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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뉼이 Oct 01. 2024

인생의 대물림

지금도 작은언니, 자영 언니를 보면 같은 집안 사람이라고 하기에 나와는 이질적인 구석이 참 많다. 특히 언니가 사람들을 대할 때 보면 특유의 밝고 싹싹한 분위기에 이상적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어색함도 단 한 번의 어려움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회성은 넉넉히 쓰고도 남을 정도처럼 보여 난 그런 언니를 늘 부러워했다. 자영 언니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 내면의 좋은 것들을 꺼내 주변 사람들에게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삶은 정말이지 꼭 닮고 싶었다. 여장부 같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따뜻한 카리스마를 품어내는 그런 그녀가 내 언니라는 것은 나의 자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려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언니가 하는 건 뭐든 죄다 좋아보였다. 언니가 쓴 글을 가져다가 학교 숙제로 제출하기도 하고 언니가 그린 그림도 그렇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닌 언니의 실력으로 반친구들보다 월등히 우수해지는 마법을 누린 적도 있었다. 뭐 이런 건 내 도덕성의 문제지, 언니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거나 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한 술 더 떠 언니가 그림이라도 그리면 꼭 옆에서 같이 한다고 난리 법석을 부리기 일쑤였고 위에 붓칠을 더했다가 망치기도 했다. 그걸 본 언니가 내게 화를 내고 나는 그걸 또 아빠한테 이른다고 울어버렸다. 이 상황과 사건의 결말은 늘 같았다. 아빠는 언니에게 어린 동생이 뭘 안다고 그렇게 화를 내냐며 다그쳤고 늘 언제나 내 편에 서 있었다. 하루는 참다못한 언니가 폭발해 나를 심하게 몰아붙였는데 그걸 본 아빠는 언니의 안경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새로 산 안경이었는데, 아빠는 그랬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미안함이 나를 파고든다. 아빠에 대한 원망도 원망이지만 나에 대한 얄미움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나를 늘 챙겼다. 친구들과 도서관에 갈 때도 나를 껴서 데리고 갔고 심지어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이공원을 놀러갈 때도 초등학생인 나를 챙겨 데려갔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언니와 친구들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동석을 시켜줬고 심지어 나이트클럽에 갈 때도 나를 데리고 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언니는 그렇게 나를 챙겼다.  


그랬던 언니건만 언니는 결혼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형부는 뉴욕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개인 사업을 하는 비즈니스맨이라고 했다. 그 당시 젊은 여자들 사이에는 유학생 중에서도 뉴욕 유학생을 잡아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뉴욕이라는 도시는 그 집안의 경제적 여력을 입증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언니는 그렇게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 하는 결혼인데도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건 다 언니의 복이다 싶었다. 하지만 돈은 경제적 궁핍이라는 최소한의 불행을 막아주는데 효력이 있을지언정 행복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최소의 불행을 뺀 나머지 불행들은 언니 삶의 여기저기를 뚫고 들어왔다. 


자영 언니의 결혼생활은 눈물이 마를 날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신세 한탄으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형부 때문에 언니는 일을 해야 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언니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형부의 부정적인 에너지와 기운과 함께 언니는 우울의 늪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남을 챙길 여력은커녕 자기의 삶도 건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밤마다 울음으로 지샜던 언니의 베개는 곰팡이가 피어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언니는 이런 상황을 동생인 나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고작 몇 년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 동생 앞에서는 언니의 삶을 내비치지 않았다. 


가끔씩 삶이 견디기 버거울 때면 “언니가 너한테 더 해주고 싶은데, 형편이 그렇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런데 나는 안다. 언니는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언니는 진정으로 마음이 그런 사람이었다. 산타클로스처럼 선물을 보따리로 들고 다니며 하나하나 가족들에게 건네는 걸 기쁨으로 여겼던 그런 사람 말이다. 어디서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언니가 지금은 사랑은 고사하고 그저 불행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것들로도 이미 벅찰 정도로 힘든데 정말 내가 모든 내막을 알아버린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터질 것이 터져버렸다. 그 날 언니는 언니가 형부가 휘두른 의자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 거구나.’ 체험했던 밤이었다. 언니는  형부는 자신이 염세적인 것은 자신을 사랑으로 키우지 않은 어머니의 탓이라며 늘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원양어선 사업을 하셨던 엘리트 출신 아버지는 형부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돌아가시고 이후 어머니가 땅장사를 해가며 재산을 증식했는데 그 과정 속에 자식을 뒷전에 뒀던 것이 형부 성격이 뒤틀어진 원이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커서 아버지가 쓴 일기장들을 읽고 형부는 아버지의 죽음은 자살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도리는 없었으나 형부는 그렇게 믿어버렸다. 그 후로 형부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형부의 말대로 본인의 모든 삶의 불행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결과라 할지라도, 설령 그것이 무기력한 아이에게 부모가 전가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되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서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엄연히 폭행이고 가해다. 


