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운동회는 모두 바라는 날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부터 연습을 해서, 거의 한 달을 연습한 것을 선보이는 잔치입니다. 달리기를 하면 상을 준다고도 하지만 달리기를 못하는 내게는 별로 반가운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래도 운동회는 즐거웠습니다. 날씨도 어쩌면 그렇게 좋은지, 햇볕에 나와 있어도 덥지 않고, 그늘에 들어가 있어도 춥지 않습니다. 운동회 전날이면 선생님들이 먼저 개선문을 세웠습니다. 한 아름이 넘는 네모진 기둥 두 개 위에 가로로 연결된 문을 세웠는데, 물감으로 색도 칠하고 굵은 글씨도 썼습니다. 무용을 하거나 덤불링을 하거나, 운동장으로 들어설 때 그 문을 통해 들어가고, 다 하고 나올 때도 영차영차하며 그 문을 통해 나옵니다. 더 신나는 것은 만국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의 국기는 몇 되지 않지만, 국기 아래를 지나면서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면서 영국이다, 미국이다, 프랑스다 하고 맞춰나갑니다. 황토빛 운동장에 하얀 줄은 달리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합니다. 어서 내일이 오기를 고대하며 저문 그늘을 헤치고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운동회에는 운동복을 입어야 합니다. 검은 반바지에 흰 난닝구입니다. 백군과 청군은 머리에 쓰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남자는 모자의 색깔을 청색이나 백색을 썼습니다. 여자는 머리띠로 구분합니다. 여자의 머리띠는 한쪽은 청색, 다른쪽은 백색으로, 하나를 사면 얼마든지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모자는 청군모자와 백군모자가 아주 다르게 나왔습니다. 중간에 청군 백군이 바뀌는 날에는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연습할 때 나눈 편은 운동회를 다 마칠 때까지 철칙처럼 바꿀 수 없습니다. 운동회 때까지 운동복을 갖추어 입고 쓰는데도 몇날 며칠을 점검해야 합니다. 신발은 내친 김에 운동화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으면 맨발로 뛰는 것이 차라리 좋았습니다. 동욱이는 우리 학년에서 운동화를 가장 먼저 신었습니다. 동욱이가 달릴 때 밑바닥에 드러나는 노란색 생고무밑창은 모두 선망하는 대상입니다.
운동회에 달리기를 하기만 하면 난 언제나 4등을 면치 못합니다. 여섯 명이 한조로 뜁니다. 키 순서대로 서서,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여섯 명이 선생님의 총소리에 맞춰 달리면, 처음에는 내가 앞서서 출발을 한다고 해도 중간쯤에 가서는 세 명이 내 앞서 달려가고, 내 뒤에는 둘 밖에 없습니다. 도착지점에서 선생님이 팔뚝에다가 1등, 2등, 3등 하고 도장을 찍어 주는데, 내 팔에는 아무 도장도 찍어 주지 않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을 때는 선생님이 등수대로 팔을 끌어다가 1등 줄에 앉히고, 2등 줄에 앉히고, 3등 줄에 앉혀도, 4등 5등 6등은 아무데나 앉아도 된다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4등은 4등 줄에 안고, 5등은 5등 줄에 찾아가고, 6등은 가장 왼쪽줄로 가서 앉습니다.
나도 등수 안에 들 때도 있습니다. 운동회 연습할 때입니다. 다른 연습도 많이 하지만, 달리기도 운동회 전에 서너 번을 하는데, 이때는 3등 안에 들 수도 있습니다. 당번이 2명이 교실에 남기 때문에 달리는 맴버가 바뀌어 천신마고 끝에 3등 안에 들 수가 있습니다. 또 이 때는 실재 달리는 시합이 아니라 연습이기 때문에 잘 달리는 친구들이 전력질주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도 내게는 운동회 때도 등수 안에 들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다가 2등을 할 때는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운동회 날에는 당번이 교실에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나와 뛰기 때문에, 난 죽어라고 뛰어도 언제나 4등입니다. 1등은 연필 3개, 2등은 연필 2개, 3등은 연필 1개를 주는데, 난 언제나 운동회를 마치는 종례시간에 전체 참가자에게 한 권씩 주는 공책 한 권뿐이었습니다. 이것마져도 없었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손길이 몹시 허전했을 것입니다.
