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여름방학에는 언제나 식물채집과 곤충채집이 방학숙제에 끼여 있습니다. 식물채집은 안 쓴 새공책에 합니다. 민들레, 질경이, 강아지풀, 쇠비듬 등 공책에 들어갈 만큼의 크기를 캐다가, 물로 씻어 책으로 꼭 눌러서 말린 후, 종이로 띠를 만들어 밥풀로 붙여서 고정한 다음에, 빈칸에 이름을 쓰면 됩니다. 공책 장수만큼도 못하고 그 절반의 개수만큼만 해도 가운데가 볼록하니 울퉁불퉁 볼품은 영 없습니다. 멋지고 깨끗하게 못해서 방학이 끝나는 날 학교에 가지고갈까 말까를 언제나 고민해야 했습니다.
곤충채집을 하기는 재미있습니다. 곤충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매미를 잡고, 잠자리를 잡고, 나비 등을 잡는 것입니다. 식물채집은 공책에 붙여갈 수 있지만, 곤충채집은 잡아 놓기만 했지 보관하고 전시해 갈 상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잡아야 상하거나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알콜을 주사하면 된다는 데, 그런 거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잡아서 고정해 놓을 핀도 하나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곤충채집은 매미나 잠자리를 잡는 것으로 그치지, 한 번도 방학숙제라고 가지고 간 적이 없습니다. 곤충채집을 하라고 여름방학을 할 때마다 내 주는 숙제는 매미를 마음대로 잡아도 된다는 허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숙제를 하려면 매미를 꼭 잡아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천에는 밤나무가 많습니다. 밤나무는 계절마다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봄에는 꽃이 피어서 다람쥐를 만들 수 있는 밤꽃을 떨구어 줍니다. 여름에는 매미가 붙어 울어 어느 가지에까지 붙었으면 올라갈 수 있고, 어디까지는 돌로 맞춰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합니다. 가을에는 밤의 크기에 따라 나무의 좋고 나쁨을 구별해서 찾아가는 계절입니다. 겨울이면 밤나무는 연이 걸리는 나무와 걸리지 않는 나무로 이분됩니다.
가을에 밤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누구네 밤나무의 밤의 크고, 누구네 밤나무는 작아서 주을 것도 없는지 대충 정보교환이 끝납니다. 작년을 생각하면 누구나 아는 것인데, 서로 물어서 확인에 불과하긴 합니다. 밤을 주우려면 새벽 일찍 일어나 밤나무 밑으로 찾아 갑니다. 누구네 밤나무이든지 떨어진 것에 대해서는 줍는 사람이 임자였기 때문입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밤은 정자나무로 쓰는 동네서 제일 부자였던 권씨네 아저씨의 밤이었습니다. 엊그제는 인수가 제일 먼저 갔는데, 오늘은 영구가 제일 먼저 갔다가, 아홉 개를 주워 왔다느니 하는 무용담이 학교에 가는 발걸음보다 빨리 전해집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지를 못해서 한 번도 가장 먼저 그 큰 알밤을 주워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밤나무는 두 그루가 있었는데 모두 쥐밤이어서 찾아 가지도 않습니다. 아니, 부잣집은 밤나무의 밤도 크고, 가난한 우리집은 밤나무의 밤까지도 쥐밤이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가을이 되기 전에 여름에는 쥐밤나무라도 밤나무는 역시 밤나무입니다. 밤나무에는 매미가 많이 붙기 때문입니다. 매미가 밤나무를 좋아해서 많이 붙는 것이 아니라, 마을 가운데 큰 나무는 밤나무 밖에 없기 때문에 매미가 날아왔다하면 밤나무에 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무는 몰라도 우리 밤나무에 앉은 매미는 내 매미입니다. 뜨거운 여름방학이면 마루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도, 동생들의 시중을 들다가도, 밭에 나간 엄마의 명령으로 감자를 깎다가도, 매미 우는 소리만 났다하면 신발을 끌고 밤나무 아래로 소리를 찾아갑니다. 여름방학 때 밤나무는 매미나무입니다.
매미잡기
매미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색깔과 크기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밤나무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말매미는 갈색으로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하게 큽니다. '쩌르르르-' 하고 우는 소리가 굴곡도 없이 길게 빼는 것이, '나 여기 붙었으니 올테면 와봐라' 하고 당당하게 나를 부릅니다. 말매미는 잡으면 날개로 푸득이는 품이 커서 손 안에 가득 차는 느낌입니다. 참매미는 검은 색이 주로 있고 흰색이 조금씩 섞여 있는데,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예의 그 '맴맴맴' 하는 소리를 냅니다. 다른 매미도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소리를 내기는하지만, 말매미는 각도가 그리 크지 않고, 참매미는 조금 섞여 있는 흰색이 보여 더 크게 움직이는 듯이 보입니다. 지울매미는 참매미보다도 더 작은 것이 옅은 갈색입니다. '찌울찌울찌울' 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야멸차게 우는지 여름 하늘이 찢어져서 그 사이로 소나기가 내릴 것처럼 울어 댑니다.
