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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Apr 23. 2023

나를 벗고 찾은 자유함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가슴속, 머릿속에 가득 또아리를 틀고 있던 그 무엇들이 나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 오랫동안 내 안에 틀어 앉아 나를 주저앉혔던 그 무엇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다. 그동안 나를 억누르고 있던 주범이 무엇일까?     

저녁을 먹고 문은 반쯤만 열어 놓은 채로 쪼그리고 앉아 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친다. 밤공기가 쌔~애 하지만 눈이 온 뒤라서 기분은 상쾌하다. 공기 중의 먼지들은 눈과 함께 달라붙어 내려 버렸는지 바람도 밤하늘도 다 정화된 듯 고요하고 차분하다.  

  

 



글쓰기는 나의 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나?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글 쓰는 행위를 시작하면서부터 막혀 있던 것들이 풀리기 시작한 것 같다. 병목현상처럼 꽉 막혀서 내려가지 못했던 일들. 그것들이 안에서 막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하고 몸 안에서 다시 병을 만들었나 보다.  



그 당시 나의 문제들은 나보다 훨씬 큰 존재들이었다. 가장 큰 덩어리는 딸의 병세였다. 그때까지 모범생이라 불릴 만큼 아이는 생활을 잘해나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전교 2, 3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예능이건 외국어이건 특별히 사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잘해 줘 믿음이 가던 아이였다.





고등학교 1년 초 무렵이었다. 아이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씩 심해지기 시작했지만, ‘사춘기의 반항’에서 나오는 행동이려니 했다. 평범하지 않은 일탈 행동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몇 차례의 전학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고2를 넘기지 못하고 결국 자퇴를 해야만 했다. 그 후에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이 내려지고 그제야 시간을 되돌리기에는 늦어 버린 걸 알았다. 초기에는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조금 부족하더라도 일반인들과 같이 사회의 일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뛰어다녔다.  


   

딸도 약 복용과 함께 반은 깨어 있고, 반은 덜 깬 상태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정보공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전공과 관련된 국가 자격증들도 따내기 시작했다. 0.5초 느린 반응을 보이는 증상 외에는 겉으로도 그렇게 딱 드러나지는 않았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고 싶다고 한다. 걱정은 됐지만 모처럼 의욕을 보이는 딸의 모습에 나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호주 유학 박람회에서 소개받은 모 유학원 원장님과 몇 번의 미팅 후 현지인의 홈 스테이를 선택했다. 딸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고 역시 보내길 잘했구나 싶었다. 날마다 E 메일과 전화로 자신의 상태를 전해왔다. 


    

  “엄마, 여기 오니까 환청도 거의 안 들리는 것 같아요.” 
 “블랙 수완
이라는 호수가 있는데요 엄마 오시면 꼭 보여 드리고 싶어요.”    

 

날마다 환희가 넘치는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오랜만에 행복감에 젖었다. 딸아이는 호주 시민이 되겠다는 당찬 꿈을 가졌고 나 또한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딸이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본지가 얼마만 인지. 좀 무리해서라도 딸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호주에서 2년제 매니지먼트 과정을 듣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약 복용을 멈춘 것이 원인이었다. 어느 날, 교회 사모님께서 연락이 왔다. 딸이 집에 안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연락 두절. 호주 국립병원에서 연락을 받기까지의 2주일 남짓의 기간은 호흡이 멈춘 듯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했다. 물리적인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딸을 만나러 호주로 향했다. 딸은 그 누구의 면회에도 응해주지 않았고 나는 하루 만에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 후 1년여 호주 병원 입원, 인천, 서울에서의 입원, 행방불명, 병원 응급 수송 등.... 딸과 함께 생사를 오고 간 시간 들이었다.      

 그 전의 10여 년이 딸을 살려 보려 번 아웃이 될 정도로 일에 매달렸던 시간이었다면. 2011년 이후의 10여 년은 딸과 함께 운명의 널뛰기에 갇혀 있는 기간이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흔들어대는 ‘바이킹 놀이기구’에 딸아이와 나는 서로 반대편에 있었다. 아우성도 치지 못하고 두려움에 함몰된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병원에서는 안타깝다고만 한다.

육체도 정신도 나의 모든 에너지는 바닥 나 있었다. 더 이상 나를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인과응보’라는 말로 내 가슴에 빠지지도 않을 대못을 박아 놓기도 했다. 그것도 가족이. 내가 제일 아꼈던 가족으로부터. 삶의 방식이 잘못되어서 내 딸이 그런 병에 걸렸단다. 섭섭하다 못해, 마치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묶어 바다에 내던져진 듯했다. ‘상처’라는 추상적인 표현으로는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나의 육체는 면역력 제로 상태. 체온은 35도 대를 유지하고, 모든 면에서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목젖을 잘라내는 수술부터 염증을 가라앉히는 내과 외과 수술이 이어졌다. 치료 과정도 지난했지만 낫기도 힘들었다.   

  

‘척’하며 살아가기     



딸은 정신 병동에, 엄마인 나는 외과 병동을 들락거리며 그 시간들을 견뎌냈다. 아니 흘려보냈다. 그리고 다 놓아 버렸다. 삶 자체를.

그때부터 나의 가식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일명, “척 하기”를 선택했다. 안 그런 척, 슬프지 않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것만이 나를 더 비참해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해도 나는 끄떡없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의 한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왜 아무 말도 못 해? 저항하는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나’가 싸우고 있었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끝간 데 없이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는 나를 살린 것은 뜻밖에도 친정어머니의 ‘말’이었다. 말로 상처받았던 내가 오히려 말로 위로를 받았다.   


   

“네가 밝게 하고 다녀야 딸도 살릴 수 있지.

저 옷들은 다 입지도 않고 언제 입고 다닐 거냐?

그 아이는 이제 내려놓고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섬광처럼 나를 돌아보게 됐다.    

‘죽어지지도 못할 거면서, 내 건강도 돌보지 않으면 주변에 민폐가 되겠구나.’      

친정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간의 숨기만 하려 했던 소심한 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큰 용기를 필요로 할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내게 생긴 일이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러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건, 10여 년 이상의 시간을 인생 직무 유기 한 것만은 사실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내면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주변만 빙글빙글 돈 셈이다.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서 나를 보려 하지 않았다.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할 엄두를 못 내고 겁쟁이처럼 그 주변에만 머물러 있었다. 결국, 내가 나를 쫓아낸 셈이다.   


   ‘이제는 딸이 병원 밖의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답게 살아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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