 고무신 뒷꿈치를 따라, 꼴을 베러 갑니다. 뱀재의 꼴은 엄청 큽니다. 양짓말이나 약물래기나 어시래미보다는 뱀재는 골이 깊어 풀도 크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깊은 골에 그늘에서 자라 연해서 소도 좋아했습니다. 내 한 길도 넘는 풀을 세 단으로 묶어 한 짐을 지우는데는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꼴 베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 남는 시간은 돌배를 따먹는 것입니다. 꼴짐을 지고 나오다가, 지게를 쭉 받쳐 놓고, 작심하고 나무에 올라갑니다. 돌배는 정말로 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살구만한 크기지만 살구처럼 동그랗지는 않고, 한참 더 자랄 것처럼 꼭지와 배꼽의 길이가 더 길지만, 더 이상 자라지는 않고 배의 흉내만 내서 돌배였습니다. 종하네 배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데서 이미 상처로 옹가진 마음을 다 풀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꼴짐에 몇 개 박아 온 돌배는 영구와 종구의 얼굴도 환하게 했습니다.
과수원 서리
장정을 내려오다가, 다 내려와서 있는 과수원은 맛있는 과일의 보고입니다. 거꾸로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교회를 지나 하늘 높이 솟은 낙엽송 네 그루를 지나, 왼쪽으로 돌면서 시작되는 과수원은, 아카시아 가시나무 사이로 열매를 훔쳐보면서 얼마나 익었는지 가름해 보는 일은 우리의 두려운 즐거움입니다. 과수원 주위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도록 아카시아나무를 심었습니다. 과수에 지장을 준다고 키는 자라지 않도록 울타리 높이만큼 해마다 잘라 주었습니다. 자른 나무는 울타리를 또 보완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가시는 남천과 남조로 드나드는 자전거에는 지뢰가 되기도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봉호형이 단양에서 장정까지는 잘 타고 왔어도, 과수원을 지나다가 가시에 찔려 '빵' 소리를 내며 터지는 자전거를 보고는, 우리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몰랐습니다.
과수원은 장정쪽으로 절반은 복숭아와 자두나무가 있었고, 남천쪽으로 절반은 사과나무입니다. 복숭아와 자두는 여름이면 익었고, 사과는 가을에나 익었습니다. 과수원 서리를 한 이야기는 언제나 전설처럼 돌았습니다. 아주 윗대 윗대 형들에게서부터 최근에 일어난 서리까지, 남천은 물론 남조 사람들과 원정을 왔다는 신구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년이 어릴 때는 서리하는 것을 보거나 서리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병아리 다리를 벗어 어느 정도 종아리에 힘이 오르고, 간도 커졌을 때 가끔은 서리를 작당하기도 합니다.
복숭아가 익을 때는 한여름이라 난닝구만 입을 때입니다. 책보를 매면 남자는 어깨에 걸쳐 매고 여자는 허리에 가로 매는데, 복숭아서리를 할 때는 남자라도 난닝구를 반바지에 집어넣고 그 위에다가 책보를 여자처럼 단단히 동여맵니다. 나는 한 학년인 원각이와 눈빛을 주고 받았습니다. 책보를 고쳐매고 먼저 누가 오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 주인이 있는지 없는 지를 살폈습니다. 마침 주위는 고요하고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가시나무를 옆으로 재치고 살금살금 기어들어갔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따서 목으로 해서 난닝구 배에 집어넣었습니다. 배에 가득 차 애기 밴 배를 잡듯이 둘러잡고 살금살금 나왔습니다. 길에 나왔을 때는 빨리 가로질러 언덕을 내려가 개울로 들어가야 합니다. 책보를 풀어 놓고 복숭아를 물가에 쏟았습니다. 복숭아와 배를 함께 씻어야합니다. 아주 옷을 벗어서 빨고, 웃통을 벗고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복숭아 깔끄러기에 깔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목욕이라야 책보를 끌러 놓고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 앉으면 그만입니다. 물에 엎드리기도 하고, 앉아서 끼얹기도 하고, 잠수도 하고, 복숭아와 함께 목욕을 했습니다. 개울가에 젖은 몸으로 앉아서 서리한 복숭아를 나누어 먹는 그 맛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쩍쩍 갈리지는 복숭아가 달착지근했습니다.