소리를 듣고 매미의 종류는 물론 큰 밤나무인지 작은 밤나무인지 이미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밤나무는 땅에서부터 한 갈래로 쪽 올라가 어른의 키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또 그 위에서 서너가지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매미가 붙었어도 높이 붙어서 나무에 올라가서 잡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노리는 나무는 주로 큰 밤나무인데, 큰 밤나무는 땅에서부터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이, 한 갈래만해도 작은 밤나무만큼 굵어서 그 위에서 갈라진 가지도 얼마나 많은지, 나무 하나에 숲이 하나를 이룬 것 같습니다. 여기가 내 구역입니다. 이 나무에 붙은 매미는 내가 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큰 밤나무 세 갈래 중에 한 가지는 집 뒤곁으로 뻗어 있습니다. 마당 텃밭에 서서도 이 가지에 붙은 매미는 얼마든지 살 필 수 있습니다. 아래서 쳐다보면 보이지 않아도 소리를 따라 살피고 섰으면 울면서 둥치를 싸고도는 매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끝내 나타나지 않아도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틀림없이 매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대게는 가까이 갈 때까지 매미는 울고 있습니다. 앞에 눈쪽으로 손이 가면 놓치지 십상이고, 뒤에 꽁무니쪽에서 손이 가면 잡기가 더 쉽습니다. 두꺼비가 파리 잡듯이 거의 움직임이 없이 다가가다가, 손을 재빨리 움직여 갑자기 덮쳐야지 잡을 수 있습니다. 나무 가지 끝에까지 올라갔어도 못 잡고 날아가는 매미를 쳐다보고 내려올 때는 올라온 수고와 함께 내려갈 걱정이 훨씬 큽니다. 매미를 잠아서 내려올 때는 기뻐서 올라온 수고도 잊고 내려갈 걱정도 없습니다.
여름날이 한창 덥고 건조한 때는 매미가 소리도 야물고 눈치도 빨라집니다. 이런 때는 매미도 배가 불렀는지 인기척만 느껴도 도망을 가고, 정 급할 때는 소리도 멈추지 않고 날고, 날아가면서 소리를 마무리하고는 합니다. 이 때는 매미가 처음 나올 때만큼 쉽게 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 나무 아래에 와서 매미를 살필 때는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 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데, 아주 높은 가지에 붙어 우는 매미도 올라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애시당초 마음을 접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닙니다. 우리 밤나무에서 우는 매미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숨쉬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돌을 던져서라도 잡아야 합니다. 그 때부터 돌팔매를 연습했습니다. 올라가지 못하는 높은 곳의 매미를 맞추기 위해서 표적을 정해 놓고 돌을 던져 맞추는 것입니다. 언덕 아래 혼자 핀 꽃을 던져 맞추고, 빈 지게를 지고 가다가 가죽나무가 서있으면 돌을 던져 맞추고, 바위에 핀 하얀 바위꽃을 맞추고,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돌을 던졌습니다. 양 손에 돌을 잔뜩 주워 들고서 손에서 없어질 때까지 맞추고, 길을 가다가 돌을 또 잔뜩 들고 가면서 눈에 띄는 대로 목표를 정하고 던졌습니다. 겨울에도 내년 여름에 잡을 매미를 생각하면서 던졌습니다. 한 참 연습을 한 후에는 올라갈 수 없는 매미는 돌을 던집니다. 나무에 쿵 울리는 소리로 도망가는 매미도 있었고, 맞을 때까지 울다가 떨어지는 매미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나와 눈싸움을 하면, 아빠의 눈 던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한 실력이, 다름 아닌 바로 매미를 잡은 데서 쌓인 내공임을 아무도 모릅니다.
비둘기 알
큰밤나무 두 번째 둥치는 언덕 위 밭쪽으로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이 가지는 위 밭에서 더 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밤을 털 때도 나무에 올라가는 것보다도, 윗밭에 서서 터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문제는 세 번째 가지인 벼랑 위로 뻗은 가지입니다. 이 가지 아래로는 벼랑이 너무 심해서 사태가 났는데, 식물이 씨앗을 붙이지도 못하고 사시사철 뻘건 흙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비탈입니다. 눈이 올 때도 미끄러지는 비탈이라 쌓이지도 못합니다. 이 가지 위에 매미가 앉아도 나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다람쥐처럼 올라가 손에 쥐고야 말았습니다.
