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길잡이교사 (2)
길잡이교사의 역할은 단순히 활동을 지원하거나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관계를 돌보는 일’이다. 관계는 학교의 분위기와 방향을 좌우한다.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학교는 청소년들에게 가고 싶은 곳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 은하수학교에 온 청소년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처음 어색했던 이들이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에는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되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관계는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는다. 그 속에는 길잡이교사의 세심한 노력이 숨어 있다.
나는 은하수 4기에는 ‘별난기자단’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청소년이 관심 있는 주제를 취재해서 기사문과 뉴스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구성원은 다양했다. 중학생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 각기 다른 해외 문화권에 살던 학생들까지 다양하게 모였다.
한해를 돌아보니 본래 목표했던 바와 달리 눈에 띄는 성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점은, 프로젝트 후 개선된 아이들 간의 관계다. 초반에 관계를 구축하고, 중간중간 갈등을 해결하며 공동체를 세워나갔다. 별난기자단에서 관계를 구축한 3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시간이다. 친해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새 학기에 어색했던 옆자리 짝이 학기 말에는 단짝 친구가 되어 있듯이, 시간과 관계는 비례한다. 달리 말하면, 프로젝트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관계를 구축하기 어렵다. 청소년이든, 길잡이교사든 프로젝트 참여가 공동체를 원활하게 운영 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이유다. 적극적인 참여에서 좋은 관계가 시작된다.
둘쨰는 추억이다. 단순히 오랜 시간만 보낸다고 추억이 생기지 않는다. 보낸 시간이 즐거워야 한다. 추억은 지나간 시간 중 특별하고 의미있던 경험이다. 함께 보낸 시간은 ‘추억’이 되어야 한다. 은하수학교는 의무 교육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재미있지 않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길잡이교사는 청소년들의 욕구를 바탕으로 기억에 남는 추억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젝트는 일이 되고 만다. 별난기자단은 ‘공동체 구축‘ 시간을 자주 보냈다. 식사를 하거나 월미도 테마파크, 자유공원 등에 놀러 가서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별난기자단 활동일 중 공동체 구축이 20%를 차지한다. 새로운 청소년이 왔을 때나 시험 기간 후에 공동체 구축 활동을 하고 나면 청소년들은 격히 친해진다. 추억을 바탕으로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대화다. 깊은 관계는 깊은 대화에서 비롯된다. 바쁘게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동안 길을 잃기 쉽다. 1년 간의 활동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지켜나가긴 어렵다. 상횡에 따라 중간에 방향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성원과 마음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난기자단은 한 달에 한 번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활동을 멈추고 공동약속, 목표, 관계, 프로젝트의 개선할 점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한번은 성찰의 시간에 ‘활동이 재미없다’는 피드백이 나왔다. 뒤늦게 프로젝트에 합류한 청소년이 말했다. 프로젝트 계획을 세울 때 없었고, 본인이 처음 기대했던 바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한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걱정했는데 속내를 들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후 의견을 반영해서 다음 활동과 탐방 가고 싶은 곳을 수정했다.
고맙게도 팀장이 성찰의 시간을 잘 운영해 주었다. 만약 길잡이교사가 진행했다면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관계가 좋더라도 성인과 청소년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다. 청소년이 진행할 때는 더 적극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결국 ‘별난기자단’ 프로젝트는 눈에 띄는 성과물은 없었지만, 청소년들 간의 관계 형성이라는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낯설게 은하수의 문을 두드렸던 청소년은 끝날 무렵 “은하수가 좋아졌어요. 내년에도 또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은하수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갈등도 발생한다.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구나 갈등을 겪는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이다.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성숙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별난기자단에서 공동체 구축 활동을 한 어느 날이었다. 보드게임을 한 후 근처 공원에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보드게임을 마친 A가 갑자기 명찰을 팽겨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행방을 알고 보니 집으로 향했던 것.
당시 무슨 상황을 바로 알지 못했지만 이후 학부모과 전화통화를 통해 A가 B와 갈등을 빚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지만, A는 연락이 닿지 않고, 몇 주간 은하수에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A와 B는 프로젝트 내에서 매우 친한 사이였다. 중학교 3학년이던 A와 중학교 2학년이던 B는 작년에도 같은 프로젝트에서 만나 이미 가까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B는 본인의 장난이 A를 기분 나쁘게 만든 것 같다며 A와 회복하길 원했다. A를 기다린 끝에 다시 은하수에 나온 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B와 갈등이 있었다고 들었어. B는 A와 갈등을 풀고 싶다고 말하는데 잠시 같이 이야기 나눠보지 않을래?“
A는 고민 끝에 B와 대화에 참여하기로 했다. 운영지원팀의 도움을 받아 관계 회복 서클을 개최했다. A, B와 나, 운영지원팀 교사가 참여했다. 관계 회복 서클은 두 사람 간 비폭력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방법이다. 비폭력대화는 관찰(“내가 ~을 들었을 때”), 느낌(“나는 ~을 느껴”), 욕구(“왜냐하면 나는 ~을 원하기 때문이야”), 부탁(“~할 의향이 있니?”)의 4단계 순서로 이루어진다.
오랜만에 모여 근황을 나누는 체크인으로 공간을 열었다. 이어진 침묵 속, 운영지원팀 교사가 입을 먼저 열었다. 판단하지 않고 속에 쌓아 둔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A와 B는 각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털어 놓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A는 B가 본인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시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해외에서 지내다 왔기에 서로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B는 편하게 다가가는 게 친밀감의 표시라고 생각했지만, A는 형으로서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던 것이다. A는 B가 장난을 칠 때 무시당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서로의 욕구를 표현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오해가 쌓이고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 통했기 때문일까. 서로 눈물을 흘리고 안아 준 후 서클은 마무리 되었다.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두 청소년은 관계 회복의 첫걸음을 뗐다. 그들은 단순히 갈등을 풀었다기보다,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이해한 순간이었다. 이후 둘은 둘도 없는 관계가 되었다. 서로의 기질과 특성을 이해하는 관계로 성장했다. 이 일은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중요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은하수학교의 역할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진정한 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사는 청소년의 관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길잡이교사는 삶의 모델을 제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교사를 보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건 오직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만이 가진 관계를 통해,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다.
관계는 기술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최근 AI와 디지털 교육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배운다. 교육의 본질은 바로 이 관계에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배움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등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면서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타인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