내가 저학년일 때는 몰랐는데, 4학년 때 영구가 1학년이 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달리기를 못하는 것이 몸이 원래 둔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6학년이 되면서 종구까지 1학년이 되자 확실해졌습니다. 영구나 종구는 연습할 때나 운동회날에나, 언제나 맡아놓고 1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1등을 해야하는데 하면서, 운동회 며칠 전부터 운동장을 달리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도 난 역시 3등 이상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발목을 다친 흉터를 생각해 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고무딸기를 따먹겠다고 아버지의 지게에서 낫을 빼내 휘두르다가, 왼쪽 발목을 찍어 아버지의 난닝구를 찢어서 피를 막고 아버지가 집으로 업고 뛰어 온 것입니다. 좌나 우로나 조금만 치우쳤다면 동맥을 건드려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고였습니다.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지혈만 시켜 엄지발가락 아래힘줄을 끊어진 채로 아물고 말았습니다. 힘줄이 끊어진 발로 달리니 오죽하겠습니까? 꼴지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빨리는 못 달려도 오래는 달리겠다고, 순발력은 없어도 끈기로 버티겠다고, 차라리 마라톤 선수가 되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운동회에는 달리기 외에도 여러 가지 종목이 있습니다. 학년마다 100미터 달리기는 개인전입니다. 청군백군으로 나눈 종목으로는 대표가 나와서 100미터 달리기, 학년별 계주, 줄다리기, 장애물경기 등은 팀으로 먹는 경기입니다. 경주가 아닌 단체 활동도 있습니다. 덤블링, 부채춤, 곤봉돌리기 등은 참관하는 학부모에게 보여주는 활동입니다. 재학생들의 운동회 후에는 마을 대항으로 어른들의 경기도 있습니다. 모래가마니 들기, 계주 등입니다. 어른들이 운동장 밖을 뛰어나가 반환점을 돌아오는 마라톤 경기도 있었습니다. 마을이 우승을 하면 우승기도 마을에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역시 덤블링이 가장 큰 관심거리입니다. 물구나무를 서고, 탑을 쌓고, 부채꼴을 만들고, 어깨 위에 서고, 처음에는 쉽고 단순한 동작을 했다가 점점 어렵고 복잡한 동작을 펼쳐보입니다. 난 생일이 2월이라서 7살에 학교를 들어가 친구들보다는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았습니다. 그래도 빠지지 않고 함께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물구나무서기를 집에서 연습했습니다. 발목을 잡아 주는 사람이 없어도 손을 집고 다리를 차 올려서 벽에 대고 물구나무를 섰습니다. 달리기는 4등을 해도 남자로서 덤블링은 빠질 수 없는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운동회 때에 가장 하기가 싫은 것이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하는 포크댄스입니다. 남자는 남자끼리 어울리고, 여자는 여자끼리 모여서 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남자와 여자를 골고루 섞어 놓으려고 하는지, 땡볕이 내리쬐는 교단 위에서 마이크로 소리소리 지르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포크댄스 연습을 한다고 하면, 모이기 전에 측백나무 울타리에 가서 꼬챙이를 두 개 꺾어 듭니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아야하는 순서가 되면 나무를 내밀어 잡게 했습니다. 왼손에 내민 막대기는 선희가 찌뿌둥한 얼굴로 잡았는데, 오른손에 내민 막대기는 춘자가 획 빼앗더니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와락 움켜잡는 것입니다. 그러잖아도 춘자와는 교회에 함께 다닌다고 둘이 친한 것 아니냐고 놀리는 아이들이 있는데, 포크댄스 한다고 둘이 손을 잡았으니 큰일났습니다. 춘자 손은 부드럽지만 뼈가 야무졌습니다. 그날 손의 감각은 오래 갔습니다.
운동회 점심
운동회 때는 뭐니뭐니해도 점심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운동장 위 무궁화화단에서 어머니가 싸가지고 온 김밥을 먹을 때입니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펴기도 하고, 사촌들과 자리를 함께 하기도하고, 어머니의 친구들과 함께 먹기도 합니다. 우리 음식과 이웃의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맛있어 보이는 현종이네 부침개를 집어 먹기도 합니다.