매미를 보고 나무로 올라간다고 해서 매미를 다 잡는 것은 아닙니다. 말매미는 제일 잘 날아가는 매미입니다. 몸집이 커서 눈도 발달했던 모양입니다. 멀리서도 눈치를 채고 날아갑니다. 지울매미는 그 중 가장 몸집이 작은 매미인데, 여름이 기울고 찬바람이 돌기 시작할 때면 밤에 모깃불을 피워도 그 불빛을 보고 마당가로 날아와 축축 쳐지기도 합니다. 참매미는 그 중간쯤 되는 크기로 많기도 하고 그만큼 잘 잡히기도 하는 매미입니다. 그런데 참매미는 수놈만 우는데, 우는 매미는 놓치고 내려오다 보면 울지 못하는 암놈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울지 못하는 놈이라도 잡아 와야 직성이 풀립니다. 여기서 내려오려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기도 합니다. 뻘건 비탈이 미끄럼틀에 비하면 배나 더 높게 서있는데, 한 번 떨어졌다하면 저 아래 길바닥까지 가는 것을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 가지 끝에서 떨어지면 곧 바로 비탈 아래 길바닥으로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떨어졌다하면 국물도 없어 보였습니다.
바로 그 가지였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난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매미를 잡으러 그렇게 오르내리던 가지에 올라갔더니 글쎄, 개학을 하고 며칠 못 올라와보던 사이에 비둘기가 집을 짓고 알을 네개나 낳아 놓았습니다. 산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갔습니다. 나도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마터면 몸도 떨어질 뻔 했습니다. 그 까만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 했습니다. 산비둘기도 나를 놀래켜서 알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소리를 그렇게 크게 나게 날개짓을 한 모양입니다.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정신을 차리고 나자, 비둘기를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알을 꺼내서 가져가면 품어서 새끼를 깨게할 수는 없겠고, 하는 수 없이 알을 그냥 두어서 어미 비둘기가 깨게는 하되, 날개에 힘이 올라 날아가기 전에 잡아다가 내가 먹이를 줘서 기르면, 다 커서도 내 말을 잘 듣는 비둘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일단 알을 그냥 두고 내려 왔습니다.
그 후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무에 올라가 비둘기 알을 확인했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보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나무로 올라가고, 자기 전에도 한 번 보고 와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비둘기를 내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상상만해도 즐거웠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매를 잡아다가 훈련을 시켜서 토끼도 잡고 꿩도 잡는다는데, 나는 그런 사냥은 못해도 팔에서 날려 보내면 하늘 높이 날았다가, 휘바람을 불면 멀리서도 주인을 찾아와 내 어깨에 가뿐히 내려앉는 비둘기를 꿈 꿨습니다. 저절로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매미를 잡는 것은 동생들에게 이야기 했어도, 산비둘기집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로 했습니다. 부모님도 몰랐습니다.
밤나무에 올라가는 위험쯤이야 조심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오고난 후에는 밤나무 껍질이 미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껍질이 젖었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다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서 아직도 알인지, 아니면 새끼가 됐는지만 확인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알이 사라졌습니다. 그날도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나무로 올라갔는데, 집은 여전한데 그 안에 있어야할 비둘기 알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치가 이상합니다. 아버지도 내 낙심한 인상을 살피시는 것 같습니다. 그제야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산비둘기 알을 아부지가 내려왔어요?”
그랬답니다. 내가 하도 나무에 자주 올라가서 떨어질까 봐 산비둘기 알을 가져다가 닭둥우리에 넣어 두었답니다. 닭이 알을 낳으러 들어갔다가 품어서 새끼를 까라고 넣어 두었답니다. 닭은 소죽솥 옆에 짚으로 알둥지를 만들어 두어서 번갈아 알을 낳기는 하는데, 자기 알보다 훨씬 작은 비둘기 알을 품어서 깰 리가 없습니다.
“엄마, 그게 말이나 되요? 닭이 지금 달걀을 품지도 않았는데, 산비둘기 알을 거기다 넣어 둔다고 해서 품어서 까겠어요?”
하고 마당을 탕탕 구르며 땡깡을 부려도 이미 늦었습니다. 하도 기가막혀 알을 만져봐도 소용없게 생겼습니다. 닭은 꼬꼬댁거리고 내려와 알을 낳았다고 짖기는 해도, 조용히 앉아서 남의 알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비둘기 알은 골아서 거름더미에 버렸고, 결국은 비둘기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르는 척 해도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에 오르면서도 까만 벼랑을 내려다보고 언제나 위험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부모님은 그 나무에 올라 보지 않으시고도 위험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표시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은 내 든든한 후원자이셨습니다. 실 끊어진 연처럼 혼자 나가 객지생활 할 때도, 언제나 그 때처럼 내 어려움을 다 아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보급로 끊어진 남부군처럼 고학을 하느라고 혼자 나가 서울 바닥을 굴러먹어도, 날 위험에서 구해 주시라고 언제나 기도하시리라 믿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