사과서리는 과수원을 거의 다 지나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귀퉁이에서 시작합니다. 길에 잇대어 있는 아카시아나무 울타리는 굵고 촘촘하지만, 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울타리가 허술했습니다. 풀섶에 아카시아나무 밑둥에는 가지가 별로 없어서 틈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을날 남천에 사는 또래들 다섯이서 올라가다가 사과 서리를 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원각이는 길에서 누가 내려오는지 올라가는지를 살피고, 용심이는 과수원 끝자락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주인이 혹시나 오는지 살피고, 나와 덕호와 상인이 셋이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벌써 누군가 드나든 흔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작년에 난 길인지도 모릅니다. 풀이야 다 자라도 헤치면 그만이지만, 가시나무가 문제였는데 여기는 드물었습니다. 아직 다 익지도 않았지만, 푸른빛이 가셔지고 있었습니다. 사과는 씻을 것도 없습니다. 그냥 겉옷에 쓱쓱 문지르기만 하면 됩니다. 푸른 사과는 신맛이 있지만 단맛이 더 많았습니다. 지난 여름 접과를 하면서 울타리를 건네 준 어린 사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설 때나 추석에 큰집에서 제사를 지내느라고 아래 위를 잘라 쌓아 놓은 사과만큼은 붉지 못하지만, 맛은 그만이었습니다. 큰 길로 나가서 먹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고 풀숲 속에 앉아 다 먹고 나갔습니다. 사과로 배를 채우고 올라가는 남천길은 고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웅이가 과수원에서 서리를 하다가 잡혔답니다. 진웅이는 영구의 동갑내기 친구인데, 서리를 하다가 잡혀서 나무에 묶였다가 풀려났답니다. 그 충격은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장난삼아하는 서리라고 해도 과수원 주인으로써는 속상하기 이를데 없었을 것입니다. 애써 지어 놓은 농사를 못 보는 곳에서 야금야금 도둑을 맞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혼을 내 주어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붙잡아야 겠다고 마음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잡혔겠지요. 드나드는 개구멍도 그리 크지 않아서 왠만하면 도망쳐 나와 잡히지는 않을 수 있는데, 주인은 단단히 화가 나서 퇴로를 막아섰을지도 모릅니다.
진웅이는 오래 과수원에서 잡혀 있었습니다. 말로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기야 주인 아저씨도 손으로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겠지요. 잡아서 단단히 혼은 내 주어야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나무에 묶어 놓게 된 것이구요. 과수원에는 개도 있었습니다. 과수원 중앙에 있는 집앞에 매어 놓아서 과수원 끝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개도 몰랐던 것입니다. 나무에 묶어 놓은 진웅이를 향하여 개는 또 모질게 짖어 댔을 것입니다.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덤비려고 몸부림을 치는 개를 묶은 끈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개에게 뜯겨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협도 느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진웅이를 풀어 주면서 주인 또 좋은 소리는 안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날이 어둑어둑해서야 진웅이는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서는 또 부모고 형들이고 가만 두지를 않았습니다. 어째서 남의 것에 손을 댔냐느니, 왜 따먹었냐느니, 그 천덕꾸러기 작은 몸뚱이를 들들 볶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눈치만 볼 뿐 한마디도 거들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습니다. 정말 진웅이는 간도 컸습니다. 서리를 해도 몇이 어울려서 할 일이지 혼자 망보는 사람도 없이 들어가다니, 대단했습니다. 여럿이만 했어도 그렇게 묶이지는 않았을 테고, 묶여도 저물도록 소식이 없지는 않았을 테고, 설사 이런 절차를 다 당해도 여럿이었다면 최소한 외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튿날에 일어났습니다. 진웅이가 저수지 넘어가는 묘둥우리에서 농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논둑에 뿌리는 제초제를 마셨답니다. 죽는지 안 죽는지 알아보려고 마시기 전에 묘 잔디에 부어 본 흔적이 있더랍니다. 우리는 슬펐습니다. 친구들이고 동생들이고 서리를 한 사이에는 눈도 마주칠 수가 없었습니다. 진웅이가 우리 대신 죽었습니다. 그 후로 다시는 서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우리는 과수원 앞을 다니지만, 과수원은 아주 멀리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