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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Apr 24. 2024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

새벽 3시, 잠에서 깬 나는 서글피 울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남아, 나도 모르게 곧추세워진 상반신을 움켜 안으며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검은 복장을 한 저승사자가 다가오더니 “네가 준비가 되거든 엄마를 데려가겠다.”는 말을 남긴 채 군중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를 정신없이 뒤쫓았다. 그를 붙잡았더라도 머릿속이 하얘져서 막상 아무 말도 못했을 것 같긴 하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해결하지 못해 남은 잔여감이 화살처럼 심장을 꽂혀 꺼림칙한 불길함이 뿜어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런 식의 일방적 통보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내가 한국 친정집에 온 건 엄마의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한국을 떠나 산 지 4년 반, 한 번 정도는 들어 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건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었다. 평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곳에 나와 살게 되면 고국의 방문은 정기적인 숙제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행여 그걸 몇 년 거르게 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버린 책무감이 생활 곳곳에 한숨처럼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해치울 수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살아간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상황이 여건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임에도 나는 어느새 죄인이 된 기분 속에 서 있다. 


어느 순간 나는 엄마가 많이 아픈데도 “고비를 넘겼어. 이젠 살았어. 지금은 괜찮아.” 이렇게 과거형으로 접해야 하는 딸이 되어 있었다. 먹는 족족 죄다 토해내고 죽을 것만 같았는데  이젠 됐다고……. 현재형으로 이런 일들이 진행이 되는 순간에 내가 낄 수조차 없는 처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던 거다. 엄마가 한 바탕 앓다가 건강을 회복했다고. 아니, 어쩌면 그렇다고 믿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냥 내가 믿고 싶은 대로 현재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믿음을 사실인양 저장해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 앞에 무슨 일들이 펼쳐질지도 모른 채 오늘을 산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나의 것이 아닌 듯 살아가고 정해진 미래가 있음에도 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인생이란 시간 속을 걷는다. 준비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들을 놓쳐 가며 무방비 상태로 삶을 마주해 버릴지언정 말이다. 


죽음. 부모님의 죽음 또한 그럴 것이다. 


나를 빗겨나지 않을 미래에 꼿꼿이 서 있을 너무도 분명하고 확고한 사실이지만 나는 거기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떠올려보는 것조차 힘들어 외면해왔다. 그러다 어쩌다 주변 지인 부모님의 부고를 듣게 되고 그들이 이런 저런 넋두리를 할 때 나는 여기에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것쯤을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이 가지는 무게감을 버틸 힘이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몇 년간 미뤄왔던 나의 한국행은 어이없을 정도로 사소한 이유로 진행됐다. 남편의 OTP 기계 배터리가 나가면서 한국 거래 은행 계좌가 막힌 탓에 우리 가족은 예정에도 없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배터리 하나 때문에 가게 될 것을 못했다는 어처구니가 쥐구멍을 스스로 찾아야 할 상황이 나에겐 바로 완벽한 타이밍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의지가 아닌 상황이 나를 움직였다. 내가 한국을 간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큰언니는 그제야 말을 꺼냈다.

“사실 엄마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당신도 이제 그만 쉬고 싶다고 그러시네......” 

예상치 못한 전개에 깜작 놀란 나의 말들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전에 선영언니는 말을 이었다. 

“너 진짜 잘 오는 거야.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모든 말들은 통곡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왜 나는 엄마의 마지막이 될 순간들조차 제때 들을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회한과 함께 엄마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합쳐진 채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뿜어냈다. 나의 공간을 전화기 넘어로 타고 간 울음소리가 선영언니에게 닿자 우리는 모든 침착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형부는 

“장모님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데 두 자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엄마의 말에 완벽히 공감한 나머지 이성이 순식간에 마비 온 우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엄마라면 충분히 이제 그만하고 싶단 생각이 들 수 있을 거야. 그럴 수 있지, 쉽지 않은 인생이었으니……. 그런데 나는 안 돼. 그렇게 못해. 엄마 절대로 생을 포기하지마. 견뎌죠. 포기하지 말아죠. 엄마, 살아내죠. 엄마 나 엄마 없인 못 살아.’