아직 영구가 입학을 하지 않고 우리 집에서 나 혼자 학교에 다닐 때입니다. 어머니가 지나가는 나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무궁화나무 아래 앉으라고 하더니, 감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감인지도 몰랐습니다. 남천이고 장정이고 그 동네는 감나무라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몰랑말랑하고 계란보다 큰 것이 오똑하니 조그만 두 손에 가득 잡혔습니다. 꼭지부터 한 입에 베어 물었습니다. 아, 이렇게 달 수가. 난생 처음 맛보는 단 맛입니다. 입에서 하나도 거부감이나 심한 자극이나 어떤 잡스런 맛도 없이, 순전한 단맛입니다. 마치 둥둥소에서 눈을 떠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형제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젖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염소를 길렀습니다. 아버지가 낮동안 풀을 뜯어 먹고 온 염소를 붙잡아다가, 땅에 박은 말뚝에 뒷다리를 매어놓고 양푼에 젖을 짜 받았습니다. 밥공기 하나는 되는 염소젖을 밥을 하고 난 숯불에 보르르 끓여 엄마 젖 대신 마시고 컸습니다. 그런데 염소젖을 끓일 때는 쉽게 넘치고 눌어붙는다고, 지켜 서서 신경써 불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덜 끓은 염소젖을 먹으면 부스럼이 많이 난답니다. 어릴 적 내 무릎과 팔굽에는 부스럼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원래 성격이 부산해서 그런지, 아니면 덜 끓은 염소젖을 먹어서 그런지, 하여튼 고름 찍찍 나는 헌데 딱지를 떼는 것은, 더욱이 빗물이 들어간 헌데를 눌러서 빗물과 고름을 함께 짜 낼 때는, 큰 농사 하나 마치는 기분입니다.
종구가 태어났을 때는 염소젖에서 분유로 먹이가 바뀌었습니다. 간스매 통보림보다 더 큰 동그란 깡통에 노란 빛이 조금 도는 분유는 참 맛있습니다. 동생들 준다고 따듯한 물에 타다가 한 숟가락 입에 털어 넣으면, 입에서 살살 녹았습니다. 분유도 맛있지만, 분유와 함께 타는 설탕은 더 맛있습니다. 설탕은 분유보다 더 빨리 녹았습니다. 설탕이 나오기 전에 당원도 하얗고 동그란 것이 혀에 올려놓으면 참 행복했습니다. 당원이 또 나오기 이전에 사카린은 맑간 결정이 씁쓰름할만큼 달았습니다. 당원보다 더 달고, 사카린보다 더 단, 설탕 한 숟가락은 세상의 단 맛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동생들 것이라고 먹지 말라고 해도, 몰래 부엌에 들어가 한 숟가락 퍼 먹고 나오는 재미는 세상을 다 가진듯했습니다. 그런데, 무궁화 나무 아래서 먹는 홍시는 그 설탕보다 더 달콤합니다. 설탕처럼 정제된 맛도 없고, 당원처럼 똑 쏘는 맛도 없고, 사카린처럼 쓰게 달지도 않고, 자연에서 나온 인간이 자연에서 나온 단맛을 먹는 자연 그대로 일치하는 달콤함이었습니다.