그렇다고 나는 한 인간이 그 과거를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를 정도로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 형부가 가진 과거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 과거를 베어 내지 못한 채 그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지 못하는 그를 볼 때면 가슴이 아픈 것을 넘어 화가 난다. 그것이 내 언니에게 악영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었다. 나이 쉰을 넘기고서도 여전히 부모 탓을 하면서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도 책임이다. 과거를 벗어나지 못해 남은 인생마저도 그 속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 그로 인해 가족의 인생에 똑같은 상처를 주는 것을 연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 앞에서 이혼얘기를 꺼내들 수밖에 없다.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이젠 자기 인생을 살라고…… 남은 삶은 이보다 나아야만 한다고…… 더 이상 우울을 껴안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산영언니와 내가 언니를 붙잡고 이혼 말을 꺼냈을 땐 그만큼의 절박함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영언니는

“엄마도 그랬잖아, 엄마도 이렇게 살았잖아.”며 우리의 말을 일축했다. 이 말이 먹먹하게 다가오는 것은 언니가 그 힘든 삶을 떠안고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니의 말은 반박하기 힘든 사실이라는 것이 더 그러했다.  


누구보다 멋진 미래를 펼쳐나갈 것 같던 언니의 삶이, 여자라면 저렇게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들을 던져줬던 언니의 모습이 지금처럼 그려지고 있는 건 어쩌면 ‘엄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언니에게 이 비극적인 삶의 방식을 학습시키고 또 유산처럼 물려줬을지도 모른다. 형부가 가족으로부터 받았던 치유되지 않을 상처들을 언니 삶으로 끌어 들였던 것처럼 언니 또한 자신의 삶 속으로 엄마의 방식을 가져간 것일지도... 그래서 언니는 학대를 당하면서도 다른 길을 선택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생이 얽혀 무기력을 재생산했고 이는 또 다음 세대로 대물려질지 모른다. 바보처럼 한 없이 착하기만 했던 엄마의 삶, 그저 선량하기만 했던 엄마의 삶이 이렇게 현재로 이어져 언니의 상처로 머물 게 될 줄이야. 


엄마는 비명을 질렀어야했다. 그래서 그것이 훗날 딸이 목소리를 잃지 않고 눈물 흘릴 필요도 없게 될 날을 말들어 내도록... 그러나 엄마는 자신의 목소리를 속으로 삼키면서 스스로의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무기력하게 주저 앉아버렸다. 그래서 그 후로도 우리는 용기 있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문제 상황을 주변에 알리고 이를 해결하게 하는.. 엄마와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을 미래를 잃어버렸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삶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의 삶 속에 뿌리 내려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것이 좋은 파급이 될지, 나쁜 파급이 될지 모른 채, 모래알보다도 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일 것만 같았던 우리의 삶이 가계 속에서 백년을 거슬러 흘러내려갈 수 있는 눈덩이가 되어 산사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도 무지몽매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하찮게 여기며 오늘을 그저 함부로 시간을 흘러 보내며 살고 있다. 당당하게 나서서 나의 목소리로 세상에 대고 외칠 때 막혀 있던 틈을 관통해 마침내 불의의 벽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정의에 닿게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조 ‘어쩔 수 없다.’, ‘원래 인생이 그런 거다.’라며 고장난 인간처럼 또 참고 당하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자아가 반짝였던 작은언니가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엄마의 억울한 삶의 길을 이렇게 쫓아가고 있을 줄이야. 싫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의 모든 것들, 그것이 성인이 되어 필사적으로 대항해 전면 거부하지 않으면 결국 전부를 답습하게 되는 양자택일의 선택지 속에 국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삶으로 제공받은 선험의 답지를 그대로 답습해가며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던 딸은 다시 엄마의 꾹꾹 찍으며 걸어간 발길을 따라 인생을 걷어 나간다. 이 비극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엄마의 삶이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지만 언니의 삶에 있어서 학습된 불행이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엄마의 잘못인 걸까? 아니면 언니의 잘못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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