나는 장소가 어디든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틈만 생기면 그 사이로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세수를 하다가도, 밥을 하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울다가 심지어 치과 검진을 받으면서도 계속 울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었던 간호사는 연실 괜찮냐고 물었다.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자 간호사는 불빛의 강도를 줄여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몰랐다. 엄마와 근 7년이나 떨어져 살면서 이젠 엄마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일상 속에서 엄마의 유무가 이토록 큰 것일 줄을…… 내가 사는 세상 속에 엄마의 존재를 잃는다는 건 상상조차도 도무지 용납이 되지가 않았다. 엄마가 죽을 수 있다는 것. 내 삶의 모든 것들이 슬픔과 아픔으로 점철되고 마는 것.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내 눈 앞에 보이는 엄마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버린 엄마의 모습이 병을 안은 채로 내 눈동자에 스캔이 되어버리자 나의 심장은 그 시간을 삽시간에 흡수해버린 듯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구겨진 주름 사이사이로 고통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아팠다. 엄마의 종아리와 발은 곧 터져버릴 것처럼 팽창되어 있었고 누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건강에 문제가 있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눈물이 반사적으로 얼굴을 타고 내렸다. 나는 엄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두려움처럼 인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다가 엄마 발을 씻겨 드렸다. 물속으로 눈물이 합쳐졌다. “엄마, 죽지마 ……. 이렇게 죽으면 자식 가슴에 못 박는 거야. 그럼 나는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닌 게 돼. 엄마 이렇게 죽으면 절대 안 돼. 엄마 살아……. 꼭 살아야해.” 

엄마를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고 싶었다. 엄마가 곁에 없었어도 살아졌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함에 흩어질 정도로 나는 절박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엄마가 사는 것이 엄마 삶을 위하는 것임이 아닌 자식의 삶을 위해서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엄마 인생 살아, 엄마도 엄마가 좋은 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다른 사람이 아닌 엄마 자신만을 위하면서 살아.”했던 내가 이제와 

“엄마, 엄마가 하고 싶은 거 하면 안 돼. 엄마 자식 위해서 살아야지.”며 논리를 바꿔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기와 엄마의 이타를 일직선상에 배치해놓고 엄마의 삶의 동기를 만들고 있었다. 내 엄마의 삶은 그러했다. 자신은 없고 자식만 있는 그러하기에 너무 짠하고 슬픈 인생인데 나는 거기다 대고 감히 이를 논리 삼아 또 한 번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떻게 더 자식을 위하나 싶은 엄마의 삶 앞에서 말이다. 


엄마는 나에게 “은영아, 괜찮아……. 사람이 지려면 이렇게 한 순간에 갑자기 져버리는 거야. 이게 세상의 이치이자 순리야.” 하며 흐느꼈다. 스스로의 죽음을 그렇게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몸이 모든 방향으로 죽음을 가리키기에 병원에 가는 일이 더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한 평생을 자식 위해 썼지만 정작 자기를 위해 쓸 순간조차도 자신만의 것은 없었다.


내 엄마가 아프다고 한국에 갔을 때 한 걸음에 달려와 준 건 앞 동 살았던 연진 언니었다. 그 때 언니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줬다. 

“나는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 내가 고은이를 임신했을 때도 내 따귀를 때리던 사람이었어. 우리 아빠는. 그래,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울지 않았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은 게 아니라, 하나도 슬프지가 않으니까 그랬던 거야. 그런데 아빠와 사이가 좋았던 언니는 아빠가 죽었다고 저렇게까지 울까 싶을 정도로 울더니만, 2년 동안을 우울증을 앓더라. 참 이상도 하지 그러던 언니가 나아질 무렵 언니가 가지고 있던 슬픔들이 나에게 전이가 되더라고. 내가 아빠 생각을 하면서 울게 된 거지. 그래 이상한 일이야. 그렇게도 싫었던 아빠였는데,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와.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이게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구나.’하는 이해로 지난 기억들이 모아지면 그게 슬픔에 닿게 되는 거야. 부모를 잃는다는 게 이런 거더라고. 어느 순간에는 말이지 아무리 밉더라도 슬픈 건 슬픈 거야. 그래, 슬퍼도 너무 슬퍼. 

사람이라는 게 그래. 생을 사는 시간대가 서로 달라서 같은 공간 속을 몰이해로 이어진 관계들이 상대의 시간으로 다가서면서 이해로 묶이게 되더라고. 그러니까 부모 살아계실 때 잘 해. 사진도 많이 찍어 두고……. 너는 아직 모르지. 목소리 듣고 싶은데 들을 수 없다고, 만나고 싶어도 만나 볼 수 없다는 것을 말이지. 엄마 냄새, 품 모든 것이 마지막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들을 잘 간직해 둬.”