남천에는 상점이 없어서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사려고 해도 장정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불편하니까 마을 부녀회에서 가게를 하나 운영할 때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이 사는 양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일삼아 붙어서 가게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물건을 보관 했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와서 사면 되는 도록 의견을 모았습니다. 반 년씩 돌아가면서 물건을 맡도록 했습니다. 어머니가 부녀 회장이니까 가장 먼저 우리 집에 물건을 두었습니다. 팔 물건을 마루 다락에 두었는데, 비누도 있고, 파리약도 있고, 쭉 연결된 비닐 봉지에 담긴 사카린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비가 사탕입니다. 처음에 입에 넣으면 딱딱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살살 녹는 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은 들에 부모님이 나가고 없을 때 하나만 먹겠다고, 딱 하나만 먹으면 표시도 나지 않아 모를 거라고, 조심스레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습니다. 입에서 다 먹고 나자 또 손이 저절로 비가봉지로 갔습니다. 비가 사탕 껍질은 아궁이에 넣자니 엄마가 밥을 하려고 아궁이에 붙을 붙이다가 볼 것 같고, 거름더미에 버릴 수도 없고, 주머니에 넣어도 언젠가는 나올 것 같고, 하는 수 없이 뒷곁 밤나무 밑에 묻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비가를 하나 먹고 또 하나 먹고 묻은 껍질이, 껍질을 묻고 또 묻은 땅이, 내 한 발로 건널 수도 없게 넓어졌습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게 나쁜 사람이, 나도 모르게 되는 건 아닌가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비가도 엄청 맛있었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홍시는 그 비가보다도 더 맛있습니다. 홍시의 껍질은 얇았고, 속살은 처음부터 끝까지 몰랑몰랑하고 달고 부드러웠습니다. 입이 뻘겋게 홍시를 먹다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운동회를 한다고 분을 칠하고 오셨습니다. 분칠한 어머니의 얼굴이 더 고왔습니다.
어른들 대회
점심을 먹고는 어린이 순서가 끝나면 어른들의 경기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마을 대항으로 겨룹니다. 가장 먼저는 모래가마니 들기를 했습니다. 비료 한포만한 20kg의 모래를 가마니에 담아서 새끼로 총총히 엮어 운동장 가운데 한 줄로 가로 놓고, 마을에서 한 사람씩 대표로 나가 듭니다. 가장 오래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우승입니다. 들자마자 내려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선수로 나갔습니다. 7결에서 일곱명의 선수가 한 줄로 서서 들었습니다. 멀리서 봐도 다음에는 누가 떨어질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힘이 부치는 사람은 손부터 가늘게 떨기 시작합니다. 손에서 팔로, 팔에서 상체를 떨다가, 엉덩이까지 떨다가는 모래가마니를 털썩 털썩 내려놓고 맙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우리 아버지가 넷 중에 남았습니다. 아버지도 가마니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덕촌 사람보다는 덜합니다. 사동과 신구 사람은 아직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출렁출렁, 물푸레나무 가는 가지를 공중에 휘두를 때처럼 떨더니, 털썩 모래가마니를 내 던졌습니다. 이제 우리 아버지는 3등은 따놓았고, 2등도 할 수 있고, 1등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난 연필 하나도 못타는 4등을 했는데, 아버지는 조금만 더 들면 더 높이도 갈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덕촌 아저씨가 내려놓자마자 아버지도 가마니를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3등입니다. 아쉽지만 하는 수 없습니다. 남은 두 아저씨는 그때까지도 흔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등을 한 분은 키도 크지 않은 분이, 땅땅했습니다. 2등이 내려놓을 때까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래 가마니 들기는 사동이 일등입니다.
마을끼리 이어서 달리는 계주는 불꽃이 튀었습니다. 가로 그으면 100m가 모자라, 제대로 100m를 뛰려면 대각선으로 그어야하는 좁은 운동장에서, 덩치 큰 어른들이 힘껏 달리는 계주를 하는 모습은 박진감 넘칩니다. 일곱 마을 선수들이 달려도 어느 누구가 어떤 동네인지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유니폼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겨우 우리 동네 선수를 눈으로 따라 뛰면서 응원할 뿐입니다. 우리 동네 선수는 두 번째로 가유형입니다. 그런데 장정선수 하나가 달려가더니 가유형 어깨를 짚고 쓰러트리고 그 위를 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 끝나고 과수원 아래 모랭이 돌아갈 때 길을 막고 '장정 땅은 허락을 받고 다니라'고 한 바로 그 영균이 형입니다. 분명히 반칙입니다. 학생같으면 큰 벌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텐데, 어쩐지 큰 소동없이 조용히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장정의 형이 길에 침 좀 뱉고,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사람이라서, 선생님도 함부로 못하는구나 싶어서, 참 슬퍼졌습니다. 그 때는 외삼촌인 신현우 선생님도 없었고, 우리학교 1회 졸업생인 김익환 선생님도 없었을 때입니다. 반칙을 한 형을 아무도 벌주지 않아서 우리는 그대로 꼴지를 하고 말았습니다.