우리는 가족들끼리 의사도 고치지 못할 상채기를 남기며 산다. 그렇지만 몇 안 되는 추억들로  지난 과오들을 덮고 함께한 모든 시간을 미화해 내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의 의미는 그 자취를 남기는 과정 속에서는 알 수가 없다. 그 끝에는 어떤 게 되어 남을 건지. 내가 그리고 있는 현재가 어떻게 표현될지 그림이 다 그려진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엄마는 다르다. 내 기억이 전부 왜곡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다. 엄마는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했고, 엄마가 가진 전부를 주는 것도 모자라 그 이상을 희생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엄마가 없는 삶이란 지구상 모든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슬픔이지 않을까. 


그간 완강히 병원 검진을 거부하던 엄마는 내가 입국을 하자 그제서야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검사를 받으면서 울었다. 죽을죄를 지은 죄인도 아닌데, 죽을 날짜 받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렇다면 이를 그 어느 누가 감당을 할 수 있으랴?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로 인해 죽음이 야기돼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면 아무리 힘들고 지쳐서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자일지라도 내면의 감정은 눈물이라는 실체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기 마련인가보다. 억울함에 죽음을 이런 식으로 더한다는 건 인생이 억울함 속에서 거듭 팽창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서사밖에 남지 않는 탓일까. 엄마는 그렇게 우셨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나타난 의사선생님은 내시경하기 전에 먼저 엑스레이 촬영부터 하겠다고 했다. 10여분이 흘렀을까? 의사는 나를 진료실로 불렀다. 그러고는 형광등이 들어오는 보드판에 엑스레이 사진을 걸었다. 폐렴 증상도 있고, 심장이며 신장이며 장기들이 전반적으로 다 안 좋은 상태라서 내시경을 했다간 이것 때문에 죽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사진 상에 갈비뼈 상측 부위의 세 개 만이 육안 상으로 들어오고 그 아래로는 연기처럼 모든 것에 뿌옇게 보였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약을 써보고 결과를 지켜 보자고만 했다. 그렇게 예약이 되어 있던 내시경검사는 취소가 됐다.  


엄마의 피검사를 위해 주사실로 갔다. 간호사는 엄마 팔을 걷어붙인 뒤 피를 뽑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닌 나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자식이 엄마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되는데, 왜 무턱대고 위내시경 예약부터 했어요?” 따지듯이 물었다. 

“의사선생님이 엑스레이 안 찍고 내시경 했으면 어쩔 뻔했어. 쯧쯧”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혼잣말처럼 하는 말이지만 의도는 나를 탓하고 나무라는 것이 역력했다.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건 검사가 아니라 진료인데,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검사부터 하다가 돌아가시는 수가 있어요. 어른들이 돌아가시는 건 암과 같은 큰 병 때문이 아니라 잔병 때문이라고요.”

마치 무지한 딸이 엄마를 잡을 뻔했다는 타이틀이라도 내 이마에 붙이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폐렴 증상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인식을 시켜주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큰 소리로 강조하며 

“노인 사망률 중 가장 높은 원인이 되는 것이 폐렴인 건 아시죠? 어머님 폐렴이시네요.”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심란한 딸에게 죄의식이라는 쇠꼬챙이를 꽂아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에서 살았는데 이렇게 고압적인 간호사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 것은 짧았던 미국 생활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간호사보고 ‘당신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러느냐?’고 되받아칠 수도 없었다. 이것 또한 무례함인 거고 어찌됐건 지금의 나는 그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불효를 해온 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이러한 불편한 현실 인식 속에 나는 또다시 아빠를 떠올리며 미움이라는 감정 한 가운데 섰다. 엄마의 삶을 이토록 불쌍하게 만든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이랬는데 아빠는 엄마가 이 지경이 된 시점에 내 앞에서 자신이 엄마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잘 하는지 온힘을 다해 입증해내려 했다. 사람이 어쩜 이럴 수 있나 싶은데 아빠는 정말 그랬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가족의 내부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에게 ‘자신이 좋은 남편임’을 증명하고자 자신의 언어를 총동원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빠가 짜증이 났다. 아니, 이 상황에서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아빠, 인간은 영적인 존재야.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느껴지는 게 있고, 그냥 알게 되는 게 있다고.”


나는 이 말을 통해 아빠가 제발 현실을 감응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아빠는 자신이 엄마에게 어떤 남편이었는지에 대해 왜곡된 기억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단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이어질 것임을 잘 안다. 그렇게 남은 시간들 또한 엄마를 위해 좋은 남편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좋은 남편으로서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가겠지. 그게 그 어떤 가치도 의미도 심지어 쓸모도 없다는 것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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