마라톤은 덕촌 아래까지 갔다가 온다고 합니다. 마라톤에는 인원제한이 없었습니다. 덩치 큰 어른들이 우르르 운동장을 벗어나서 측백나무 아래 방앗간 옆 내리막길로 내리달았습니다. 그 사이에 운동장에서는 줄다리기가 이어졌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돌아온다고 전갈이 오자 모두 운동장을 비웠습니다. 1등이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운동화를 신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참 늠늠해 보입니다. 다음 선수가 들어 올 때마다 혹시나 남천 선수가 아닌지 눈길을 모았습니다. 모래가마니 선수는 키가 작고 똥똥한 사람이었는데, 마라톤선수는 키가 크고 몸이 날렵한 사람입니다. 특히 마라톤은 상을 1등부터 6등까지 주었습니다. 상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좋은 밥솥입니다. 1등 해도 연필을 주는 어린이 경기와는 차원이 다른, 정말 선수 같아 보였습니다.
추석 배구대회
배구대회는 운동회날 하지는 않습니다. 운동회 다음날인 추석에 합니다. 어른들 대회라 역시 마을 대항입니다. 하루에 다 끝내는 경기입니다. 아침 일찍 7결 대표들이 모여 대진추첨을 해서 이기면 올라가고 지면 떨어지는 경기입니다. 여자어른들이 가지 않아서 운동회만큼은 아니지만, 어린 우리가 구경을 하기에는 더 없이 좋습니다. 배구는 우리 작은 아버지 두 분이 남천의 선수입니다. 경기 전에 남천 선수들이 둘러서서 연습을 할 때, 아버지는 공을 한번 치고는 넘어지고, 넘어지지 않아도 공이 삐뚜루 갔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 두 분은 어디서 배웠는지 보내고 싶은 대로 공이 착착 가고, 때릴 때도 공이 안 보이도록 세게 나가고 정확했습니다. 마을 청년과 함께 작은 아버지 두 분이 섞이기만 하면 어느 팀이고 이겼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배구를 군대에서 배우셨답니다. 운동경기라고는 몰랐는데, 군대서 익혀 선수로 뛰기도 하셨답니다. 둘째 작은 아버지는 하사관학교에서 훈련받는 모습을 앨범에서 보았습니다. 철모 위에다가 머리를 박는 벌을 받는 원산폭격을, 넓은 운동장에 가득한 군인들이 삼각형을 세워 놓은 듯이 줄을 맞춰서 벌을 받는 것을, 뭐가 좋다고 사진으로 찍어서는 추억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배운 배구로 두 작은 아버지가 손발아 착착 맞았습니다. 받을 때는 둘째 작은 아버지가 받았고, 작은 아버지가 띄우면, 둘째 작은 아버지가 여지없이 스파이크를 해, 우리 점수가 올라갑니다. 상대가 공격을 할 때는 두 분이 네 팔로 브로킹을 하면 웬만하면 다 걸립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시간을 잘 맞추는지 신기했습니다. 해가 어름어름 넘어갈 때 쯤 배구 우승을 하고 남천길을 걸으면 소백산 중턱에 높이 얹힌 동네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작은 아버지가 결혼을 해서 장정에 살림을 차리더니, 작은 아버지도 머지않아 장정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이젠 남천 선수가 아니라 장정 선수가 되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이 배구 대회를 처음 연 분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배구 네트를 살 수 없어서 새끼를 꼬아 만들었답니다. 무엇이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는 헌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운동회 때는 과격해서 슬프거나 아플 때도 있었지만, 배구를 할 때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배구대회를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원활하게 운영하는 것일 텐데, 거기에도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경기를 하지 않을 때는 호루라기를 불며 심판을 보았습니다. 작은 아버지가 경기를 할 때는 물론 심판을 볼 때에도 우기다가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추석은 할아버지네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았고, 어른들까지 함께 장정으로 내려와 배구대회를 하는 것도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